06 제가 좋아합니다.
(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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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제가 좋아합니다.
2022.08.19.
열린 문 바깥에 도진과 윤주가 서 있었다.
“어? 아까 그, 잘생긴 남자분이다.”
윤주가 먼저 진우에게 알은체를 했다.
“이 대리님이랑 친하신가 봐요.”
윤주가 먼저 엘리베이터에 성큼 올라타며 웃었다. 사근대는 윤주에게 진우는 별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회사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네.”
지나에게 보였던 환한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진우의 잘생긴 얼굴에서 풍기는 위압감은 어딘지 보통의 직장인들과 달랐다.
진우는 차갑게 대답하고는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도진은 도진대로 진우를 의식한 채 서 있었다. 서로 인사는 나누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미묘한 긴장감이 좁은 공간에 서렸다.
“과장님, 주말에 저랑 같이.”
진우를 힐끔거리던 윤주가 이번에는 도진에게 말을 붙였다.
“이 대리와 친해 보이던데, 무슨 사이입니까?”
윤주의 말을 자른 도진의 날카로운 질문에 진우가 피식 웃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비스듬히 서 있던 진우가 여전히 정면에 시선을 두고 대답했다.
“제가 좋아합니다.”
진우의 말에 순간 도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직 자신이 지나의 남자친구라는 걸 모르는 걸까.
“남자친구 있는 사람입니다.”
어이없다는 도진의 말투는 진우의 도덕성을 책망하듯 들렸다.
“알고 있습니다.”
진우의 목소리가 다소 낮아졌다.
“아시다시피 좋아하는 감정이 마음대로 되진 않아서요.”
이어 말하며 진우가 슬쩍 윤주를 쳐다봤다. 마치 도진과 윤주의 사이를 빗대어 말하는 것처럼. 안경 너머 도진의 눈이 가느다랗게 길어졌다. 진우의 속내를 가늠하듯.
그 사이 엘리베이터는 일 층에 도착했다.
“아, 두 분 잘 어울리세요. 그럼.”
진우가 깔끔하게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를 먼저 빠져나갔다.
도진은 마뜩잖은 눈으로 진우의 훤칠한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에 반해 윤주는 조금 멍한 시선으로 두 손을 마주 모았다.
“와, 진짜 잘생겼네요.”
도진은 당황한 얼굴로 윤주를 흘낏 바라봤다.
“저희 잘 어울린대요. 과장님.”
“퇴근하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도진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요. 과자아앙니이임.”
윤주가 애교스럽게 부르며 얼른 도진의 뒤를 따랐다.
***
총무팀에 들렀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퇴근 시간이었다. 퇴근한 사람들의 빈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마지막으로 지나의 시선이 닿은 곳은 도진의 책상이었다. 아까와 달리 깔끔하게 정돈된 걸 보니 자신이 없는 사이 왔다 간 모양이었다.
‘하…….’
힘이 절로 빠졌다. 언제부턴가 같은 사무실에 있는 도진이 멀게만 느껴져다. 도진의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여전히 답이 없었다. 휴대폰을 든 지나가 문자를 톡톡 써내려갔다.
[퇴근했어요……?]
지우고.
[외근은 잘 다녀왔어요?]
다시 지우고.
[외근 갔다가 오느라 힘들겠어요. 저녁 맛있게 먹고 푹 쉬어요.]
여러 번 고민하며 쓴 문자를 결국 전송하지 못했다. 지나가 휴대폰 쥔 손을 힘없이 내렸다.
‘언제부턴가 그 사람 앞에서 자신이 없다.’
그랬다. 남자친구의 눈빛에서 열기를 읽지 못한 순간.
어쩌면 지나도 알고 있는 진실. 그 진실을 직면하게 될까 두려웠다.
‘너도 이제 결혼해야지. 도진이가 말 안 해?’
‘이번에 나 결혼해. 청첩장 보낼게.’
가족과 친구들의 기대 어린 성화와 궁금증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휴…….”
지나는 힘없이 한숨을 내쉬며 책상을 정리했다. 보고서는 내일 아침 일찍 낼 생각이었다. 가방을 챙기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그래. 주말에 등산가자.]
도진의 문자였다. 지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함께 등산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생각에 설렜다. 방금까지 축 처져 있던 지나의 어깨가 다시금 올라갔다.
“아, 옷.”
커피 묻은 진우의 옷을 넣은 쇼핑백을 집어 든 지나의 시선이 차분해졌다. 진우의 체취가 배인 듯 은은한 향이 코 끝에 감돌았다.
‘돌려줘야지.’
진우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짙은 시선도.
‘정신 차려. 이지나.’
그때처럼 마냥 어린 18살 소녀가 아니니까.
***
다음 날, 사무실은 출근 시간부터 소란스러웠다. 정 부장의 걸걸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여기 오늘부터 같이 일할 인턴들입니다. 내가 특별히 우리 부서 담당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나를 보고 특별히 새 인력을 보내줬어요.”
‘특별히’가 두 번이나. 스스로 생색내기 일등가라면 서러울 정 부장의 말투다웠다.
“서진우 인턴. 조영희 인턴. 두 사람이고 우리 기획마케팅의 새로운 가족이니 잘 가르쳐줍시다.”
정 부장의 박수를 따라 직원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파티션 너머 지혜의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과 도진의 불만 어린 시선을 느낄 새도 없이 지나는 충격에 빠졌다.
‘서진우가 왜 여길……?’
어제 회사에 볼일이, 그 면접이, 이거였어?
진우는 어제처럼 검정 슈트를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물론, 어제처럼 짧은 와이셔츠 소매가 아니었다. 완벽한 핏인 진우를 향해 사무실의 여직원들의 한결 밝아진 시선이 쏟아졌다.
“자자, 그럼, 일들 하자. 이 대리.”
정 부장의 부름에 뒤늦게 지나가 일어나 다가갔다. 사무실에서 헛것을 본 것처럼 눈을 몇 번이나 비벼도 서진우가 제 앞에 서 있었다. 어제처럼 근사한 모습으로.
“여기 이지나 대리가 우리 팀 에이스야. 자네들 일을 도와줄 거니까 선배님께 잘 배워요.”
정 부장이 허허, 웃으며 간략하게 소개를 하고는 부장실로 사라졌다.
“안녕하십니까. 대리님. 잘 부탁드립니다.”
깔끔한 단발머리 조영희 인턴이 재깍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 옆의 서진우…….
진우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나를 향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또 만났네요. 이 대리님.”
다시 볼 줄 몰랐다. 진우의 고급스러운 와이셔츠는 어제 잘 빨아서 건조대에 널어놨는데.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당황하던 지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사무적으로 웃어 보였다.
“네. 반갑습니다. 저는 이지나 대리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앞으로 저희 사무실에서 하실 일들을 전반적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극존칭으로 깍듯하게 선을 긋듯 말하는 지나의 의도가 뭔지 뻔했다. 진우는 가볍게 뒷짐을 지고 선 채로 지나를 바라봤다. 그녀를 곁에서 가까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사람이었다.
“아, 그리고 보통은 사수 한 분이 일대일로 가르쳐주세요. 저, 이지혜 대리님.”
지나의 호출에 지혜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대리 이지혜입니다. 조영희 인턴 반가워요.”
아차, 태연함을 가장했던 지나의 표정이 흔들렸다. 당연히 서진우 인턴을 데리고 갈 줄 알았는데…….
지나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벙긋거리는데 지혜는 개의치 않고 조 인턴을 데리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진우가 느긋한 눈빛으로 지나를 바라봤다. 조금의 긴장과 떨림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무실 안의 직원 누구보다 여유로워 보였다.
“그럼, 제 사수님은 이지나 대리님이시겠네요.”
망했다.
지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진우가 이 부서의 인턴으로 온 것도, 거기에 제가 사수가 된 것도 너무 어이가 없었다.
“네. 어쩔 수 없네요.”
지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진우에게 말했다. 그 와중에 다행인 건 자리는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 대리.”
묵직한 도진의 목소리가 지나를 불렀다.
“아, 그럼 자리에 앉아 있으면 업무 알려드릴게요.”
도망치듯 진우를 피한 지나가 도진에게 다가갔다.
“네.”
도진은 어딘지 불만 어린 시선으로 지나를 바라봤다.
“보고서 아직 못 받았는데…….”
“아,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맞다. 보고서.
지나가 얼른 대답했다. 도진이 볼펜을 딸깍거리며 또다시 지나를 바라봤다. 어딘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에 지나는 계속 그 앞에 서 있었다.
“등산은 어디로 가지?”
처음이었다. 도진이 사무실에서 둘만의 데이트 장소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잘못 들은 것처럼 지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네?”
그러다 바로 어제 도진이 보낸 문자를 기억해낸 지나가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청계산 어때요?”
입사 초반에 회사 사람들과 함께 다니던 곳이었다.
“좋아.”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8시에 입구에서 만나.”
“네.”
그야말로 오랜만의 등산데이트였다. 지나는 얼마 전 5주년의 식사와는 다른 기분을 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도진의 한결 부드러워진 태도를 보면 어쩌면…….
프러……포……즈……?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지나는 괜히 제 얼굴을 매만지며 자리로 돌아왔다.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보고서를 도진에게 보내고 진우에게 알려줄 업무들을 챙겼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슬쩍 도진을 보는데 언제 왔는지 허 사원이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괜찮아.’
아무 사이도 아니야. 스스로의 마음을 다독이며 지나는 진우에게 향했다.
진우의 책상은 창가 쪽에 있었다. 햇살을 가장 많이 받는 자리였다. 진우는 컴퓨터를 켜 이것저것 보는 모양이었다.
흡사 화보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짙은 밤갈색 머리카락은 햇빛에 비쳐 밝은 갈색으로 반짝거렸다. 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 또한 광채가 어렸다.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지나는 진우가 고개를 돌리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대리님.”
호칭을 붙이며 미소짓는 진우에게 천천히 다가간 지나는 챙겨온 서류를 내려놨다.
“저희 2/4분기 기획서와 매출평균 보고서입니다. 공부 겸 한번 살펴보고 기획서 작성에 필요한 데이터를 모아주시면 됩니다.”
일부러 최대한 딱딱하게 말했다. 진우에게 선을 긋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궁금한 거 생기면,”
진우의 다갈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친 지나가 말을 멈췄다. 숨 쉬는 법조차 까먹을 정도로 진우의 눈동자는 열기를 띠고 있었다.
조금 더 다가가면 데일지도 몰라.
“언제든 물어보세요.”
지나가 서둘러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아직 하루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기운을 다 쓴 기분이었다. 지혜를 바라보니 조 인턴을 데리고 뭔가를 설명해주느라 바빠 보였다.
‘커피가 필요해…….’
좀비처럼 탕비실로 걸어가는 지나는 커피 머신을 보고서야 고장 난 걸 떠올렸다.
‘아, 오늘 진짜 무슨 날이야…….’
출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커피 사러 나간다는 것도 우스웠다. 믹스 커피라도 마실 생각에 종이컵을 꺼내는데, 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부름시킬 일 없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