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이제부터 많이 웃어요.
(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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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제부터 많이 웃어요.
2022.09.06.
뒤로 휘청이는 윤주의 팔이 과장되게 움직였다.
“어머어머!”
마치 제 앞에 있는 진우에게 도와달라는 것처럼 은근한 눈빛으로 허우적거리는 꼴이 우습지도 않았다.
도진이 손을 뻗는 찰나, 윤주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연약하게 쓰러진 윤주를 보자니 지나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괜찮아?”
한발 늦은 도진이 윤주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우린 먼저 가볼게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남자친구였던 사람이었다.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람이 다른 여자와 다정한 모습으로 나타난 모습은 생각보다 기분이 더러웠다.
“아야…….”
윤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배를 매만졌다. 그녀의 손짓에 도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배 아파? 어디가 아픈 거야?”
어쩔 줄 모르고 걱정스레 묻는 도진의 모습은 팔불출 대회라도 있었으면 거저 일등을 먹었을 기세였다. 지나는 한시라도 저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이지나.”
도진의 날 서린 부름에 지나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을 다치게 했으면 사과를 해야지.”
도진이 눈을 번뜩이며 사납게 말했다. 윤주를 대신해서 발끈하는 모습에 지나는 무심한 눈으로 윤주를 흘낏 바라봤다.
“어디요?”
지나는 다친 사람을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냥 바닥에 주저앉은 것 같은데…….”
그것도 일부러. 앞에 있는 진우 손이라도 잡으려고 머리 쓰다가 스스로 넘어진 건데.
바닥에 주저앉은 윤주는 지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대충 보아하니 도진과 진우에게 지나의 이미지를 똥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넌 하나로는 부족하니……?
지나가 헛웃음을 치고는 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가 밀친 게 아니라서요. 엄한 사람한테 시비 걸지 마시고 여자친구 잘 보살펴주세요.”
예전처럼 고분고분하던 지나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당황한 도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거짓말까지 하는 거야? 질투가 난다고 사람을 다치게 하면 돼?”
아름다운 산 정상에서 전 남친과 치졸하게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도진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지나가 입술을 잘근 물었다.
“과장님이야말로 흑기사처럼 멋있어 보이려 노력하시는 거 같은데, 이렇게 하시면 더 지질해 보여요.”
“뭐?”
도진의 눈썹이 치솟았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뚝 튀어나온 걸 보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것 같았다.
“이지나…… 너…….”
지나를 노려보며 어금니를 꽉 문 도진의 모습이 통쾌했다.
“그럼, 즐거운 데이트 하세요.”
지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참다못한 도진이 걸음을 옮기려던 지나의 손목을 잡았다.
생각보다 억센 손길에 지나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때 지나를 붙잡는 단단한 손길이 느껴졌다. 진우였다.
“함부로 손대시면 곤란합니다.”
부드러운 얼굴은 그대로였으나 목소리는 위압감이 들 만큼 강경했다.
“서진우라고 했나?”
도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입매를 비틀었다.
“네.”
하늘 같은 과장의 으름장에도 진우는 그다지 두려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모습에서 여유가 흘렀다. 둘을 번갈아 보던 지나는 저로 인해 진우에게 불똥이 튈까 걱정이 되었다.
“아프니까 손 놓으시고 얘기하시죠.”
지나의 말에 도진은 험악한 시선으로 진우를 바라보며 손을 놓았다.
“잘 기억할게. 서진우 인턴.”
도진이 낮게 읊조리며 눈을 번뜩였다. 그의 협박 어린 말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진우가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이지나, 나 몰래 얘랑 만났어?”
저돌적인 도진의 질문에 지나가 코웃음을 쳤다.
“무슨 말씀인 줄 모르겠습니다.”
대답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도진이 그녀의 속내를 가늠하기라도 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랑 같이 오기로 한 등산 아닌가?”
“헤어지기 전에 한 약속이었죠.”
“헤어졌으니까 이제 상관없다, 이건가?”
“제가 누굴 만나든 상관없죠. 이제.”
“뭐?”
“과장님처럼요.”
심드렁한 지나가 아직도 일어나지 못한 윤주를 향해 턱짓하자, 도진이 잔뜩 굳은 얼굴로 윤주를 쳐다봤다.
바닥에 앉아 있는 윤주는 일어서길 포기한 건지, 아니면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에 빙의라도 한 건지 가녀린 팔뚝을 늘어뜨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도진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려 지나를 향했다.
“그래, 이제 끝난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냥 윤주한테 사과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밀지 않았습니다.”
“너 진짜…….”
도진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오빠, 아니, 과장님, 저 손 좀 잡아주세요.”
도진을 부르는 간드러진 윤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애간장을 녹이는 목소리가 이런 것일까. 지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 둘의 아니꼬운 작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지나는 이번 등산을 끝으로 이제 산은 절대 안 오르리라 다짐했다. 우연으로라도 이 두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몸 괜찮아?”
“네. 괜찮아요. 과장님, 이 대리님 잘못 아니에요.”
일으킨 윤주를 살뜰하게 살핀 도진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지나를 바라봤다.
“윤주가 너희 살린 줄 알아.”
“아이, 그런 말씀 마세요. 이 대리님 말씀이 맞아요. 제 실수로 넘어진 거예요.”
“너는 애가 왜 이렇게 착해. 이런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더니.
지나는 더 이상 그들과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도진에 대한 미련은 털끝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 있었다면 온몸의 털을 다 밀어버렸으리라. 지나는 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산에서 내려갔다. 그녀의 뒤를 진우가 묵묵히 따랐다.
“괜찮아요?”
몇 시간 뒤, 산 입구가 보이는 길에 다다르자 진우가 물었다. 땀으로 폭삭 젖은 지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주 상쾌해.”
마치 산행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진우는 그런 지나를 보며 씁쓸한 속을 애써 가라앉혔다.
“다행이에요.”
굳이 밝은 척하는 지나의 모습에 속이 상했다. 완만한 평지로 이어진 산길을 걸으며 진우는 지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내려가서 맛있는 파전 드실래요?”
그의 따뜻한 제안이 오히려 지나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니,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을 들킨 느낌이었다.
“서진우.”
지나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진우를 바라보는 지나의 눈빛이 어딘지 흔들렸다.
산행하는 사람들로 왁자지껄했던 소음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처럼 주변이 조용했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쏴- 파도처럼 들렸다.
진우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지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제 곁에 머물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려 했는데.
진우의 따뜻한 눈동자를 보자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오늘만큼은 네게 기대도 되지 않을까.
“파전만?”
지나의 말에 진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막걸리도 먹어야지.”
호기롭게 말한 지나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지나의 모습에 입꼬리를 휜 진우가 듣기 좋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 술은 좀…….”
당분간 자제해야 할 거 같은데. 오늘 저 바지 하나밖에 없어서 말이에요.
장난스레 말하는 진우를 향해 지나가 못 들은 척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바지? 까짓것 빨아줄게. 내가 요즘 세탁 기술이 늘었어.”
“허…….”
어이없다는 듯이 입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진우는 이마저도 즐거운 얼굴이었다. 그는 지나와 함께하는 순간, 순간이 너무 좋았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지나의 미소 위로 흩어졌다.
“웃으니까 좋네요. 훨씬 젊어지는 느낌이죠?”
“뭐어어?”
지나가 진우를 가볍게 흘겨봤다. 웃음 사이로 진우의 다정한 시선이 지나에게 향했다.
“많이 웃어요. 이제부터.”
내가 웃게 해 줄게요.
“너 그 말 뭐야?”
지나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진우의 속내를 살피려는 듯 수상하게 바라봤다.
‘지금 노안이라 놀리는 거지?’라고 말하는 듯. 진우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맞춰주려 다소 심각한 얼굴로 정색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나, 많이 웃어야겠어요.”
“너 가만 안 둬.”
장난스레 농담을 던진 진우가 도망가듯 빠르게 걸어가자 지나가 스틱을 고쳐 잡으며 그 뒤를 쫓아갔다. 둘의 웃음소리가 싱그러운 산 공기 속에 가득 울렸다.
***
주말이 지나고 단어조차 무겁게 느껴지는 월요일이 되었다. 지나는 어느 때보다 산뜻한 모습으로 회사에 출근했다.
이별한 전 남친을 같은 사무실에서 계속 봐야 한다는 걱정은, 산행으로 인해 깨끗이 사라졌다. 걱정조차 그에게는 사치였다는 걸 알았기에.
“자기, 오늘따라 기분이 더 좋아 보이네?”
다가온 지혜가 찡긋거리며 묻자, 지나가 싱긋 웃어 보였다.
“응, 기분 좋은 월요일이잖아.”
지나의 말에 지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미묘하게 구겨진 인상이 우스꽝스러웠다. 지혜가 주변을 살피더니 지나의 곁에 다가와 속삭였다.
“자기, 혹시 로또 뭐 이런 거 당첨된 거야?”
누가 봐도 직장인에게 기분 좋은 월요일이라는 단어는 이상하잖아.
지혜의 행동에 지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어쩌면 로또보다 더 좋은 행운일지도 모르지. 도진과의 이별이.
“그냥 활기차게 시작하면 좋잖아.”
“아…….”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마지못해 지혜가 입을 벌렸다.
“안녕하십니까.”
듣기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깔끔한 슈트를 입은 진우가 출근했다. 훤칠한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혜가 천천히 말했다.
“나도 기분 좋은 거로 할래.”
자리에 앉는 진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지나는 그런 지혜를 보며 못 말린다는 듯이 웃었다. 책상에 앉은 진우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나를 바라봤다. 미소를 머금은 듯, 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아니, 그냥 책상에 앉아 있는데 무슨 화보 같냐. 그냥 내가 사수할 걸 그랬나봐.”
지혜의 지조 없는 후회를 들으며 지나는 그와 눈을 마주하고 살짝 미소지었다. 오늘 그에게 전해줄 셔츠가 들어 있는 쇼핑백을 떠올리며.
아주 오래전부터 진우는 그랬다.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났다.
햇살처럼 빛나는 그의 모습이 좋았다. 동시에 두려웠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자신의 어두운 부분이 여과 없이 드러날까봐.
지금은…… 모르겠다.
지금은, 그의 따뜻함이 좋았다.
전 남친이 준 상처 따위 생각이 안 날 만큼.
그냥 사수와 인턴의 거리만큼 네 따뜻함을 쬐도 되지 않을까.
“잠시만요.”
그때, 사무실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