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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내 인턴은 사수가 사수한다. (18/80)


18 내 인턴은 사수가 사수한다.
2022.09.30.



 


“어우, 뭐야.”

지나가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지혜가 눈을 흘기며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당황한 지나가 얼굴을 매만지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솔직히 말해. 나 몰래 연애하지?”

지혜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소리에 지나는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아, 아냐.”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에 완전 꽃이 폈는데? 솔직히 불어.”

취조하는 지혜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간지럼이라도 태울 듯 열 손가락을 허공에 대고 구부리는 포즈를 취하는 지혜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아우, 아니야.”

옆구리를 옆으로 살짝 뺀 지나가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던 도진은 마뜩잖은 얼굴로 혀를 찼다.

나랑 헤어지자마자 연애라니……? 저 고지식 답답이 이지나가?

진짜 서진우 인턴이랑 뭔가 있는 건가.

뭐지……?

도진은 주말에 어머니께 윤주와 인사를 드리러 갔다.

지나를 유난히 예뻐하던 어머니였지만 이미 헤어졌으니 어쩔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생각보다 과했다. 아니, 예측을 넘었다.

냉랭한 어머니는 결국 도진과 윤주를 쫓아내다시피 집에서 내보냈다.

자라면서 홀어머니의 마음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던 도진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실망하는 모습은 도진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생각보다 더.

꺄르르, 웃는 지나와 지혜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인지 입안이 썼다.

도진은 저조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하죠.”

그의 말에 사무실의 소음이 멈췄다. 이어 의자를 미는 소리들이 연달아 들렸다.

도진은 비릿한 미소를 애써 숨기며 회의실로 먼저 들어갔다.

그를 따라 사원들이 회의실에 앉았다. 여유 있게 둘러보던 도진의 눈빛이 번득였다.


“서진우 인턴은 아직인가.”

난데없이 튀어나온 그의 이름에 지나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하……. 인턴 주제에 빠져서.”

진우는 무감한 눈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역시 외모만 번지르르한 놈들은 다 이런 식이지.

제 반반한 낯짝만 믿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꼬락서니 하고는. 혹시나 해서 그의 학력을 봤지만 해외 명문대를 나온 것 치고 행동은 별 볼 일 없었다.

이지나, 저런 놈을 선택한 걸 후회하게 해주지.

유치한 마음의 소리가 어딘지 열을 올리게 했다. 뭔가 심상찮은 둘의 기류는 아까 연애 어쩌고 대화를 통해 대충 눈치챘다.

진우가 아직 출근 전이라는 걸 알게 된 지나는 걱정스레 창 너머 사무실을 힐끔거렸다.


‘평소에는 누구보다 일찍 나오는 진우였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지.’

당장 연락하고 싶었지만 휴대폰은 사무실 책상 위에 있었다. 걱정하는 지나의 모습을 포착한 도진이 사납게 일갈했다.


“회사에 수다 떨러 오는 것도 아니고. 쯧.”

도진의 질책은 방금까지 짧게 대화를 나눈 지나와 지혜를 꼬집어 말하는 것 같았다.


“사무실 분위기가 이러니 인턴도 풀어져서 지각하는 거 아니야.”

입술을 꾹 말아 물던 지나가 뭐라 대변하려 고개를 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도진의 눈이 번득였다.


“서진우 인턴 사수가 이지나 대리였나? 이따 따로 봐요.”

하……. 지나는 속으로 한숨을 깊이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일단 MZ세대 마케팅 기획안.”

지나가 맡은 기획안이었다.


“이 대리가 올린 거는 뭔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아서…….”

무슨 꼬투리라도 잡으려는지 가느다랗게 길어진 도진의 눈이 즐거워 보였다.


“허 사원이 한번 올려보는 거 어때?”

책상에 앉은 사람들을 빙 둘러보던 도진이 윤주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어머, 제가요?”

기다렸다는 듯이 반기는 윤주의 태도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 허 사원이 아무래도 이 대리보다 젊고 패션 센스가 또 남다르니까 MZ세대 공략하는 방법을 더 잘 알 듯싶어서.”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무슨 콩트라도 보듯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에 지나는 하마터면 비웃을 뻔했다.


‘그래, 나보다 젊고 예쁜 허 사원 팍팍 일 시켜.’

얼마나 더 잘할지 기대가 되네. 딱히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지나의 머릿속으로는 오로지 진우 걱정뿐이었으니까.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이 대리는 잠깐 남고.”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 소리와 함께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잠시 뒤, 회의실에 지나와 도진만 남았다.


“서진우 인턴은 제가 연락하고 주의를 주겠습니다.”

먼저 지나가 깍듯하게 말했다.


“지나야.”

사적인 느낌으로 나직하게 부르는 도진의 목소리에 지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도진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느긋한 표정으로 지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되려 그 모습이 기분 나빠 지나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도진을 바라봤다.


“서진우랑 사귀니?”

김도진은 자꾸 이런 식이었다. 분명 헤어졌는데도 공과 사를 함부로 넘나들었다.

피어오르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은 채, 지나가 대꾸했다.


“제 사생활입니다.”

불퉁한 지나의 목소리에 도진이 피식 웃었다. 팔짱을 낀 채, 등받이에 기댄 도진이 심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말하기 싫으면 할 수 없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서진우 잘리는 꼴 봐야 하겠네.”

형편없는 권력자의 모습이었다.


“서진우 인턴이 잘리는 것과 방금 전 질문과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데요.”

“글쎄.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도진은 아예 작정한 듯, 비릿하게 미소를 흘렸다.


“서 인턴이 오늘 늦은 것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왜?”

“당연히,”

말을 이으려던 지나가 잠시 말을 멈췄다.

지나는 어젯밤 별무리가 환하게 쏟아지는 서진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민혜로부터 받았던 수치감과 모욕감을 단번에 사라지게 한 서진우의 모습도 덩달아.

그를 지키고 싶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비록 회사에서 자신의 힘이 미미한 것을 알지만. 적어도 그의 사수로써 그를 지키고 싶었다.


“제가 사수니까요.”

어딘지 결연해 보이기까지 한 지나의 말투에 도진은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대-단-한 사수 나셨네.”

“하실 말씀 있으시면 비꼬지 마시고 바로 하시죠.”

지나의 대꾸에 도진이 지나를 바로 쳐다봤다.


“서진우 일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계약 전에 내보내려 하는데. 일 안 하고 회삿돈 받는 건, 양심불량 아닌가. 이 대리가 사수니까 잘 알 거 아니야.”

지나는 도진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지나와 꽤 가까운 사이라는 걸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빨리 내보낼 생각을 하다니.

허 사원과 붙어있는 본인 모습은 생각도 못 하는지.


“서 인턴, 일 잘합니다.”

지나가 딱 부러지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요하시다면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보고서로 작성해서 올리겠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야. 도진은 지나의 모습에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었다.


“그래. 해봐.”

그러면서도 도진은 기분이 묘하게 더러웠다. 서진우가 뭐라고 지나가 저렇게 지켜주려는 건지.


“고작 인턴이야. 결혼이라도 하면 육아휴직은 걔가 내야겠네.”

비아냥거리는 도진을 노려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지나가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능력 있는 사람이 일하는 게 맞죠.”

최대한 담담함을 유지하며 애쓴 지나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서진우였다. 놀란 지나가 뒤돌아보자 깔끔한 슈트를 입은 진우가 문을 열고 서 있었다.


 


“인턴이 제일 늦게 출근하네……?”

기다렸다는 듯, 도진은 살벌한 눈초리로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 내가 서진우 인턴 좀 불렀어.”

진우의 뒤를 따라 들어온 정 부장의 목소리에 여유로웠던 도진의 표정이 싹 굳었다.


“부장님.”

“급한 일이라서 미리 말도 못 했을 거야. 서 인턴 수고했어.”

부장이 진우를 향해 웃으며 말하자 진우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지나에게 가볍게 미소지었다.


“이 대리님, 나가실까요.”

문을 잡은 채, 우아하게 밖을 향해 눈짓하는 진우는 어젯밤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그린 지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갔다.

나란히 걸으며 지나가 진우를 향해 소곤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걱정스러운 말투가 그대로 나왔다.


“부장님께서 아침에 호출하셔서요.”

“갑자기? 무슨 일로?”

“어……. 그게.”

어딘지 곤란한 듯 말을 흐리는 진우는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지나에게 얼른 속삭였다.


“나중에 말해줄게요.”

회사라는 걸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지나 역시 뒤늦게 깨닫고 진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쁜 일만 아니면 됐어.”

진우와 한 사무실에서 함께 일해야 한다는 걸 처음에 알았을 때는 두려움이 더 컸다. 그때는 막연하게 진우를 냉대하고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도진이 진우를 내보낸다고 한다면 자신이 그걸 어떻게든 막을 생각이었다. 물론 그럴 만한 권한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해 그를 지킬 생각이었다. 도진으로부터.

가볍게 눈인사를 한 지나는 책상에 앉았다. 아침 회의에서부터 도진과의 기싸움에 머리가 아팠다.

이래서 사내연애가 헤어지면 골치 아프다고 하는구나.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물은 쏟아진 후였다.

그게 뭐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애꿎은 모니터를 노려봤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커피라도 한 잔 먹고 싶은 생각에 아주 잠시 고민하는데 바로 옆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커피 드실래요?”

제 자리로 간 줄 알았던 진우가 어느새 종이컵을 든 채 서 있었다.


“어……?”

진한 커피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고마워.”

지나의 입술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지나를 웃게 해주는 사람, 곁에서 자신을 살뜰히 지켜봐주는 사람. 새삼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 신경 쓰지 말고 일 봐.”

지나의 걱정 어린 말에 진우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네. 이 대리님도요.”

인턴 서진우가 청량한 미소를 지었다. 지나를 위한 세상에 하나뿐인 미소였다.

이제 일할 시간이었다. 진우가 갖다 준 커피 때문에 기분이 한결 좋아진 지나는 점심시간 전까지 해야 할 일들을 빠르게 처리했다.


“대박. 대애애바악.”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지나에게 달려온 지혜의 얼굴이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야?”

새로운 소문을 듣고 온 모양이었다. 지나는 작성한 서류를 저장하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김도진 과장 결혼한대.”

후. 성격도 급하셔라.

헤어진 지 일주일도 안 된 거 같은데.

지나는 알 만 하다는 듯이 마우스 휠을 드르륵 내렸다.


“누구랑 하는 줄 알아?”

잔뜩 상기된 얼굴로 서프라이즈 소식을 가져온 지혜의 질문에 지나가 모니터를 응시한 채 말했다.


“허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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