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너무 예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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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너무 예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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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너무 예쁜 사람
2022.09.20.
돌아보니 성큼 다가온 진우가 잔뜩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어……?”
낯선 진우의 표정에 지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누가 못나요.”
처음 듣는 그의 낮은 목소리는 위압감이 들 정도로 사나웠다.
“나. 나는 너랑 어울리지 않아.”
지나는 할 수 없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사람이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했어. 그러니까 욕심을 부리면 안 돼.”
“하…….”
새까만 눈동자가 지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녀의 말에 진우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분수, 욕심.”
“응.”
지나가 말한 단어를 따라 하는 진우의 말투는 어절이 뚝뚝 끊었다.
“그것 때문이에요?”
진우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화가 난 것 같은데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지나는 그의 감정을 예측할 수 없었다.
“저야말로 분수에 맞지 않는 사람을 욕심내고 있는데.”
그의 눈빛이 뜨거웠다. 아직 한 걸음 정도의 거리가 있는데, 고스란히 그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누나는 나에게 비할 수 없는 과분한 사람이에요.”
그가 손을 천천히 뻗었다.
“함부로 만질 수도 없는 그런 소중한 사람, 이에요.”
차갑게 식은 눈물을 조심스레 닦는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가 내뿜는 열기만큼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 따뜻함이 좋아서 지나는 진우의 손을 뿌리치는 대신에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에 맺혀있던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오늘 왜 이렇게 많이 울어요. 속상하게.”
진우의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손바닥에 묘하게 안정감이 들었다.
“고작 그런 이유라면, 나 누나 곁에 있을 거예요.”
선전포고와도 같은 진우의 목소리에 지나의 눈이 다시 떠졌다.
“넌 나와 달라. 어릴 적에도 수많은 학생 속에서 빛났어.”
마치 태양처럼.
지금도 그랬다. 어두운 거리가 진우로 인해 환해졌다. 단지 그가 서 있는 것만으로.
“나도 그랬는데.”
진우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딜 가든 누나만 보였어요. 내 눈에는.”
“어……?”
지나가 살짝 놀란 듯 눈이 커졌다.
“누나를 처음 본 순간, 사람이 아닌 줄 알았어요. 너무 반짝거려서.”
진우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바람에 지나의 고개가 더 올라갔다.
“너무 예뻐서.”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처음 겪는 느낌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지나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그런 말 하지 마.”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비웃을 말이었다.
“난 날 잘 알아.”
“잘 안다면서 왜 못났다고 말해요.”
지나는 머쓱하게 시선을 내렸다. 결국 진우에게 휘말리고 말았다. 그에게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제가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기분이 좋았다.
“들어가서 쉬어요.”
진우의 목소리가 지나의 머리 위에 포근히 내려앉았다.
“너도.”
어색한 인사 끝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머뭇거리던 지나가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아까 회사에서 한 말은 흘려들어. 내 문제를 네 탓으로 돌렸어. 그럼, 잘 가.”
쏟아내듯 빠르게 말을 던진 지나는 민망한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바로 몸을 돌렸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진우가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지나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
“꺄! 박민혜!”
“오랜만이다, 이것들아!”
오랜만에 만난 민혜와 친구들의 방방 대는 목소리가 식당 입구에 서 있는 지나의 귓가까지 요란하게 들렸다.
‘휴…….’
과연 이게 잘한 선택일까. 지나는 결국 민혜와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 나왔다. 그다지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끝까지 거절하지 못했다.
‘뭐, 한 번쯤은 만났어야 하니까.’
민혜가 곧 결혼을 한다는 소리가 엄마를 통해 심심찮게 들렸다. 지나는 비장한 얼굴로 친구들을 향해 다가갔다.
“어머머! 이게 누구야. 이지나!”
친구들의 시선과 동시에 호들갑 소리가 쏟아졌다.
“세상에, 너 진짜 예뻐졌다.”
“살 빠진 것 봐.”
보라와 윤지의 칭찬에 옆에 선 민혜가 새초롬한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단기간에 살이 빠지면 갑상선에 문제 있는지 의심해보라던데.”
어쩐지 무슨 소리 안 하려나 싶었다. 제게 쏟아졌던 관심이 지나에게 향한 걸 견딜 수 없다는 듯한 민혜의 반응이었다.
지나는 그저 무시하려 했지만 민혜의 말에 걱정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들까지 무시할 수 없었다.
“얼마 전에 회사에서 정기검진했는데 이상 없대.”
지나의 말에 이제야 친구들은 안도한 얼굴이었다. 흥미를 잃은 민혜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입구 쪽을 향해 목을 길게 뺐다.
“어머, 서진우?”
민혜의 한 톤 높아진 목소리에 보라와 윤지의 표정이 변했다.
“그 서진우?”
“진짜 왔어?”
근사한 슈트를 입은 서진우가 우아하게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들.”
민혜가 눈을 빛내며 서진우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진우야, 오랜만이다. 이게 몇 년 만이야.”
고등학생 때와는 확연히 다른 서진우의 모습에 모두들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중에서도 민혜는 키가 훌쩍 커버린 서진우를 올려다보며 어쩐지 황홀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신스타그램에 약속장소랑 시간 올렸는데 그거 보고 왔구나?”
아까 내 갑상선을 운운하던 민혜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졌다.
“아, 그게.”
진우는 잠시 지나를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지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는 척하지 말라는 표시였다. 진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지나는 다급히 친구들을 불렀다.
“얘들아, 주문은 했니? 여기 뭐가 맛있는지 잘 모르겠네.”
“아, 내 정신 봐. 주문부터 하고 얘기하자.”
다행히 메뉴로 관심이 옮겨졌다.
“진우야, 너는 여기 앉아.”
민혜가 턱을 괴고 생긋 눈웃음을 지으며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테이블을 지그시 바라보던 진우는 희미하게 미소짓더니 지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진우야, 너 지나랑 되게 친한가보다.”
민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진우를 떠보듯 물었다.
“일단 주문부터 할게요. 여기요!”
당황한 지나가 손을 번쩍 들고 종업원을 불렀다. 진우가 무슨 얘기라도 할 까봐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지나야, 넌 뭐 하고 지내?”
윤지가 물컵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
“난 회사 다녀.”
물컵을 건네받는데 민혜가 밉살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사원 월급 갖고 살려면 고생이 많겠다.”
민혜의 말에 보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월급살이 회사원들이 그렇지 뭐. 넌 사업하니까 이해 못 해.”
아, 사업. 민혜가 무슨 사업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민혜가 안 그래도 높은 코를 번쩍 더 들어 보이며 우쭐거렸다.
“야, 사업은 뭐 쉬운 줄 아니?”
그녀는 연신 진우 쪽으로 시선을 뒀다. 민혜의 자랑이 시작되면 친구들의 화려한 반응과 추임새가 또 시작되겠지. 지나는 그저 물컵만 내려다보며 애꿎은 컵만 만지작거렸다.
“뭐, 사업이 너무 잘돼서 확장 좀 해보려는데……. 어우, 내가 이런 거 잘 몰라서 말이야. 진우야, 유학까지 갔다 온 고급인력인데 누나 회사에 스카우트할게 누나 좀 도와줄래?”
민혜의 말에 묵묵히 있던 진우가 피식 웃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릴게요.”
순간 지나의 눈이 번쩍 커졌다.
뭐야, 지금.
진우의 말에 민혜의 눈이 반짝거렸다.
“정말? 그럼 내일부터 당장.”
“어우, 얘 속옷 사업하는데.”
옆에 있던 보라가 큰 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우리 진우는 보니까 속옷 핏이 좋겠네.”
“야, 너 여성 속옷만 하잖아.”
윤지가 푸훕, 웃으며 말하자 민혜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번 기회에 확장할 거야. 남성 속옷도.”
“어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남친 얘기나 말해줘. 남친은 어떤 사람이야? 결혼 날짜는 잡힌 거야?”
윤지가 민혜를 향해 묻자, 민혜는 진우의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콧소리를 내며 샐쭉거렸다.
“뭐……, 난 좀 고민되는데…… 자꾸 결혼하자고 하니까.”
남친은 조르고 민혜는 튕기는 상황으로 보였다. 윤지와 보라가 어으, 소리를 내며 질투 어린 시선을 보냈다.
“진우야,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말끝마다 진우야, 진우야.
목이 타는 지나는 물만 들이켰다. 순식간에 물컵을 비웠음에도 여전히 갈증이 났다.
민혜의 질문에도 서진우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괜히 왔어.’
휴대폰을 슬쩍 꺼내 시간을 확인하는 지나에게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물.”
진우가 지나의 빈 컵에 물을 따랐다. 스테인리스로 만든 물통을 쥔 팔뚝에 힘줄이 돋았다. 유독 눈에 들어오는 그의 남성미가 돋보이는 팔뚝에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 고마워.”
“그런데…….”
민혜가 은근하게 물었다.
“진우는 여자친구 없어?”
다 따른 물통을 세운 진우가 민혜를 바라봤다.
“응?”
대답을 재촉하는 민혜의 입술이 유난히 붉게 보였다.
“없어요.”
없다는 말에 민혜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그럼, 나랑 연애할래?”
뭐……?
놀란 건 지나만이 아니었는지 옆에 앉은 보라와 윤지가 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나는 마시던 물을 뿜을 뻔한 걸 간신히 꿀꺽 넘겼다. 소란스러운 식당의 소음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처럼 테이블이 고요해졌다.
“너 결혼한다며, 뭐야.”
보라가 먼저 어색함을 깨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윤지가 고개를 잽싸게 끄덕이며 덧붙였다.
“남친이 알면 어쩌려고 그래.”
“어우, 이 촌스러운 것들. 뭐, 어때. 아직 식장 들어가기 전인데.”
민혜는 태연스레 어깨를 으쓱거리며 진우를 향해 은근한 미소를 보냈다. 고혹적인 미소가 식당의 은은한 조명에 비춰 매력적으로 빛났다.
“아, 저…….”
진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낮은 목소리가 지나의 귓가에 울렸다. 고백이라도 들은 것처럼 지나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어머나. 실망이네.”
민혜가 전혀 실망스럽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멀리 있구나?”
사귈 수 없는 이유가 뭔지 알 것 같다는 말투였다.
“바로 옆에 있어요.”
진우의 말에 친구들의 시선이 순간 지나에게 몰렸다. 지나의 얼굴에 화르륵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어……?”
이번엔 놀랐는지 민혜가 눈을 치뜨며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제가 기다리는 중입니다.”
애매모호한 진우의 말에 당황한 시선들이 지나와 진우를 번갈아 오갔다.
“서, 설마. 이지나 쟤는 남친 있잖아.”
민혜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님도 남자친구 있거든요?”
정신 차리라는 듯이, 보라가 민혜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지 말고 나랑 연애하자. 응?”
민혜가 예의 눈웃음을 찡긋 보이며 서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화려한 매니큐어가 조명에 반짝거렸다. 보석을 닮은 민혜처럼 예쁘게 보였다.
“나 이대로 결혼하면 우울해질 것 같아서 그래.”
민혜가 불쌍한 척 중얼거리는데, 보라가 냉큼 민혜의 손을 딱 잡았다.
“우리 민혜가 진짜 메리지 블루구나. 자자, 이 언니한테 기대.”
보라의 너스레에 민혜는 장난스레 울적한 표정으로 보라의 어깨에 기댔다.
“심란해요. 보라 언니.”
“맞다, 맞다. 프러포즈는 받은 거야?”
때를 기다렸던지 윤지가 눈을 반짝이며 민혜에게 대뜸 물었다. 민혜는 피곤한 얼굴로 손을 딱 펼쳤다.
“그러엄, 당연히 받았지. 이것 봐.”
민혜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번쩍거렸다.
“와, 진짜 예쁘다. 몇 캐럿이야?”
“무슨 다이아가 주먹만 하냐.”
“이 정도도 안 받으면 내가 결혼 안 하지.”
친구들의 칭찬에 민혜는 언제 우울했다는 듯 자랑스럽게 말했다. 지나는 부러운 마음에 입술만 잘근 깨물었다.
“지나 너도 남자친구 있잖아. 그것도 5년이나 사귄.”
민혜가 사냥감을 발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