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누나만 있으면 돼요.
(17/80)
17 누나만 있으면 돼요.
(17/80)
17 누나만 있으면 돼요.
2022.09.27.
alt="">
테이블을 둘러싼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처음에 잘못 들었으리라 생각했던 민혜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alt="">
“어……?”
보라와 윤지도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지나는 당황한 얼굴로 진우를 휙 쳐다봤다. 테이블에 핵폭탄을 던진 진우는 정작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alt="">
“제가 계속 좋아하고 있었어요.”
alt="">
“진, 진짜야?”
답지 않게 민혜의 입술이 벙긋거렸다.
alt="">
“네. 오늘도 사실 지나 누나 보러 나왔어요.”
지나의 얼굴색을 놀렸던 민혜의 얼굴이 붉어졌다. 빠른 시선으로 진우와 지나를 번갈아 보던 민혜는 벌려진 입술을 벙긋거릴 뿐 말하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민혜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듯 날카롭게 말했다.
alt="">
“지나 남자친구 있는 거 알지?”
아. 이제 와서 남친이 사실은 없었다, 라는 말을 할 수도 없고.
남친 있는 여자를 좋아하게 된 진우가 비정상적으로 보일 것이 뻔했다.
난감해진 지나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alt="">
“그럼, 남자친구도 진우 알아.”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친구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늘어났다.
지나가 식은땀을 닦으며 수습하려 했지만 망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alt="">
“셋이 만난 적 있다고?”
alt="">
“아, 그게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아니고, 어쩌다가 나랑 진우랑 있는데 남자친구를 만났어.”
alt="">
“뭐어어어? 그럼 둘이 바,”
바람을 말하려던 보라가 입을 탁 다물었다.
난감한 지나가 입술을 물었다. 아, 진짜 큰일이네.
alt="">
“바람은 쌍방이 좋아해야 하는데 아쉽게도 저 혼자 좋아하고 있어서요.”
진우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alt="">
“제가 누나를 뺏고 싶거든요.”
잘생긴 연하남에게 저 소리를 들어본 누나가 과연 몇이나 될까.
화려한 연애편력을 자랑하는 민혜조차 들어보지 못한 말일 테다.
이제 민혜와 친구들의 얼굴은 부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민혜는 잔뜩 분한 얼굴로 지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눈빛으로 욕하는 건 기분 탓일까.
지나는 민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alt="">
“하하……. 오랜만에 봤는데 먼저 일어날게. 다음에 민혜 결혼식 때나 만나겠네.”
지나를 따라 진우도 일어났다.
alt="">
“저도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음식값은 제가 내죠.”
마지막까지 멋진 진우의 모습에 보라와 윤지는 멍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민혜만 팔짱을 끼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꽉 물었다. 식당 문까지 매너 있게 열고 잡아주는 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친구들이 아쉬운 소리를 냈다.
alt="">
“지나 저 계집애가 수 쓴 거 아니야?”
민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alt="">
“일일 짝사랑 대행알바 이런 거라도 시킨 거 아니냐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민혜의 말에 보라와 윤지가 쯧쯧, 혀를 찼다.
alt="">
“아이고, 퍽이나. 진우 부내 나는 거 못 봤냐. 남은 음식이나 빨리 먹자.”
alt="">
“아이씨.”
여전히 속이 상한 민혜는 씨근덕거리며 애꿎은 음식들을 향해 사나운 눈을 부라렸다.
alt="">
“안 먹어. 맛없어.”
alt="">
“얼씨구? 네가 여기 예약했거든요. 맛집이라고.”
alt="">
“방금 전까지도 맛있다고 먹어놓고서는.”
보라와 윤지 말에 민혜는 할 말 없이 숨만 거칠게 몰아쉴 뿐이었다.
***
식당을 나온 두 사람은 한적한 저녁의 거리를 걸었다.
지나의 얼굴을 스치는 여름 밤바람이 부드러웠다.
alt="">
“난 원래 여름을 좋아했어. 밤이 되어도 춥지 않고 포근하거든. 마음이 한없이 풀어지는 계절이라서.”
몸을 웅크리게 하는 겨울바람과는 다르게.
느닷없는 여름 이야기에 진우는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또각또각 걷는 지나의 발걸음과 둘을 감싼 청명한 여름 공기, 어딘지 예전의 순간이 떠올랐다.
alt="">
“고등학교 2학년 그날부터 여름이 싫었어. 그 뒤로부터 매년 여름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거든.”
그날……. 아마도 진우가 지나에게 고백한 날. 나긋하게 이어지는 지나의 목소리에 진우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앞서 걷던 지나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alt="">
“네 마음을 놓쳤던 걸, 여름마다 후회하고 또 후회했어.”
그녀의 입가에 맺힌 옅은 미소 위로 노란색 가로등 불빛에 내려앉았다. 마치 별무리처럼 반짝거려 진우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alt="">
“다시는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전 남자친구가 고백했을 때, 받아들였어.”
사랑인지도 모르고.
내 마음을 헤아리지 않은 채, 그저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한 선택이었어.
지나는 억울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alt="">
“그것 또한 내 선택이니 다 내 책임이지.”
지나는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alt="">
“오늘 나 때문에 와줘서 고마워. 친구들 앞에서 내 자존심 세워준 것도 너무 고맙고.”
사실 그대로 도망갈 뻔했는데 진우 덕분에 당당하게 나올 수 있었다.
민혜의 똥 씹은 얼굴을 보니 그야말로 몇 년 만에 묵은 감정을 긁어낸 것처럼 속이 다 시원했다.
alt="">
“여러모로 고마워.”
네가 던진 폭탄에 내 더러운 기분이 다 날아갔어.
alt="">
“지금도 여름이 싫어요?”
알 수 없는 눈으로 지나를 바라보던 진우가 천천히 다가왔다.
훤칠한 그가 가까이 닿자 다시금 비상계단이 떠올랐다.
alt="">
“지금은…….”
지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새까만 어둠을 옮겨 담은 듯 진우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alt="">
“아니, 미안해요.”
사이를 못 참은 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alt="">
“아직도 후회해요? 10년 전 여름.”
아까 진우에게 말했다시피 진우는 지나에게 있어 과거였다. 아니, 과거여야만 했다.
쓰레기 같은 연애를 이제 막 끝냈고 아직도 벌겋게 그어진 상처는 제대로 아물지도 못했다. 그것이 사랑이었든, 아니었든 사람에게 받은 상처라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자꾸만 다가와서 흔들려는 진우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게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려는 지나의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alt="">
“응, 후회해.”
그때 네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싶었어.
민혜의 말을 듣지 않고 네 말을 받아들였다면.
지금 우린 달라졌을까.
alt="">
“이제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진우가 지나의 손을 잡았다. 단지 그 행동만으로 지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alt="">
“다시 여름을 좋아하게 해줄게요.”
믿고 싶은 애절한 눈빛, 따뜻한 눈빛으로 진우가 말했다.
마치 밤하늘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광활한 우주 안에 오로지 너와 나, 둘만 있는 것 같았다. 주변의 소음이 어느 순간 들리지 않았다.
진우의 뜨거운 진심이 흘러들어왔다. 지나는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아니, 그의 눈빛이 제 몸과 마음을 옭아맨 듯 느껴졌다.
alt="">
“알잖아. 나 자신 없다고.”
간신히 입술을 달싹이자 진우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alt="">
“내가 옆에 있을게요.”
마음에 굳게 쳐 둔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alt="">
“누나가 다시 웃을 수 있게, 내가 도울게요.”
지나의 손을 잡은 진우의 손이 뜨거웠다.
alt="">
“그러니까 곁에 있게 해줘요.”
애절한 그의 목소리에 지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alt="">
“이런 나라도 괜찮아……?”
진우라는 거대한 파도에 흔들리는 조각배가 바로 자신이었다. 지나는 속수무책으로 진우에게 흔들렸다. 그리고 끝내 파도에 잡아먹혔다.
진우가 손을 들어 지나의 눈물을 닦았다. 그 역시 긴장한 듯, 그의 매끈한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alt="">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누나만 있으면 돼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
지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위로 진우가 입술을 내렸다.
잔잔한 별무리가 닿는 것 같았다. 포근하고 따뜻한 여름 바람이 이는 것도 같았다. 여름 태양보다 뜨거운 입술 감촉은 영혼을 위로하는 듯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지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alt="">
입술을 뗀 진우가 지나의 젖은 볼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alt="">
“왜 자꾸 울어요. 나 슬프게.”
나도 모르겠어. 서진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그냥 내가 너무 보잘것없이 느껴져서.
alt="">
“서진우.”
살짝 잠긴 목소리로 지나가 작게 말했다.
그의 이름이 입에서 둥글게 굴려졌다.
진우의 눈빛이 그윽하게 지나를 향했다.
잠시 망설이던 지나가 이내 입을 열었다.
alt="">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아직 사내에서 비밀연애할 생각 없어.”
진우는 가만히 지나를 바라볼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alt="">
“그러니까 당장은, 당장은 못 해.”
말하고도 민망한 듯 지나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입술에 아직도 진우의 체온이 남아있는 듯 열감이 느껴졌다.
alt="">
“괜찮아요. 누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지나의 뺨을 감싼 진우가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alt="">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하늘에 총총 박혀 있는 별들이 몽땅 진우의 눈으로 떨어진 것처럼, 진우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 지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열기가 고여 있었다. 두 뺨 그리고 입술에.
지나는 천천히 그의 손에서 한발 물러났다. 따뜻한 진우의 체온에 더 닿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자신의 감정을 회복하는 데에 진우를 이용할지 몰랐다.
alt="">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가까스로 입술을 열어 뱉은 말에 진우는 지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alt="">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다만, 저 밀어내지만 말아요.”
또 같은 말. 저렇게 사람 홀리는 말을 서슴없이 하다니…….
지나는 멍하니 진우를 바라보다 이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alt="">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오늘 고마웠어. 여러모로.”
이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alt="">
“밀어내지 않기로 약속해줘요.”
어쩐지 강렬하게 느껴지는 진우의 시선에 지나는 시선을 살짝 내렸다.
alt="">
“응.”
지나의 말에 비로소 진우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alt="">
“고마워요. 누나.”
고마운 건 난데, 서진우. 왜 네가 고맙다고 해.
그 말을 끝으로 진우는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눈에 봐도 큰 키에 완벽한 비율, 언젠가 들었던 지혜의 감탄사가 귓가에 맴돌았다.
alt="">
‘신이 빚은 조형물.’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외모를 가진 진우가 우두커니 선 채로 지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그의 눈빛만으로도 심장이 찌르르 떨렸다.
alt="">
‘달라지는 건 없어. 괜히 기대하지 마. 설레지도 마.’
지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눌렀다.
아직도 진우의 체향이 제 주변에 감도는 것 같았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그의 향기 때문인지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