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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누나 말 못 들어줘서 미안해요. (14/80)


14 누나 말 못 들어줘서 미안해요.
2022.09.16.



 
진우의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지나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궁금했던 그의 진실의 무게가 너무 커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고장 난 프린터 말고 다른 프린터와 연결했어요. 인쇄물 곧 나올 거예요.”

고장 난 프린터가 아니라 마치 자신이 고장 난 것처럼 들렸다. 지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게 몸을 일으켰다. 좀 더 먼 곳의 프린터기에서 인쇄되는 일정한 소리가 들렸다.


“고, 고마워.”

회로가 꼬인 로봇이 된 기분이었다. 지나는 어색한 자세로 프린터기로 향했다. 그런 지나를 바라보는 진우의 눈빛은 말할 수 없이 깊었다.

오로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녀를 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던 것이 우습게도 너무도 당연하게 밤마다 그녀가 떠올랐다. 다른 여자를 만나려도 해봤지만 제 마음속에 각인된 것처럼 심장이 뛰지 않았다.

그녀를 잊으려 했지만 사실은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그녀를 만날 생각으로 긴 시간을 버텼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미친놈처럼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봤다. 그녀의 친구들에게 묻고, 그녀의 소식을 건너 듣던 그는 지독한 우연에 조소했다.

진우와 그의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 아버지의 회사에 그녀가 입사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복수하려 했던 진우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지의 밑으로 들어왔다. 오직 그녀 하나 때문에.

진우는 지나의 자리에서 비켜났다. 지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조금 멍한 얼굴이었다. 인쇄가 끝나자 그녀는 인쇄물을 파일에 넣어 도진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 그 모습을 진우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시간은 저녁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너무 늦게 퇴근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에 진우는 팔짱을 낀 채, 흐뭇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모든 정리를 끝내고 드디어 가방을 든 지나가 비장한 얼굴로 진우를 바라봤다.


“서진우.”

지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날 좋아해?”

지나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진우가 살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진우가 답했다.


“네.”

당연한 말이었음에도 지나는 다시금 심장이 쿵 떨어졌다.


“나는.”

지나는 진우를 바라보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사내연애는 안 할 거야.”

도진과의 연애가 엉망으로 끝나버렸다. 또다시 그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게 비록 비밀이라고 할지라도, 난 안 할 거야.”

지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네 마음 못 받아줘서 미안해.”

두 번째 거절이었다. 물론 진우는 고백도 하기 전이었지만.


“널 부르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생각이 짧았어.”

어째서 가장 먼저 네가 생각난 것일까.

누구보다 서진우가 먼저 떠올랐다.

간신히 말을 마친 지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조차 진우에게는 애절하게 보였다.


“부담 주려 한 말 아니에요.”

진우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냥 누나 곁에 있고 싶어서 왔어요.”

그의 묵직한 진심에 가방을 쥔 지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실, 산에서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지나는 말을 잠시 멈췄다. 뜨거운 감정이 울컥 솟구쳤다 가라앉았다.


“내 곁에 있지 말아줘.”

진우는 아무 말 없이 지나를 내려다봤다.


“너랑 있으면 자꾸 내 어둡고 부족한 부분이 보여. 너에 비해 나는 한없이 모자란 것 같아. 그래서 자꾸 위축돼. 안 하던 실수도 하고.”

지나는 숨결을 토해내듯, 말을 뱉었다.


“그러니까, 인턴까지야. 인턴만 하고 떠나. 부탁할게.”

감정이 어그러졌다.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듯, 아팠다.

숨쉬기 어려울 만큼.

고작 몇 분이 지났을 뿐인데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지나의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잠시 지나를 조용히 바라보던 진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그녀의 부탁이었다. 저로 인해 힘들어한다면 당연히 떠나야 했다.

그것이 비록 제 영혼을 죽이는 일일지라도.

그녀를 위하는 일이라면 진우는 뭐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럴게요.”

그러니까, 아파하지 말아요.

자신의 존재만으로 그녀가 이렇게 힘들어한다면 진우는 그녀를 위해 어둠 속으로 사라질 수 있었다. 10년이 아니라 100년이 지나더라도 그녀를 그리워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나 먼저 퇴근할게.”

진우가 순순하게 대답하자 되레 지나의 가슴이 무너졌다.

떠나라고 말한 건 자신인데 어째서 왜 제 가슴이 아픈 건지.

하지만 사실이었다.

지나는 분수대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민혜의 말대로, 엄마의 말대로.

그리고 도진의 말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만큼만 욕심내지 않고 살아왔다.

욕심을 내면 매번 안 좋은 결과가 닥쳤다. 도진과의 결혼을 욕심냈더니 이별이 닥쳤고, 승진을 욕심냈더니 상사에게 혼나는 일이 많아졌다.

진우를 욕심내면 더 큰 재앙이 닥칠지도 몰랐다. 아니, 이미 한번 겪은 일이었다.

10년 전, 그가 고백하던 날. 지나는 행복해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의 고백에 심장이 둥둥 뛰었고 당장이라도 하늘을 날 것처럼 기분이 두둥실 떠올랐다.

하지만, 감히 욕심을 낸 탓일까. 어울리지도 않는 진우에게 고백을 받아서 마음이 설렜던 탓이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진우는 멀리 떠났다.

회사를 뛰쳐나온 지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든 손톱으로 인해 통증이 일었다.


“하아, 하아.”

숨이 가빠졌다. 지나는 버스 정류장에 간신히 서서 울음을 참았다.

더 이상 10년 전의 어리고 철없던 소녀가 아니었다. 이론적으로 당연히 맞는 말이었다.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해.’

그게 맞는 거야. 스스로를 다잡는 듯 지나는 눈물이 나올 것처럼 화끈거리는 눈가를 문질렀다.

지금은 당장 진우의 마음에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진우를 위한 일이었다. 휘청거리는 다리로 버스에 간신히 올라탄 지나는 흔들리는 버스의 움직임을 따라 힘없이 흔들렸다.


‘과연 욕심이었을까.’

케케묵은 과거에 꾸역꾸역 눌렀던 일들이 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어린 소녀가 당연히 꿀 수 있는 꿈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문득 되새겨지는 순간들이었다.

도진과의 연애조차 욕심을 부린 거여서, 그래서 이렇게 상처를 받은 걸까.


‘네 남친이 아깝네.’

도진과의 연애를 밝혔을 때, 민혜가 처음 한 말이었다. 지나는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도진처럼 좋은 남자가 왜 자신을 만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도진이 원하는 대로 다 해줬다. 그의 승진을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제 몫이 아닌 일까지도 전부.

그래서였을까.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던 지나는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 진동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어, 민혜야.”

- 지금 퇴근해?

카랑카랑한 민혜의 목소리는 생기가 넘쳤다.


“응.”

- 하여간 회사에서 제일 열심히 일한다니까.

“그건 아냐. 내가 실수를 한 게 있어서.”

- 우리 서진우랑 만날 건데 너도 나올래?

“응?”

다짜고짜 묻는 민혜의 목소리에 지나는 순간 말을 멈췄다.


- 서진우 몰라? 우리 고등학교 때 완전 킹카. 잘생긴 애. 이번에 한국 들어왔다길래 어떻게 연락이 됐거든? 그래서 다 같이 보려고.

모를 리가. 지금 같은 회사 인턴과 사수 관계라고 하면 민혜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나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거절하려 했다.


“아……. 나는 됐.”

- 무슨 소리야. 네가 나와야지. 그렇게 잘난 남자 볼 기회가 없잖아.

민혜는 어딘지 흥분한 목소리였다.


“난 괜찮아.”

- 너 나오는 거로 하고 인원수 포함해서 식당 예약할게.

“아, 아니. 민혜야. 나는,”

- 그럼, 그날 만나는 거다. 약속장소랑 시간 정해지면 톡할게.

뚝. 거침없는 민혜와의 통화가 끊겼다. 지나는 당황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학창 시절 활발하고 밝은 민혜와 달리 지나는 내성적인 편이었다. 그나마 성인이 되면서 조금 나아진 편이었다.

민혜의 주도적인 성격을 부러워했던 지나와 그런 지나에게 은혜를 내려주듯이 친구가 되어준 민혜. 둘이 친구 사이라는 걸 의아해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하……, 오늘 이래저래 지치네.”

버스에서 내려 어두운 길을 터덜터덜 걸으며 지나가 중얼거렸다.

입사하고 일이 바빠 민혜를 비롯한 친구들과 잘 보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만날 생각을 하니 부담이 되었다. 분명 도진과의 연애를 물어볼 텐데. 헤어졌다고 말하면 뭐라 할까. 역시 만나지 말아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 와중에 진우의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이 떠올랐다.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상처받은 눈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를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지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생각에 파묻힌 지나는 발 앞의 돌멩이를 보지 못했다. 발목이 꺾이면서 지나의 몸이 고꾸라졌다. 땅바닥에 처박혀야 할 몸이 공중부양이라도 한 듯이 기울어진 채로 멈춰 있었다.


“누나.”

환청일까. 너무나도 다정한 목소리에 지나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녀를 붙든 사람, 서진우였다.


 


“왜…….”

네가 여기 있어.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진우 생각을 하다 보니 헛것이 보이나 싶었다.


“아까 회사에서 놀랐을 것 같아서 누나를 따라왔어요.”

진우는 천천히 그녀를 세웠다. 그리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녀로부터 멀어졌다.


“그냥 멀리서 지켜보다 집에 잘 들어가는지 확인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싫어할 걸 알면서도 그녀가 쓰러지는 걸 보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언제나 그녀에게 한해서는 머리보다 몸이 더 빨리 반응했다.

진우가 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미안해요.”

다시 한번 진우의 진심이 흘러나왔다.


“누나 말 못 들어줘서 미안해요.”

세 걸음 뒤로 멀어진 진우가 이제야 멈췄다. 그럼에도 진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걱정스레 지나를 살피는, 한없이 따뜻한 시선이었다.


“누나 곁에서 떨어지도록 제가 더 조심할 테니까, 힘들어하지 말아요.”

아, 지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어째서 너는, 나에게 이다지도 따뜻할까.

나에게 넘치도록 과분한 너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눈물이 번져 반짝거렸다.

지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진우를 바라봤다.


“내가 못나서 그래. 그러니까 너에게 맞는 여자 만나.”

진심을 가까스로 드러낸 지나는 눈물을 쓱 닦으며 이내 몸을 돌렸다.


“누가.”

동시에 선득한 목소리가 어깨 너머에서 들렸다.


“못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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