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서 인턴이랑 잤어?
(9/80)
09 서 인턴이랑 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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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서 인턴이랑 잤어?
2022.08.30.
따뜻함이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부드럽게 내 몸을 감싸는 감촉에 지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지나의 뺨을 소중하게 감싼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맞닿은 그의 촉촉한 입술의 떨림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당황한 지나는 서진우의 키스를 피할 수 없었다.
서진우의 모습이 너무나 애절해서.
너무나 슬퍼 보여서. 그런 그가 자신을 위로해주는 것만 같아서.
왜인지 달큼한 그의 체취에 지나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의 마음을 알고 있어서일까. 지나를 바라보는 열기 어린 눈동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빛깔이었으니까.
오랜 시간처럼 느껴진 찰나, 지나가 먼저 입술을 뗐다. 둘의 사이로 달뜬 숨결이 흩어졌다. 터질 듯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서진우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지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슬픔이 깃들어 보여 지나는 눈물을 흘렸다.
“왜 울어요.”
서진우의 긴 손가락이 내 뺨을 조심스레 닦았다.
“한 대 때려야죠.”
그의 손가락이 닿은 곳마다 데일 듯 뜨거웠다.
“제가 억지로 키스했으니까. 때려요. 세게.”
진우가 짙어진 시선으로 지나의 손을 꼭 쥐었다. 잠시 혼란에 빠진 것처럼 보였던 지나가 피식 웃었다.
그녀의 반응에 진우가 놀란 듯, 한쪽 눈썹을 올렸다. 지나는 흔들리는 시선을 애써 돌리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키스라니. 이건 그냥 뽀뽀지.”
“뽀뽀…….”
진우가 지나의 말을 따라 읊조렸다.
“이건 서양에서 만날 때나 헤어질 때 흔히 하는 뽀뽀뽀잖아.”
한껏 붉어진 볼로 태연한 척 말하는 지나를 내려다보는 진우가 입술을 감쳐 물었다.
“아. 뽀뽀뽀.”
그녀를 따라 말하며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나가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난 진짜 갈게.”
억지로 웃는 얼굴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진우는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부드럽게 웃었다.
“네. 조심히 들어가요.”
후다닥, 달려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현관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이어 들렸다. 그 뒤로 찾아오는 적막감에 진우는 불도 켜지 않고 그대로 주방으로 향했다.
길게 늘어져 있는 와인렉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든 진우는 유리잔을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술이 더 필요한 밤이었다.
***
마법의 탑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하늘 높게 솟은 진우의 아파트는 목을 꺾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도로로 나와 차가운 바깥바람을 맞자 비로소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지나는 몇 번이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하아…….”
아무리 해도 폐부까지 숨이 닿지 않는 기분이었다. 뭔가가 콱 막힌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일부러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아무리 쳐도 시원하지 않았다.
억지로 괜찮은 척,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내뱉고 왔다.
진우를 밀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어떤 변명도 방금 전의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마치 길을 잃은 것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 같았다. 그 와중에 진우와 닿았던 입술은 여전히 뜨거웠다.
도장을 찍듯, 꾹 내리눌렀던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입술이 아닌, 마음 깊숙이 도장을 찍은 듯한 기분을 애써 외면했다.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밤 11시가 넘는 시간이었다. 택시에 올라탄 지나는 시트에 깊이 기댔다.
도진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술에 취한 여자친구 걱정은 잊은 건지. 서운함이 밀려왔다.
‘바쁘려나.’
뒤늦게 회식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다. 정 부장의 바지에 술을 쏟는 장면이 느리게 떠올랐다.
‘내일부터 어쩌지…….’
이직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지나가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입사하고 회식에서 이런 추태를 부린 건 처음이었다.
‘미쳤어. 이지나.’
내심 도진의 행동에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나 혼자 오해하고 서운해한 걸지도 몰라.’
마음을 애써 정리한 지나는 눈길을 차창 밖으로 돌렸다. 까만 밤하늘 아래, 스쳐 지나가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보자 진우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윽한 눈빛은 그야말로 달콤한 유혹이었다. 결국 지나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
다음 날, 아침 출근한 지나는 하필이면 사무실 앞에서 부장과 마주쳤다. 역시나 지나를 바라보는 부장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저거, 이제 술 먹이지 마. 아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장이 사라질 때까지 지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얼음처럼 굳어있었다.
“꼰대 갔어.”
귓가에 소곤거리는 지혜의 목소리에 얼음이 땡, 풀렸다. 조심스레 자리에 앉은 지나는 컴퓨터를 켰다.
[괜찮아?]
휴대폰에 지혜의 톡이 날아왔다.
[응. 어제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니…….]
[자기 대박이었지. 부장님 완전히 기겁하는데 옆에서 과장님이 아주 아기 다루듯이 케어해주셨어.]
역시 도진답게 상사를 챙기는데 일등이었다. 지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 인턴이 너 챙겼잖아. 그나마 친한 동생이라고 듬직하더라.]
갑작스러운 진우 얘기에 지나는 잠시 손가락을 멈췄다. 어젯밤 일이 떠오르자 얼굴이 절로 화끈거렸다.
[인턴사랑 사수사랑, 점심은 해장각.]
장난스러운 지혜의 음성이 그대로 들리는 것 같았다. 피식 웃은 지나가 얼른 답을 보냈다.
[알았어. 이따 봐.]
[ㅇㅇ 수고]
휴대폰을 책상에 놓기 무섭게 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지나 대리.”
평소보다 낮게 울리는 소리가 꽤 묵직했다. 도진이 부르는 이유가 보고서 때문일까, 아니면 어제 조심히 들어갔냐는 걱정일까. 도진에게 걸어가는 짧은 길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회의실로 가지.”
길게 얘기할 생각인지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섰다.
회의실 문이 닫히고, 블라인드가 올려진 유리창 밖으로 사무실 전경이 보였다. 도진을 바라보기 전, 서진우의 빈 창가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 대리. 어제는.”
피곤한 기색이 선명한 도진이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제정신이야.”
그의 첫 마디가 실망스러웠다. 지나는 맞잡은 손가락에 힘을 줬다.
“회식 때 술주정이라니……. 나 원 참. 부장님한테 술 흘리는 건 또 뭐야? 내가 어제 얼마나 난처했는 줄 알아?”
도진의 말투와 행동은 부하 직원을 책망하는 그 정도였다.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에게서 날 걱정하는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그만 해야 할까.
“도진 씨.”
지나의 부름에 도진의 차가운 시선이 지나에게 향했다. 확실히 진우의 눈과는 다른 더없이 차갑고 냉랭하게 식어버린 눈동자였다.
“우리 그만 해요.”
“뭐……?”
도진의 가느스름한 눈이 커졌다.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후…….”
도진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 스물아홉이나 됐으면 유치한 사랑 타령은 그만하자.”
그는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 감성적인 생각은 이제 졸업해야지. 우리가 자그마치 5년이나 사귀었는데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지나야. 그게 의미가 있니?”
실망감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지나는 억지로 울음을 누르며 답했다.
“적어도 나에겐 있어요.”
지나의 말에 도진이 놀란 듯 지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언제부터 그렇게 유치했어?”
끝까지 그의 책망하는 듯한 말투는 지나의 마음을 할퀴었다.
“내가 어제 너 안 챙겼다고 그러는 거야?”
어떻게든 이해하려는 도진의 질문이 되려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아뇨.”
지나가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도진이 심각한 얼굴로 안경을 치켜올렸다.
“말했잖아요. 당신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요.”
“나한테 물어봤어? 물어보고 말하는 거냐고.”
사랑을 말로 하란다. 도진의 뻔뻔스러운 말에 지나는 할 말을 잃었다. 지나가 도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도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매를 비틀었다. 지나가 손을 꼭 쥐고 도진을 노려봤다.
“나 사랑해요? 아니, 사랑하긴 했어요?”
속이 버글거렸다. 입안에 모래가 들어간 듯, 버석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두고 보란 듯이 물어보는 지나의 물음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도진이 눈을 살짝 치켜들었다.
“지금 물었으니, 대답해줘요.”
확실한 답을 바라듯이 지나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도진을 쳐다봤다. 도진이 목덜미를 매만지면서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하…….”
방금 제 입으로 사랑 운운, 유치하다고 말한 후였다. 도진이 쉽게 답하지 못하자 지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그만하는 게 맞아요.”
지나는 덤덤하게 결별을 말했다. 회의실 안의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5년 동안의 연애가 이렇게 끝나는구나 싶어 허탈했다. 그럼에도 딱히 슬픔은 없었다. 미련도 없었다. 알지 못했던 제 마음의 상태까지 알아버린 것 같았다.
“여기서 좋게 헤어져요.”
아직까지 서로에게 나쁜 기억도, 감정도 없는 지금.
어쩌면 헤어지기 딱 좋은 시기일지도 몰랐다.
사랑을 말하지 못하는 남자와의 인연은 여기까지. 억지로 잡고 있기에는 지나는 지쳤다.
“그게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좋아요.”
아무리 비밀연애였지만 어쨌든 회사에서 계속 봐야 할 사람이었다. 웃으며 아름답게 이별한다면 그것대로 꽤 좋은 경험이었다고 치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기를 가르고 도진의 날 선 음성이 들렸다.
“결혼 때문에 그래?”
마치 결혼 적선이라도 해줄까?라는 말투였다. 그의 말이 도화선처럼 꾹 누르고 있던 지나의 감정에 불이 붙었다.
“네?”
설마 잘못 들은 거겠지. 지나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결혼 기다리고 있는 거 알고 있어. 그런데 내가 말했잖아. 내 상황이 지금 그렇다고. 네가 지금 맡고 있는 그 프로젝트 말이야.”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도진은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잘 끝내고 하자. 결혼.”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청혼이었다. 여태 이런 남자와 연애했다는 게 부끄러워졌다.
“일단, 그 프로젝트 제 거 아니고 김도진 과장님 거.”
지나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프로젝트와 상관없이 저는 결혼 안 합니다. 과장님과 더 이상 연인 사이를 유지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연인 사이라고 부를 만했나. 속으로 생각하는 지나의 입안이 썼다.
“더 이상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저는 이만 나가볼게요.”
지나의 달라진 반응에 도진은 조금 놀란 듯 보였다.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아, 서 인턴 때문인가.”
문고리를 잡던 지나의 행동이 멈췄다. 도진이 스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 인턴이랑 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