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둘의 첫 외근
(19/80)
19 둘의 첫 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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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둘의 첫 외근
2022.10.04.
“어?”
김이 팍 새는 모습이 지나의 눈에도 보이는 것 같았다. 눈을 깜빡거리는 지혜가 실망스러운 얼굴로 입을 삐죽거렸다.
“아, 뭐야. 자기 알고 있었어?”
음, 더 충격적인 것도 알고 있는데.
지나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서류 작업하던 창을 닫았다.
“그러엄, 저렇게 티 내는데 어떻게 몰라.”
흘낏 사무실 저편을 보니 도진과 윤주가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게. 어쩐지 심상치 않다고 했어.”
지혜가 목소리를 은근히 낮추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어떻게 안 거야?”
지나의 질문에 지혜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돌렸다.
“인사과에 내 친구 있잖아. 결혼하고 신혼여행 때문에 휴가 문의했대. 허윤주랑 같이 맞춘다고 둘이 같이 갔었나봐.”
이제 아예 대놓고 하는구나.
자신이랑은 그렇게 쉬쉬하며 국가 기밀처럼 숨기느라 갖은 애를 다 썼는데.
아무리 잊었다고 하지만 씁쓸함이 올라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은 비밀이었던 게 다행이었지만.
“아무튼 조만간 발표하겠지?”
지혜의 눈이 다시 반짝거렸다. 아주 오랜만의 사내연애라는 뉴스에 흥분한 모습이었다.
“사내연애라니 너무 로맨틱하다.”
그거 다 판타지야.
지나는 지혜의 꿈꾸는 듯한 얼굴에 차마 찬물을 부을 순 없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오늘은 뭐 먹으러 가지?”
몽롱한 얼굴의 지혜를 잡아끄는 지나의 물음에 지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더우니까 냉면 먹을까?”
사무실을 나서려는 지나는 진우 생각에 진우의 자리를 돌아봤다. 하지만 진우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누구 찾아?”
지나의 시선을 따라 지혜가 물었다.
“아, 아니야.”
지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비밀을 들킨 것처럼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
점심시간에 어딘가로 사라졌던 진우는 오후 근무 시간에 제 자리에 있었다. 지나는 저도 모르게 진우를 신경 쓰고 있었다.
“이 대리님.”
방금까지 분명 자리에 있었는데 제 곁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나는 퍼뜩 놀라며 진우를 바라봤다.
“시키실 일이라도.”
잘생긴 그의 눈동자에 지나가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아, 아니. 그게.”
지나는 허둥거리며 재빨리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서진우가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민망함이 몰려와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이지나 대리.”
공교롭게도 지나를 위기에서 구해준 건 김도진이었다.
“이거 자료 맞는지 매장 나가서 확인해봐요.”
오랜만의 외근이었다.
“인턴 데리고 가서 교육 좀 잘 시키고.”
어딘지 즐거워 보이는 도진의 눈빛에 지나는 의아했지만 도진과 길게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서둘러 그의 앞에서 벗어났다.
“서진우 씨, 외근입니다.”
지나와 진우의 첫 외근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지나는 서류를 펼쳐 보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상반기 마케팅과 매출 상관관계를 분석해야 하는데…….
차분하게 설명하는 지나를 보며 진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집중한 지나의 모습이 예뻤다. 단아하게 한데 묶은 머리가 어깨를 타고 앞쪽으로 흘러내렸다.
“……해서 이렇게 가면 될 것 같아.”
진우는 얼른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외근 나가나?”
정 부장이 다가왔다. 지나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네. 부장님.”
얼마 전에 술을 흘린 뒤로 지나를 바라보는 부장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나는 부장 앞에서는 더 조심스러웠다.
부장이 지나를 흘낏 훑어보고 옆의 진우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디까지 나가지?”
“명동입니다.”
“차 가져가.”
“네?”
예상치 못한 부장의 말에 지나의 되묻는 목소리가 커졌다. 회사 차는 함부로 빌려서 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예전에 도진과 외근을 나갈 때도 늘 도보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움직였다.
“키 받아.”
언제 갖고 나왔는지 부장이 키를 내밀었다. 놀란 지나는 일단 키를 받았다.
“그리고 말야.”
오늘따라 부장이 이상하다. 뭘 잘못 먹은 걸까. 차를 타고 가도 되는 걸까.
“이건 법인카드야. 중간에 힘들 테니 커피라도 사 먹어. 일 끝나면 회사 오지 말고 바로 퇴근하고. 알았지?”
지나는 이제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외근 나가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부장조차 어색한지 아직 도착하지 않는 엘리베이터로 시선을 돌리며 투덜거렸다.
“너무 느리네. 급한데. 그냥 계단으로 가야겠다. 그럼, 수고.”
꾸벅 인사하는 지나를 향해 손을 한번 흔들어 보이고는 부장은 비상계단으로 사라졌다.
“뭐, 뭐지……. 진짜 이상한데.”
지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장이 어디 아픈 건지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잘됐어요. 운전은 제가 할게요.”
진우가 해맑게 미소지으며 지나에게서 키를 받았다.
“이상하네. 부장님이 나한테 이렇게 해줄 리가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사이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두 사람은 곧 주차장에 내렸다.
삐빅, 소리와 함께 회사 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였다.
“저기 있네요.”
진우가 먼저 차를 향해 걸어갔다. 지나는 어딘지 불안한 얼굴로 진우의 팔을 덥석 잡았다.
“이거 혹시 함정 아닐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는 내내 머리를 굴린 결론인 듯했다.
“함정이요?”
“아무래도 부장님이 수상해서. 나한테 이렇게 잘 해주실 이유가 없거든.”
“그럼, 저 때문인가 봐요.”
태연하게 대답하며 진우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지나의 눈이 커졌다.
“왜……?”
인턴을 위해 회사 차를 내어주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우가 조수석 문을 열며 지나에게 말했다.
“제가 아침에 부장님을 도와드려서요. 아마 그것 때문인 것 같아요.”
아……. 뒤늦게 지나가 작게 소리를 냈다.
“일단 출발하죠.”
진우의 말에 지나는 종종걸음으로 조수석에 올라탔다. 곧 진우도 운전석에 탄 뒤, 자연스럽게 시동을 걸었다.
“너…… 운전해?”
놀랍다는 듯이 지나가 눈을 크게 뜨자 진우가 피식 웃었다.
“그럼요. 이래 봬도 29살 건장한 성인 남자입니다.”
생각해보니 진우와 같은 차에 탄 건 처음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긴장감에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운전 잘하지? 사고는 안 났지?”
“9년 무사고입니다.”
“9년?”
“미국 가자마자 바로 땄어요.”
아. 그랬지.
고등학교 2학년 때 유학 간 진우를 떠올리고는 지나가 낮게 소리를 냈다.
“미국은 차 없으면 일상생활이 어렵거든요. 그래서 가자마자 땄죠.”
좌우를 살피며 익숙하게 핸들을 돌리는 진우는 여유로워 보였다. 어쩐지 더욱 어른스럽게 느껴져 지나는 시선을 얼른 창밖으로 돌렸다.
“오늘 날씨 좋다.”
딱히 할 말이 없어진 지나는 어색함을 감추려 햇빛이 쨍한 여름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게요. 진짜 좋네요.”
지나의 말을 따라 말하던 진우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누나랑 함께 있어서, 좋네요.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만 생각하며 진우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부장님이 아까 시키신 일이 뭔지 물어봐도 돼?”
“아, 컴퓨터 프로그램에 문제가 생겨서 제가 해결해드렸거든요.”
“네가?”
그러고 보니 지나의 날아간 자료도 감쪽같이 복구해놓은 게 곧바로 기억났다.
“아……, 컴퓨터 잘 다루더라. 그런데 부장님은 어떻게 아시고?”
“입사서류에 나온 전공 보고 아침 일찍 전화하셨어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진우의 입가는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혹시 개인적으로…… 그런 거야?”
지나는 평소 정 부장의 행실에 대해 알고 있었다.
“뭐…….”
딱히 부정하지 않는 진우의 말에 지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장님……. 그렇게 개인적으로 직원들 부리면 안 되는데, 그거 나중에 한번 사내고발이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
“이제 안 그러실 거예요.”
진우가 알듯 말듯 묘한 말을 던졌다.
한가한 낮 시간이라 매장에 금방 도착했다. 차를 주차한 진우와 지나는 명동에 있는 매장들을 방문했다.
“안녕하세요. 본사에서 나온 기획마케팅 이지나 대리입니다.”
“인턴 서진우입니다.”
지나는 점장들에게 미리 연락해서 준비해놓은 자료와 실제 고객들의 반응 등을 물어봤다. 그 옆에서 지나를 돕는 진우는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커피 마시고 해요.”
네 군데를 쉬지 않고 돌아다닌 지나에게 진우가 먼저 권했다.
“이제 두 군데 남았어.”
“조금만 쉬었다 해요.”
꼼꼼하게 자료를 확인하느라 시간이 꽤 지났다. 오랜만의 외근이라 그런지 금방 지쳤다. 지나는 저린 다리를 콩콩 주먹으로 가볍게 두들겼다.
“그럼, 법카로 커피 마실까?”
근처 카페를 들어간 지나가 비장하게 법카를 계산대에 들이밀었다. 그 순간 정 부장의 솟구친 눈썹이 스쳐 지나갔지만…….
커피 마시라고 줬으니까. 정 부장의 법카라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법카라도 부하직원들한테 뭘 사주는 법이 없는데.”
자리에 앉으며 지나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진우가 피식 웃었다.
“완전 좀생이야.”
“그렇군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진우는 지나의 앞에 앉았다. 먼저 자리에 앉은 지나는 구두를 벗고 상체를 내려 다리를 주물렀다.
“아이고…….”
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예전에는 다섯 군데를 뛰어도 거뜬했는데.”
“사무실에 있는 것보다 외근이 더 좋은 줄 알았는데…….”
진우도 실제로 해보니 힘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직접 경험해봐야 알 수 있었다.
“오늘은 날씨라도 좋지. 뭐 덥긴 하지만. 비 오거나 눈 오거나 추운 날이면 더 힘들어.”
지나는 저도 모르게 진우에게 일의 고충을 토로했다. 지나가 무슨 말을 하든 진우는 따뜻한 눈빛으로 지나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잘생긴 얼굴에 부드럽게 머금은 미소도 잊지 않은 채. 그래서인지 진우에게는 자꾸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게 되었다.
“잠깐만요.”
갑자기 벌떡 일어난 진우는 말릴 새도 없이 카페 밖으로 뛰어나갔다. 5분도 채 안 돼서 허겁지겁 돌아온 진우의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있었다.
“이게 뭐야?”
“근육에 좋대요.”
얼마나 뛰었으면 그의 이마에 땀이 가득했다. 깔끔한 흰 셔츠 옷깃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에도 땀이 흠뻑 흐르고 있었다.
“아……. 고마워.”
사 온 사람의 성의가 있으니까. 지나는 민망한 얼굴로 약봉지를 건네받았다. 봉지 안에 들어있는 약들은 종류별로 여러 가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법카로 살 걸 그랬다. 그렇지?”
매운 향이 나는 약을 다리에 바르며 지나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그에 반해 진우는 어딘지 진지해진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그러게요. 늘 이런 식이었으면 엄청 불편했겠어요.”
그의 반응에 되레 머쓱해진 지나는 애꿎은 약만 열심히 펴 발랐다.
“뭐, 그렇게 회장님처럼 말하니. 그냥 농담한 거야. 아야.”
다시 신발에 발을 넣던 지나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