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치사한 협박
(24/80)
24 치사한 협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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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치사한 협박
2022.10.21.
“이지나 대리.”
짐짓 근엄한 도진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깔렸다. 일하던 지나가 표정 없는 얼굴로 다가왔다.
“네.”
조신하게 눈을 내리깐 지나를 바라보는 도진의 얼굴은 여유로웠다.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기대감도 보였다.
“어제 외근 나가서 무슨 짓을 한 거야?”
“네?”
예상치도 못한 말에 지나가 시선을 올려 도진을 바라봤다.
“무슨 짓이라뇨?”
억울함이 담긴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하……. 내가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봐주려고 했는데…….”
도진은 특별히 봐준다는 점을 강조하며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카드 내역을 보니까 약국?”
차분했던 지나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동시에 지나의 발이 다쳐 진우가 서둘러 약국을 간 것이 떠올랐다. 아차, 진우가 법인카드를 쓴 모양이었다.
“그, 그건 제가 미처 알려주지 못해서…….”
낭패 어린 지나의 얼굴을 보자 도진은 게임에서 이긴 것처럼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렸다. 제 앞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지나의 모습을 보자 가슴에 빠듯하게 충만감이 차올랐다.
“인턴 잘못은 사수의 잘못이다…….?”
평소 지나가 진우를 커버하기 위해 앵무새처럼 말하던 말이었다. 지나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꽉 잡으며 대답했다.
“아뇨, 이번에는 진짜 제 잘못입니다.”
신발을 잘못 신고 왔다. 외근인 줄 몰랐지만. 어쨌든. 평소답지 않게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왔고 그래서 외근에서 발이 아팠다.
지금도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았다. 진우가 잘못이 있다면 자신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것뿐.
법인카드를 쓰지 말라고 해야 했는데……. 온전히 제 잘못이었다.
“허허……. 이 대리가 사수 놀이에 심취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잘못이 없어지진 않지.”
마치 즐거운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도진이 미소지었다. 지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부장님께서 회사 차도 빌려주시고 호의를 베풀어주셨는데 말이야…….”
도진의 목소리는 지나의 목을 옥죄어왔다.
“죄송합니다.”
먹이를 잡아먹기 전에 구석으로 몰아 갖고 노는 고양이처럼 도진은 싱글거렸다. 반면 지나는 운명을 기다리는 쥐처럼 처분을 기다릴 따름이었다.
“이런 식이면 서진우 인턴이 정직원으로 채용되기 어려울 텐데 말이야.”
“네?”
순간 지나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져다.
“이것만으로 평가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불합리? 사적으로 법인카드를 쓰는 건 합리적이고?”
반박하려던 지나는 그저 입술만 벙긋거렸다. 둘의 모습을 사무실에서 보는 게 탐탁지 않았던 도진은 이제야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서진우를 치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장님이 아셔봐. 더 난리 치실 거야.”
그건 지나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부장님이 어제 보여준 호의는 회사 차와 커피까지였다. 법인카드를 개인적으로 쓴 걸 어떤 말로도 무마할 수 없었다.
“서진우 인턴은…….”
진우의 자리를 살펴보던 도진이 인상을 팍 구겼다.
“또 자리에 없어. 어떻게 된 게. 하……. 근무 태도 빵점, 성실성 빵점, 신뢰성도 빵점.”
도진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진우가 통째로 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가 다시 교육시키겠습니다.”
지나는 오로지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것마저도 도진에게 아량을 베풀어달라 빌어야 하는 위치였다.
“그거 아나?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거. 교육도 기본이 되는 사람한테나 통하는 거야.”
모욕적이었다. 지나는 도진이 이 상황을 매우 즐기는 걸 알았지만 무기력하게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대리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졸아 있어. 평소처럼 해. 평소처럼.”
그래서인지 은근하게 비꼬는 도진의 말에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과장님. 서진우 인턴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자신을 위해 법인카드를 쓴 진우가 야속함과 동시에 그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감이 들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자신이 아닌 진우를 위해 지나는 절박했다. 그를 이대로 회사에서 잘리게 둘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을 위해 한 행동이었다.
“음……. 우리 엄마 만나주면 생각해볼게.”
헤어진 이후, 도진의 말은 늘 한 박자씩 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워낙 충격적인 소리를 했기에. 하지만 이번에는 두 번, 세 번 다시금 그의 말을 되풀이해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지나는 어째서 도진이 제 엄마를 만나달라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가 내 말은 도통 안 들어서…….”
개인 가족 일을 왜 저한테 부탁하는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 엄마는 내가 너랑 결혼하는 줄 알고 계셨거든. 사실 저번 주에 윤주와 엄마한테 인사하러 갔는데 엄마가 노발대발 난리도 아니셔서. 네가 가서 엄마 설득 좀 해줘.”
당황스러움의 한계를 넘으면 이런 느낌일까. 눈앞이 캄캄한 게 아니라 머리가 캄캄해졌다.
5년간 도진과의 연애에서 지나는 도진의 어머니에게도 잘했다. 홀로 도진을 키운 어머니의 노력과 힘듦을 알기에 지나는 마치 딸처럼 도진의 어머니를 챙겼다.
물론, 이렇게 헤어져버리는 바람에 모든 것이 끝났지만. 더 이상 도진의 어머니를 챙겨드릴 이유도, 필요도 없었으니까. 지나를 예뻐하던 도진의 어머니가 생각났지만 그것은 도진과의 관계가 좋을 때의 일이었다.
이제는 자신과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다.
“설득이요?”
진우가 걸린 문제였기에, 지나는 개똥 같은 도진의 말을 그저 넘길 수 없었다.
“응. 설득하면 서진우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막아볼게.”
“한 번이면 될까요?”
비장한 결심이라도 하는 듯 지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도진이 피식 웃었다.
“한 번 만에 설득이 되면 그걸로 끝이고, 안 된다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될 때까지 해야겠지.”
제 손으로는 똥 닦을 생각은 전혀 없는 건지 도진이 비열하게 웃어 보였다.
“네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잖아. 그러니까 네가 엄마한테 잘 얘기해.”
사귀는 동안, 바람 피운 게 누군데……. 뻔뻔한 얼굴로 너무도 당연하게 말하는 도진의 모습에 지나는 간신히 감정을 추슬렀다. 지금은 자신의 감정이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자. 지나가 결심한 듯 답하자 도진이 씨익 웃었다.
“그래. 내일이 주말이니까 우리 집에 들러.”
태연스럽게 말하는 도진은 할 말이 끝났다는 듯이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지나는 부들거리는 주먹을 꼭 쥐고 자리로 돌아갔다. 때마침 진우가 사무실에 들어왔다.
진우와 함께 따라 들어온 이는 정 부장이었다. 요즘 들어 둘이 자꾸 붙어 다니는 것 같은 건 착각일까. 그마저도 지나는 물어볼 수 없었다.
진우는 지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눈웃음을 짓다가 지나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대리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회사에서는 깍듯하게 호칭으로 부르는 진우의 질문에 지나는 하마터면 진우에게 말해버릴 뻔했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동자에 힘을 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아니, 아무 일도 없는데.”
“음…….”
지나의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듯, 진우의 시선이 강렬했다. 그의 시선이 떨리는 지나의 주먹 쥔 손에 닿는 순간, 지나는 얼른 손을 등 뒤로 숨겼다.
“후……. 넌 오전부터 엄청 바쁜 거 같더라. 업무는 다 끝냈어?”
속마음을 들킬까봐 얼른 주제를 돌려 묻는 지나였다.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진우가 입을 열었다. 업무 진행상황을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아는 듯, 그가 천천히 대답했다.
“마무리만 하면 됩니다.”
“그래, 열심히 하자.”
어색하게 화이팅을 외친 지나는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제 심경을 들킬세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직 진우와 사귀는 건 아니었다. 결혼해달라는 진우의 목소리가 진득하게 귓가에 고여 있었다. 그리고 기억은 나지 않지만 술에 취해 알겠다고 대답한 것 같았다.
잔뜩 꼬여버린 기분이었다. 사내연애는 안된다고 철벽을 쳐놓고는 여지없이 진우에게 흔들렸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핀 풀도 이렇게 쉽게 흔들리진 않을 터였다.
그보다 도진의 어머니를 만나는 건, 진우에게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나는 진우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숨겨진 비밀을 진우가 금방 알아차릴 것만 같아서.
널 지키기 위해 하는 일이야.
하지만 넌 몰랐으면 좋겠어. 끝까지.
모니터를 노려보는 지나의 심장이 쿵쾅 뛰었다. 아마도 이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마우스에 얹은 지나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