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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제가 좋아하는 사람, 지나 누나예요. (16/80)


16 제가 좋아하는 사람, 지나 누나예요.
2022.09.23.


방금까지 조명에 비춰 반짝거리는 민혜의 얼굴이 이토록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남친 질문에 지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어……? 어, 남친…….”

회사 신입사원이랑 바람나서 헤어졌어, 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것보다 불쌍한 여자가 어디 있을까. 얼마나 매력이 없으면. 지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남친 뭐 잘 있지.”

순간 진우의 눈빛이 번뜩인 건 착각일까. 지나는 무엇보다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5년이나 사귀었으면 이제 결혼 얘기 슬슬 나오겠네. 그렇지?”

민혜는 끈질겼다.


“난 결혼……, 꼭 해야 하나 싶어. 여자만 손해잖아.”

지나의 말에 보라와 윤지가 눈을 깜빡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민혜도 큰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풋, 하며 소리 내 웃었다.


“어우, 야. 왜 여자가 손해야? 평생 왕비님처럼 받들어 모실 텐데?”

민혜의 도도한 콧날이 조명에 번들거렸다.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있다가 남친 다른 여자한테 뺏긴다. 너.”

지나는 순간, 유난히 신경 써서 잘 그린 민혜의 아치형 눈썹과 길게 뻗은 속눈썹 위로 물컵을 확 부어버릴 뻔했다.


“하하……. 그럼, 운명이 아닌 거겠지.”

비참했다. 운명 따위를 운운하고 앉아 있는 제 신세가.

지나는 말을 마치고 입술을 꾹 물었다.


“진짜 사랑하면 남자가 먼저 결혼하자고 조른다고 하더라고.”

“맞아. 그건 그래.”

“우리 나이가 벌써 내년이면 서른이잖아. 울 엄마도 서른은 넘지 말라고 했는데 엄마보다 남친이 더 난리라니까.”

꺄르르, 웃는 꼴이 밉상이었다.

아……. 내가 왜 쟤랑 친구가 된 걸까. 도대체 왜. 우린 언제부터 친구였던걸까.

지나는 이 망할 놈의 우정의 시발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나 싶었다.


“야, 그러니까 남자가 좋아해야 연애가 된다니까.”

민혜가 아는 척을 하여 으스댔다.


“내가 너 말린 거 고맙게 생각해. 이지나.”

“응? 뭘 말려?”

또다시 지나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흥미로운 시선과 달리 지나는 눈을 크게 뜨고 민혜를 바라봤다. 말하지 말라는 눈빛이 여실했지만 민혜는 그대로 입을 열었다.


“옛날 얘긴데, 지나가 진우 좋아했었거든.”

“어머, 대박!”

“진짜?”

호들갑스러운 친구들의 반응은 지나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옛날에 진우 안 좋아하던 애들이 어딨었어……. 인기 많았잖아.”

지나가 황급히 변명했다.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 십 대 소녀도 아니고.


“내가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랬지. 사람이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 안 그러면 탈 나. 그러니까 지금처럼 진우랑도 이렇게 같이 만날 수 있는 거지. 그때 어색해졌으면 진우랑도 어색해졌겠지. 그렇지, 진우야?”

민혜의 얄미운 목소리는 턱에 두 손을 받치고 진우를 바라보는 거로 끝이 났다.


“아……. 민혜 선배가 그런 말을 하셨군요.”

어딘지 바닥을 긁는 듯한 진우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이지나, 얘. 나 아니었으면 백날천날 모쏠이었을 거야. 친구 잘 둔 줄 알아야 하는데.”

민혜가 잔뜩 생색을 내며 지나를 힐끗 쳐다봤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었지만 바로 어제 일처럼 아직도 선명하게 지나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지나가 진우를 좋아하게 된 거도, 좋아하는 감정을 민혜에게 들킨 것도. 그리고 민혜가 지나에게 진우를 포기하라 말한 것도.
마지막으로 진우가 지나에게 고백한 것도.

모두 선명했다. 오래된 사진처럼 지나의 마음속에 박혀 있었다.

곧 식사가 나왔다. 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지만 지나는 혼자 외딴 섬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곪고 곪아버린 상처가 다시 터진 것처럼 가슴 한쪽이 아렸다. 콧등이 시큰거리고 눈가가 홧홧해져 포크질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얘들아, 나 화장실 좀.”

지나는 울음이 터지기 직전, 화장실로 달려갔다. 친구들 앞에서, 특히 박민혜 앞에서 절대 울기 싫었다.

차가운 물을 틀어 감정을 가라앉힌 지나는 이내 화장실을 나섰다. 바로 앞에 진우가 비스듬히 서 있었다.


“어? 너도 화장실 왔구나.”

남녀 화장실이 붙어 있어 지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진우를 비켜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진우의 볼일은 화장실이 아니라 지나였다. 진우는 지나의 손목을 잡고 화장실 옆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나 좋아했어요?”

진우의 검은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왜 말을 안 했냐는 듯, 책망하는 눈동자였다. 고스란히 진우와 시선을 마주한 지나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때, 내가 말을 했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민혜의 말대로 평생 모쏠로 지내지 않았을까?

어두운 비상계단에 가까이 마주 보자 유난히 큰 진우의 키와 체격이 지나의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서 정의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지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담담하게 말했다.


“옛날얘기야.”

그러자 진우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미소였다.


“난.”

진우가 입을 열 때마다 달콤한 체취가 훅 끼쳤다.


“아직도 현재예요.”

 

 
모르지 않았다.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나는 민혜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분수를 알아야지.’

당황한 지나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코가 맞닿을 만큼 진우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지금도 좋아해요. 누나.”

숨이 멎을 만큼 달콤한 진우의 고백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주체할 수 없이.

둘만 있는 비상계단의 고요함이 야속할 정도로 심장 소리가 컸다. 이 소리가 진우에게까지 들리면 어쩌지. 지나는 입속의 살만 짓씹으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기다릴게요. 지금까지처럼.”

진우는 진심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애절하게 빛났다.


“누나가 과거에 날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 아까 너무 기뻤어요.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요. 우리가 더 사랑할 수 있었던 시간들을 놓친 게 나는 너무 아쉬워요.”

“얘기했잖아. 과거일 뿐이라고.”

지나는 이제 뛰다 못해 조여드는 심장을 억누르며 진우를 바라봤다.

그를 다시 만나 기뻤다.

그리고 그가 아직도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도, 사실 기뻤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안 돼.”

“왜요……?”

그건. 지나가 잠시 숨을 골랐다.

오늘따라 유난히 달궈진 숨결이 뜨거웠다.


“나는 얼마 전까지 남친이 있었어.”

지나의 말에 도진의 눈빛이 낮아졌다.


“아직 잊지 못했다면…….”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이미 도진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도 없었다. 그와 5년이나 사귀었던 게 무색할 만큼.


“그냥 자신이 없어.”

5년이나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자신을 버렸다.

훨씬 예쁘고 젊은 여자를 택했다.

어느 남자라도 다 그럴 것이었다.

제 눈앞에 있는 진우도. 지금은 못 가진 것에 대해 미련이 남아서.

만약 갖게 된다면 도진처럼 미련 없이 버릴 수도.


“하…….”

진우의 거친 한숨에 꼬리를 잇던 지나의 생각이 끊겼다.

진우가 어딘지 화가 난 얼굴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전 달라요. 그 새끼랑.”

잇새로 내뱉는 진우는 간신히 화를 참는 것처럼 보였다. 제 생각을 들킨 지나는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나, 먼저 들어갈게.”

다급하게 비상계단을 열고 나가버리는 지나를 진우는 더 이상 잡을 수 없었다. 방금까지 느꼈던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허상처럼 느껴졌다.

예쁜 눈동자로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누나.

지나의 예쁘고 생기 넘쳤던 눈동자는 겁먹고 움츠러든 채였다.

어릴 때 당당하고 밝았던 지나의 모습은 확실히 지금과 달랐다.

좀 더 여성스럽고 성숙해진 지금의 지나도 좋았지만,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자신감을 잃은 지나의 모습은 싫었다.

진우는 빈 주먹을 꾹 쥐고 이내 비상계단을 나갔다.

타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불거진 그의 목울대가 너울처럼 움직였다.


“왜 이제 와.”

민혜는 한참을 기다렸다는 듯이 진우를 반겼다. 미리 자리로 돌아온 지나는 제 몫의 고기를 나이프로 자르고 있었다.


“전화 좀 받느라, 죄송해요.”

진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제 자리에 앉았다.


“진우야, 너 소개팅 할래?”

여태 왜 찾나 했더니. 지나가 피가 배어 나오는 스테이크 조각을 포크로 쿡 찔렀다.


“소개팅이요?”

진우가 되묻자 민혜가 눈을 반짝거리며 상체를 기울였다.


“응응. 내 친구 중에 진짜 예쁜 애 있거든.”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뜻밖의 말에 민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 진짜?”

좋다 말았다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에이, 뭐야. 그럼, 여자친구 없는 것도 아니네.”

“그래, 진우가 좋다고 말하기만 하면 바로 사귀는 거 아냐?”

“그게…… 어렵네요.”

진우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지나는 입에 넣은 고기 조각을 우물거리며 씹었다. 난데없는 진우의 커밍아웃에 괜히 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최대한 신경을 다른 곳으로 분산해야 했다.


“왜 어려워? 그 여자 진짜 눈 높은가 봐. 대박이다.”

“설마 유부녀……는 아니겠지?”

“어우, 야.”

민혜와 친구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조잘거렸다.


“어떤 사람인데? 예뻐?”

민혜가 끈덕지게 물어오자 진우가 피식 웃었다.


“네. 예뻐요.”

꺄아아, 친구들이 소리를 질렀다. 반대로 지나는 이제 고기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진우가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뻔히 알고 있기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대박.”

“뭐 하는 사람이야?”

“음……, 나중에 잘되면 소개시켜드릴게요.”

더 이상 말하지 않는 진우의 태도에 민혜는 다소 실망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누군지 좋겠다.”

고기를 씹는 건지, 고무줄을 씹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미식을 경험하던 지나는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스테이크만 썰고 있었다.


“이지나, 너 혼자 와인 다 마셨어?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눈치 빠르기가 국가대표급인 민혜가 톡 쏘듯 말했다. 와인에 손도 안 댄 걸 알았기에 묻는 속셈이 뻔했다. 지나가 고개를 들자 그야말로 와인을 부은 것처럼 얼굴이 붉었다.


“아니, 진우가 고백하기라도 했어? 진우가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데 왜 네 얼굴이 빨개. 오버하지 마.”

지나를 향해 민혜가 비아냥거렸다. 지나는 뭐라 말해야 하나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여러 생각이 한데로 뭉쳐져 목구멍을 턱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망할 고기도. 아무리 씹어도 갈리지가 않았다.


“어우, 하여간 이지나 너도 못 말린다니까.”

민혜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장난이라며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어버리는 민혜의 실력은 죽질 않았다. 학창 시절부터 주특기였으니까.


“고기가…… 너무 질기다.”

지나는 가까스로 고기를 삼키고는 말했다. 역시 민혜를 만나는 게 아니었다.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해줘야 속이 풀리려나. 지나가 물잔을 들어 올리는데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맞아요.”

순간 지나의 손이, 민혜의 비웃던 눈이 멈췄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 지나 누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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