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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점점 수상해진다 (23/80)


23 점점 수상해진다
2022.10.18.



 


“자기.”

인쇄한 종이가 프린터 앞에 팔랑 떨어졌다. 멍하니 서 있는 지나를 부른 건 지혜였다.


“어, 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멍해. 무슨 일 있어?”

지혜가 떨어진 종이를 주우며 말하자 지나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종이를 얼른 받았다.


“아냐. 무슨 일은…….”

있지. 있었지. 오늘 아침에 너무나 맑은 정신으로 진우가 한 말은 지나의 정신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진우의 침대에 있던 지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진우와 함께 출근하면 오해받는다며 그녀는 허둥지둥 회사로 출근했다.


“아니기는. 어제랑 옷도 똑같은데……. 설마 외박한 거야?”

“어?”

지혜의 날카로운 추궁에 저도 모르게 지나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냐 아냐.”

고개를 흔들며 부정하는 지나를 보며 지혜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이럴수록 더 수상한데…….”

“아냐, 술 먹고 늦게 들어가서 그냥 똑같은 옷 입고 나왔어.”

대충 둘러대는 말에 지혜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은 믿어주지.”

지나는 흐트러지지도 않는 옷매무새를 다시금 정돈하며 인쇄를 끝낸 서류들을 챙겼다.


“이지나 대리.”

서류철을 든 도진이 지나를 보고 서 있었다. 그는 평소보다 어딘가 신경질적인 얼굴이었다.


“잠깐 볼까요.”

또 무슨 실수를 한 걸까. 아니 무슨 트집을 잡아 잔소리를 할까.

지나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시고는 도진을 따라 회의실로 향했다.

탁, 문이 닫히고 회의실 테이블에 살짝 기댄 도진은 가까이 보니 늘 말끔하게 정리하던 턱 주변이 거뭇했다. 깔끔의 대명사였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언제나 외모에 가장 신경을 쓰던 그 아니었던가.


“지나야.”

사무적인 호칭이 아닌 친근한 이름이 불리자 지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경 너머의 예리한 눈으로 지나를 훑어본 도진이 피식 하고 비웃었다.


“어제랑 옷이 똑같네.”

지혜도 알아본 걸, 도진이 못 알아볼 리 없지. 하지만 제가 옷을 일주일 내내 똑같은 옷을 입든 말든, 이제 도진은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무시할까 잠시 고민하는 지나에게 도진이 물었다.


“어젯밤, 집에 안 들어갔나 봐……?”

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지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절 부르신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까.”

최대한 건조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지나가 묻자 도진이 목덜미를 매만지며 또다시 가볍게 웃었다.


“왜 이렇게 예민하지. 이지나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저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지나가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서진우 인턴……. 어제 잘했어?”

도진의 입에서 진우의 이름이 나오자 지나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순간 제 마음을 조금이라도 들킨 것 같아 지나는 얼른 헛기침을 하며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네. 잘 하더라고요.”

인턴답지 않게. 억지로 다문 입가에 미소가 고였다. 지나는 얼른 입꼬리에 힘을 줬다.

지나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바라본 도진은 배알이 꼬였다.

이제 그의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도진이 마뜩잖은 눈으로 혀를 쯧, 차며 들고 있던 서류를 보였다.


“내가 전에 부탁했던 기획서 말이야.”

흘낏 살핀 서류는 도진이 밀고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만 잘 끝내면 결혼하자고 했었지. 의미 없는 데에 목매던 옛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몇 년이 지난 것처럼 색 바랜 채였다.


“이거 한 번만 마지막에 피피티 할 때, 마지막 부분 근거자료가 조금 취약한 거 같아서.”

도진의 손에서 흔들리는 서류는 거의 대부분을 지나가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떡하니 프로젝트 기획자의 이름에는 김도진 이름이 쓰여 있었다.

지나가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맡은 일이 많아 그 기획서까지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단호한 지나의 거절에 도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나야. 너 남자 볼 줄 모르잖아. 내가 볼 때 서진우 쟤는 아니야.”

난데없이 남자 얘기를 꺼내며 도진이 비스듬히 책상에 기댔다.


“남자 볼 줄 모른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마치 도진을 말하는 것 같아 그는 되려 기분이 나빠졌다.


“야, 이지나.”

홧김에 지나의 이름을 부른 도진을 지나는 감정 없는 눈으로 말똥말똥 바라봤다.


“하……. 내가 너랑 무슨 얘기를 하겠냐.”

그녀의 시선에 할 말을 잃은 듯, 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서진우 조심해라. 남자는 남자가 잘 알아. 걘 너 이용해먹으려고 하는 거야. 네가 걔 사수잖아.”

“…….”

“반반한 얼굴 믿고 여자 사수한테 잘 보이는 거, 그거 진짜 속아 넘어가면 큰일 나. 너 나중에 마음 아플까봐 내가 미리 말해주는 거야.”

도진이 침까지 튀어가며 핏대를 올렸다. 그런 도진과 달리 지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 그래. 됐다. 이걸 말하면 뭔 소용이냐. 직접 겪어봐야 알지. 아무튼 일이 많아도 상관이 하라면 해야 하는 게 회사 일인 거 모를 리는 없고.”

“…….”

자신에게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맡기는 도진의 모습에 지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내가 부탁하는 이 기획서는 손이 많이 안 가. 네가 해봐서 알잖아.”

제가 해봐서 손이 많이 간다는 걸 너무 잘 알죠. 기획서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작성한 기획서라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것도 헤어지기 전날까지.


“제가 다 해드려도 되는 겁니까.”

“그렇다니까.”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 도진이 큰 목소리로 대꾸했다.


“여태 해오던 거잖아. 네가.”

“그렇죠.”

“이것만 마무리 잘 해줘. 그러면 결…….”

도진은 말을 멈추고는 지나를 힐끗 바라봤다. 머뭇거리는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층 줄어들었다.


“습관적으로 실수할 뻔했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니까. 그럼 부탁할게.”

지나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도진은 서둘러 회의실을 나갔다.

방금 결혼, 이라고 말하려던 걸 지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늘 도진이 자신에게 부탁할 때 하던 말이었으니까. 여전히 개 버릇 남 못 준 모양이었다. 지나는 심드렁하게 도진이 두고 간 서류를 집어 들었다.


‘마무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

무심하게 바라보던 지나가 묘한 표정으로 서류를 챙겨 회의실을 나섰다.

***

윤주는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았다. 아니, 정확히는 어제 퇴근 때부터였다.

도진의 쌀쌀한 표정은 지나에게만 보여주던 얼굴이었다. 윤주에게는 늘 매력적인 미소를 보여준 그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사람이 바뀐 건지, 불안함이 몰려왔다.

갓 입사한 윤주에게는 사무실 내에서 가장 근사한 남자가 도진이었다. 적당한 키와 몸매, 인정받은 능력, 그리고 옷도 굉장히 잘 입었다.

그녀의 눈에는 도진이 잡지사의 전반적인 콘텐츠를 기획하고 진두지휘하는 팀장님처럼 보였다.

월급도 높고 거기에 집안도 좋다는 소문이 들렸다. 점점 구미가 당겼다. 허윤주 인생에서 제가 찍어 안 넘어온 남자는 없었으니까.

여자친구? 있으면 어때. 빼앗으면 그만이지. 윤주가 입꼬리를 매력적으로 말아 올렸다. 윤주는 자신이 예뻐 보이는 표정이나 각도를 너무나 잘 알았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빼앗은 남자였다. 그런데 서진우 인턴이 나타나서부터는 뭔가 그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늘 자신만만하고 당당하던 그는 어느 순간 서진우를 의식했다. 고작 인턴인데.

물론, 서진우는 일반인들과는 사뭇 다른 비주얼이긴 했다.

그러나 비단 외모만으로 평가하는 윤주가 아니었다. 천상계 외모는 인정할만하나 나중에 2세를 생각해서 똑똑한 두뇌와 튼튼한 직업, 빵빵한 통장이 있어야 했다.

서진우의 외모는 매우 훌륭할 줄 모르나 나머지 배경을 알지 못하는 윤주는 인턴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도진이 훨씬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

지나와 진우의 외근에서 꼬투리 잡을 것이 없나 찾던 도진의 눈이 번쩍였다.


‘결제 내역!’

바깥에서 뭘 썼는지 혹시라도 법인카드로 개인적인 물건을 샀다면 제대로 걸고넘어질 수 있었다.

회사 시스템상 직속상사로서 아래 사람들이 사용하는 법인카드 내역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진우 인턴의 약점을 드디어 잡은 느낌이었다.


‘그게 뭐든 걸리기만 해라.’

도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같은 사무실 내에 있어서 지나와 진우의 분위기를 쉬지 않고 확인할 수 있었다. 딱히 둘 사이의 분위기는 핑크빛 기류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도진은 기분이 나빴다.

어쩌다 눈을 마주친 둘의 시선을 볼 때면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더러운 기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자신이 지나에게 미련이 남을 리 없을 텐데.

저렇게 고루하고 답답한 일밖에 모르는 여자한테 무슨 미련인가. 상큼하고 어리고 톡톡 튀는 매력을 가진 윤주가 있는데.

아마 윤주가 임신했다고 하는 바람에 부담감을 가져서일지도 몰랐다.


‘그래, 생각보다 이르긴 했지만, 빨리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윤주처럼 예쁘고 어린 여자라면 집에서도 후줄근한 차림으로 있진 않을 터였다.


‘자기관리 철저히 하는 여자가 좋지.’

다만 도진이 생각하는 자기관리란 외모였다. 윤주는 외모 이외의 업무적인 능력은 뛰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부족한 편이라 프로젝트를 할 때 주변 선후배, 동기 직장인들이 그녀를 돕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거야 늘겠지…….’

잠시 윤주를 떠올리던 도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일을 완벽하게 너무도 잘하던 지나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제 일을 맡기기는커녕 자신이 많이 봐줘야 했지만…….


‘여자가 너무 일을 잘해도 문제야. 꽉 막혀 보여.’

도진은 자신의 편견을 합리화하며 마우스를 클릭했다. 쌓인 업무들을 보는 도진의 표정은 한껏 지겨운 얼굴이었다.


‘언제 일해서 돈 모아. 이것저것 투자해야지.’

최근 코인 투자가 인기였다. 도진은 업무창을 내리고 코인거래소에 들어가 신명 나게 코인들을 클릭했다.

현재 투자한 코인들은 처음보다 많이 올랐다. 빨간색으로 솟구친 그래프는 바라만 봐도 지갑이 두둑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그래, 내 새끼들아. 열심히 일해라.’

어느 정도 벌면 뽑아서 신혼집을 장만할 예정이었다. 윤주와의 행복한 신혼생활은 상상만으로도 좋았다.


‘신혼여행은 윤주가 여기 가고 싶어했지……?’

도진은 다시금 코인거래소 창을 내리고 여행지 창을 띄웠다. 푸른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 그림 같은 리조트의 사진이 모니터에 가득 찼다.

작열하는 태양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한 때, 지나가 꿈꾸던 곳이었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도진이 뿌듯한 미소를 그리며 입가를 매만졌다.


 
모니터 안에 야자수와 하얗게 늘어진 백사장, 푸른 바다, 그 옆으로 리조트가 보인다. 분할 화면으로 모니터 속 풍경과 도진의 기대감 어린 표정을 그려주세요.


‘가만, 임신 중인데 장거리 여행은 할 수 있나.’

윤주한테 물어볼 생각으로 도진은 슬그머니 윤주 쪽을 쳐다봤다. 윤주는 모니터를 보며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일 좀 못하면 어때. 저렇게 예쁜데.’

역시 여자는 어리고 예쁘고 봐야 해. 도진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벌써 신혼여행지에 간 것처럼 온몸이 나른했다.

딩동- 잠시 후, 새 메일이 도착한 알림이 울렸다. 어제 지나와 진우가 쓴 법인카드 영수증 내역이었다.

마우스 휠을 내리며 영수증을 살피는 도진의 눈이 빛났다. 마치 진흙 속에서 진주라도 캐낸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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