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너 정체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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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너 정체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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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너 정체가 뭐야
2022.09.13.
그의 매끈한 목에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그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쥔 서류가 구겨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뭐……?”
지나의 눈이 살며시 커졌다. 진우는 여전히 지나를 뚫어져라 보면서 서류를 내밀었다.
“제가 찾아본 결과, 대리님께서 조사하신 자료는 빠짐없이 완벽했습니다.”
물속에 푹 잠긴 것처럼, 진우의 말과 행동이 느리게 들렸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다시금 진우의 목소리에 지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으응.”
꼭 그의 말이 일에 관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지나는 눈을 끔벅거리며 잠시 서류를 내려다봤다. 깜빡 잊을 뻔한 셔츠를 떠올린 지나는 얼른 말을 꺼냈다.
“그, 셔츠 가져왔어. 이따 줄게.”
지나가 조금 민망한 얼굴로 말하자 진우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네.”
그가 탕비실을 나가고 나서야 지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단지 그의 존재만으로 탕비실의 공기가 달아오른 듯 느껴졌다. 그에게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아서 그런 것이리라. 지나는 손등을 뺨에 갖다 대며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후…….”
정신 차려. 이지나.
지금 진우를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오늘 야근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 분 일 초가 아까웠으니까. 지나는 다 마신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탕비실을 나섰다. 진우가 준 서류가 어쩐지 든든하게 느껴졌다.
***
어느덧 창 너머로 노을이 진하게 물들었다.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던 눈이 피곤해 지나는 기지개를 길게 켰다.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외근을 나간 도진과 윤주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과 상관없이 정리를 끝낸 자료를 도진의 책상 위에 뽑아서 두고 갈 생각이었다.
확실히 진우가 준 자료는 어딘가 달랐다. 빈틈없이 꼼꼼하게 채워진 자료들은 기획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지나가 준 자료 중에서 부족하다 싶은 부분들을 추가로 보탠 자료들은 전문적이었다.
“자기, 오늘 야근이야?”
퇴근 준비를 마친 지혜가 가방을 메고 다가왔다.
“아니, 이것만 하면 끝나.”
지나의 말에 지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는 사라졌다.
“칼퇴를 기원합니다.”
지혜를 비롯해 사무실 내 직원들의 퇴근 소리가 요란했다. 지나는 일부러 아직 자리에 있는 진우를 불렀다.
“이거.”
깨끗해진 진우의 셔츠가 담긴 종이백을 전해주자 진우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네.”
“이제 퇴근해. 나는 이것만 하면 거의 끝나.”
지나의 말에 잠시 지나를 바라보던 진우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도와줘서 고마워.”
지나가 가까스로 인사하자 진우는 눈을 휘었다.
“사수를 돕는 인턴의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명백한 사실에 지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 그렇지. 그럼 들어가.”
조금 뒤, 지나 혼자 남은 사무실은 정적에 쌓였다.
붉은 노을이 사라진 밤하늘 아래로 도시의 조명들이 빛났다.
“이 정도면 흠집 잡을 곳이 없겠어.”
회심의 미소를 흘린 지나가 인쇄 버튼을 눌렀다. 돋보기를 들고 꼼꼼히 살펴도 꼬투리 하나 잡을 곳은 못 찾을 터였다.
‘김도진…….’
다시금 이가 갈렸다.
마땅히 들려야 할 프린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나가 가까이 다가가자 콘센트가 빠져 있는 걸 발견했다.
아무 생각 없이 코드를 연결하자 전원이 들어간 프린터가 삐- 소리와 함께 덜그럭거렸다.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 뭐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사무실은 무서웠다. 지나는 당황 하며 휴대폰을 집었다.
“일단…… 휴대폰 조명, 조명을…….”
침착함을 가장하며 지나는 액정을 켰다. 충전을 안 해놓은 탓에 간당간당한 배터리를 발견하는 순간, 눈앞이 절로 아득해졌다.
‘어떡하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먹통이 되어버린 모니터를 보며 지금까지 정리한 자료가 날아갔다는 생각을 하자 지나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안절부절못하던 지나는 저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여, 여보세요.”
- 누나, 목소리가 왜 그래요?
진우는 지나의 말 한마디에 이상함을 눈치챘다.
“지금 정전이 돼서…….”
- 금방 갈게요.
진우의 목소리에 막막한 가운데 안정감이 들었다.
- 조금만 기다려요.
어째서 진우에게 전화를 한 걸까.
- 무서우면 전화 끊지 말아요.
그가 움직이는지 부산스러운 소음이 들렸다. 그가 온다는 생각에 쿵쾅거리며 뛰던 심장이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평소 달그락거리던 키보드 소리와 딸깍거리는 마우스 소리, 서류 넘기는 소리.
숨소리, 헛기침 소리, 컵을 내려놓는 소리, 물 마시는 소리
사무실을 채우던 소음들이 일제히 증발된 곳에 오로지 지나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그리고 또 하나, 서진우의 숨소리도.
그와 통화하고 있는 지금,
그의 숨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나, 이제 괜찮은 것 같아.”
- 그럼 잠시만요. 전화 잠깐만 끊을게요.
다소 거칠어진 그의 숨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지나는 끊겨진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두운 세상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의식이 아득해지는 것 같아 책상에 엎드린 채로 눈을 꼭 감았다.
의자에 앉아있는데 다리가 절로 후들거렸다.
지나는 숨을 들이마시며 두려움을 이기려 노력했다.
재밌고 좋은 것만 생각하는 거야. 이까짓 것 하나도 안 무서워.
그 사이, 휴대폰 배터리가 완전히 나갔다. 핸드폰 배터리와 같이 콩알만 한 용기도 방전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이대로 아침까지 버텨야 하나.’
복도를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사무실 문이 열렸다. 동시에 한 줄기 빛이 비쳤다. 휴대폰 플래시였다.
“누나.”
진우다. 서진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몸에 긴장이 탁 풀렸다. 눈물이 나올 것처럼 눈가가 화끈거려 일부러 손으로 꾹 눌렀다. 진우가 지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누나, 괜찮아요?”
상체를 일으킨 지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 왜 이렇게 금방 왔어?”
전화를 하고 몇 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무리 집에서 나온다 해도 이렇게 빨리 올 수 없었을 텐데.
“화내지 않을 거죠?”
“응?”
뜬금없는 소리에 지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회사 근처 카페에 있었어요.”
“왜?”
혹시 약속이라도 있었던 걸까.
“누나 걱정돼서요.”
예상과 다른 그의 답변에 지나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아, 그러니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을까봐.”
진우가 지나의 눈치를 보며 머쓱하게 말했다. 분명 지나가 화낼 거라 생각하는 듯싶었다.
“아…….”
긴장이 풀리면서 기어이 눈물이 쏟아졌다. 여태 강한 척, 씩씩한 척 한 노력이 무산됐다.
“누나, 울어요?”
지나가 흐느끼며 울자 당황한 진우가 어쩔 줄 모르며 지나를 바라봤다.
“안 울어. 엉엉.”
한 번 터진 눈물은 둑을 터뜨린 것처럼 콸콸 쏟아졌다. 왜 자신의 어설프고 실수하는 약한 모습을 진우에게 들키는 걸까. 조금 더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었는데,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았다.
진우의 큰 손이 지나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였다. 그의 손길에 진정된 지나는 갑자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울다가 웃으면 큰일 나는데.”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장난스레 말하는 진우의 목소리에 웃음이 커졌다.
“이미 큰일 났어.”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든 지나가 코맹맹이 소리로 중얼거렸다.
“망했다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지나의 맥빠진 목소리는 우울했다. 오늘 하루종일 수정하고 또 수정한 자료들이 싹 날아갔을 것이 뻔했다.
“그냥 죽을까.”
이럴 줄 알았다는 기고만장한 도진의 얼굴을 다시 보느니,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굴지 말아요.”
그런 지나를 핀잔하듯 진우가 말했다.
“아니, 그냥 퇴사할까.”
운명이 날 버렸다면 나도 그냥 인생 막살까보다.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지나가 말하자 진우가 피식 웃었다.
“아까 불 꺼지기 전에 뭐 건드렸어요?”
“복사기.”
“아.”
진우는 휴대폰을 들고 복사기 쪽으로 향했다. 코드를 뽑은 그가 사무실 구석에 있는 뭔가를 만지자 곧 사무실이 환해졌다.
“와, 불이다.”
불을 발견한 인류의 첫 느낌이 이런 걸까. 순식간에 밝아진 사무실이 반가웠다.
“컴퓨터 복구되겠지?”
지나의 긴장된 목소리에 진우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해볼게요.”
서진우가 지나의 자리에 앉았다.
“그게 가능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지나의 눈이 커졌다.
“최선을 다해볼게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팅된 컴퓨터 화면이 켜지자, 키보드 위의 서진우 손이 빨라졌다. 모니터를 직시하는 서진우의 얼굴은 방금 전과 달리 매우 진지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후, 됐어요.”
빠르게 움직이던 손이 멈추더니 엔터를 쳤다. 동시에 모니터는 꺼지기 전의 화면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지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와. 진짜, 진짜 된 거야?”
“이제 죽는다는 소리 하지 말아요.”
진우가 조금은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대답을 재촉하듯 그의 눈빛이 뚫어져라 지나를 바라봤다.
“응, 알았어.”
지나는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도 그가 발휘한 실력이 믿어지지 않았다.
완벽에 가까운 자료조사뿐 아니라 컴퓨터까지……. 지나는 잠시 그를 응시했다. 유학까지 다녀온 완벽한 인재가 고작 인턴으로 들어오다니.
혹시, 혹시. 수많은 가정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너…… 정체가 뭐야.”
서진우, 너 정체가 뭐냐고.
진우의 가라앉은 눈빛이 지나의 시선과 공중에서 얽혔다. 둘을 에워싼 공기에 묘한 긴장감이 서렸다. 지나는 수상한 눈빛으로 진우를 바라봤다.
“저는,”
이윽고, 진우의 입술이 떨어졌다.
“인턴입니다.”
김이 팍 식었다. 지나가 어이없다는 듯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당연히 아는 사실 말고.”
“그게 다예요.”
진우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지나는 어쩐지 입안이 마르는 것 같았다.
“이런 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왜 여기, 이 회사에 고작 인턴으로 들어온 거야?”
지나는 알고 싶었다. 그가 진짜 이곳에 온 사실을.
“말해도 돼요?”
다정한 그의 눈빛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담은 채, 지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그의 진심을 듣고 싶었다. 그의 정체도 더불어 궁금했다.
진우가 천천히 상체를 지나에게 숙였다.
“누나가 여기 있으니까.”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지나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게 제 진심이에요.”
방금까지의 장난스러운 표정은 사라진, 지독하게 낯선 서진우의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