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너라는 연고
(2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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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너라는 연고
2022.10.28.
솨아-
어디선가 밤바람이 불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눅눅한 밤바람이 지나와 진우의 사이를 지나쳤다.
진우의 눈은 밤하늘처럼 까맸다. 어떤 감정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언제 온 거야……?”
대답 대신 진우는 고요히 지나에게 다가갔다. 그가 드리운 그림자는 마치 지나를 덮을 것만 같았다.
“누나,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침잠된 눈빛이 지나를 바라봤다. 걱정스러운 눈길은 여전히 다정했다.
“왜 이렇게 지쳐 보여요. 걱정되게.”
그의 손이 차게 식은 지나의 뺨에 닿았다.
단지 그 온기만으로도 얼굴에 핏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꽁꽁 얼어붙었던 심장이 비로소 뛰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그에게 비밀이 생겼다는 사실에 가슴이 따끔했다.
진우에게는 조금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도 싫었다.
하지만 진우를 지키기 위해서는 감수할 수 있었다.
“오늘따라 피곤하네. 비가 와서 그런가. 하하.”
일부러 웃어 보이는 지나의 얼굴이 어색했다. 진우는 그런 그녀를 향해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지나의 곤란함을 캐묻는 대신 그는 드리워진 어둠처럼 묵묵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응? 나한테 볼 일 있어서 온 거 아니야?”
“누나 얼굴 봤으니까 됐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진우의 말에 긴장했던 지나의 표정이 풀렸다.
“그게 뭐야.”
늘 진우는 이런 식이었다. 지나에게 설렘과 따뜻함만을 주었다.
“누나한테 청혼한 거 진심이에요.”
진우의 눈동자가 낮게 빛났다. 지나의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흔드는 남자, 서진우 때문에.
지나는 일부러 시선을 돌리며 더듬거렸다. 최대한 어른답게, 누나답게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려 했지만 진우 앞에서는 번번이 실패했다.
“우리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동시에 지나의 머릿속에 얼마 전 술김에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 기억이 떠올랐다. 형광등이 번쩍이듯 생각난 기억에 지나는 입을 얼른 다물었다.
“음……. 그게…….”
너무 갑작스러웠다. 도진과의 연애를 지우기 위해 진우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는 것도 같았다. 진우를 향한 진심도 확실치 않았다. 단순히 호감인 건지, 아니면 그를 좋아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들어가서 쉬어요.”
피곤한 지나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진우가 그녀를 현관으로 이끌었다.
“응, 나 이만 들어갈게.”
심신이 지친 지나의 뒷모습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누나, 잠깐만요.”
진우가 지나를 부르더니 그녀를 품에 안았다. 깜짝 놀란 지나는 뭐라고 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겼다.
단단하면서 따뜻한 그의 품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누나 혼자 힘들어하는 거 보기 힘들어서…….”
낮은 그의 목소리가 달콤했다.
신기하게도 땅바닥까지 꺼질 듯 처진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의 가슴팍에서 들리는 규칙적인 심장 소리마저 지나에게 감미로운 음악소리처럼 들렸다.
“하아……. 내가 다 해주고 싶은데.”
부드러운 크림이 녹아내리듯 진우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정신을 차린 듯 지나가 서둘러 몸을 물렀다. 진우가 아쉬운 듯 지나를 안았던 팔을 풀었다.
“충전됐어. 고마워.”
쇳덩어리를 단 듯 무거웠던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듯, 깃털처럼 가벼웠다. 진우를 향해 밝게 미소지어 보인 지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도진이라는 상처 위로 진우가 연고를 발라준 것 같았다.
패인 듯, 쓰라렸던 마음이 아주 많이 편안해졌다.
***
휴대폰 알람이 시끄럽게 울었다. 팔을 뻗자 기다렸다는 듯이,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윽…….”
의식이 맑아지자 통증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누군가로부터 두들겨 맞은 것처럼 전신이 아팠다.
눈조차 힘겹게 뜰 만큼.
“지나야, 출근 안 해?”
다가온 지나의 엄마가 조심스레 물었다.
“세상에, 불덩이네.”
엄마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큰일 났네. 이를 어째.”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지나의 의식은 또다시 암전됐다.
‘……나야. 지……나야…….’
여러 명의 목소리가 뒤엉켰다.
골을 쪼개듯이 소리가 멀어져다 커졌다 흩어졌다.
그 가운데 지나는 혼자 서 있었다.
끝없는 암흑 속에.
‘지나 누나.’
명료한 목소리와 동시에 한 줄기 빛이 들었다.
거짓말처럼 지나의 몸을 감싼 한기가 사그라졌다.
“지나야.”
엄마의 목소리에 지나는 의식을 되찾았다.
목이 갈라진 논밭처럼 건조하게 아팠다.
“물…….”
곧 차가운 컵이 입에 닿았다. 차가운 물과 함께 엄마가 내민 알약을 간신히 삼켰다.
“병원에 안 가도 되겠어?”
몸을 살짝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지나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잘래…….”
“그래. 약 먹었으니까 일단은 푹 자.”
한편으로 회사가 걱정됐지만 길게 생각하기에는 머리가 아팠다.
“아 맞다. 회사에서 연락 왔길래 엄마가 대충 말은 했어.”
엄마의 말에 자리에 도로 누운 지나의 눈이 번쩍 떠졌다.
“남자 목소리던데, 이름이 뭐더라.”
엄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목소리를 흐렸다.
누구지. 누가 전화한 걸까.
다시금 몰려오는 수마에 빠지면서도 지나의 머릿속에 궁금증이 일었다.
***
주말 내내 앓은 지나는 월요일이 되었음에도 몸이 좋지 않았다. 잠에서 느지막하게 깬 지나는 어딘지 멍한 상태로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축축하게 젖은 잠옷이 찝찝했다.
우우웅-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도진이었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얼굴도,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
특히 지금은 더더욱.
받을까 말까 아주 잠시 고민하다 수신 거부를 눌렀다.
[회사 일이야. 받아.]
지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곧바로 문자가 왔다.
다시금 울리는 벨 소리에 애꿎은 휴대폰만 노려보다 느지막하게 받았다.
“네.”
- 너…….
말을 꺼내면서 한숨을 깊이 내쉬는 도진은 대충 들어도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 너 이렇게 아주 나쁜 사람인지 미처 몰랐네.
누가 할 소리…….
지나가 입술을 꾹 물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업무 관련된 일 아니면 끊겠습니다.”
- 야, 이지나.
바로 끊기는 줄 알았는지 도진이 다급히 소리쳤다.
- 우리 어머니 위기는 넘겼는데, 의사 말이 충격을 강하게 받으신 것 같대. 빨리 회복해야 하는데, 이게 심리적인 부분이 더 큰 것 같다고.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지.
지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 네가 그날 그렇게만 말하지 않았어도 우리 엄마 쓰러지는 일 없었을 거야.
도진의 비난에 화가 치밀었다.
“저 때문이라고 하시면 안 되죠. 과장님.”
비겁하고 치졸하게 책임을 묻는 도진의 말을 무 자르듯 잘랐다.
- 우리 어머니 잘못되시면 너 가만 안 둬.
마지막까지 협박하는 도진의 목소리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만 끊겠습니다.”
더 이상 말 섞을 기운도 없어 성급히 통화를 종료했다. 끝까지 나에게 책임을 넘기려는 도진의 행태가 어처구니없었다. 그의 협박은 들을 것도 없었다.
될 대로 되라지.
그럼에도 그의 윽박지름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대로 회사까지 관둬야 하나. 여러 생각에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창밖의 하늘은 막 동이 트고 있었다.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이른 시간에 전화해서 한바탕 쏘아붙인 도진의 행동에 다시금 어이가 없는 지나였다.
지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한바탕 몸살을 앓고 난 몸은 힘이 없었다.
거실로 나가자 고소한 냄새가 가득하였다. 언제 나온 건지 부엌에 있던 엄마가 인기척을 듣고 뒤돌았다.
“지나야, 옥수수 죽 끓였다. 이거 먹어봐.”
입맛이 다 달아난 줄 알았는데 달콤한 냄새는 구미를 당겼다.
“새벽부터 웬 죽이야.”
지나가 식탁에 앉자 엄마는 김이 모락모락 피는 죽을 식탁 위에 내려놨다.
“강원도 무농약 옥수수로 만든 거야. 확실히 더 고소해. 빈속에 출근하면 안 되지.”
지나는 죽을 한 숟갈 작게 떠 호호, 불었다.
“한여름에 웬 감기야.”
지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요즘 내가 너무 열일했나봐.”
지나가 장난스레 말하자 엄마가 미간을 찡그렸다.
“엄마가 그러지 말랬지. 회사에 노비처럼 일해봤자 다 쓸모없어. 네 아빠 봐라. 나이 들어 늙으니 팽 당하는 거.”
아빠 얘기에 지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열심히 죽을 호호 불었다.
“아빠랑은 화해했어?”
지나가 묻자 엄마는 별말 없이 행주로 식탁을 훔쳤다. 며칠 전, 무슨 문제 때문인지 부모님의 말싸움 소리를 들었기에 은근슬쩍 물어본 것이었다.
“화해하고 말고 할 게 있니. 그냥 이대로 넘어가는 거지.”
한숨을 내쉬던 엄마의 행주질이 멈췄다.
“엄마, 귀농할까 생각 중이야.”
“갑자기?”
엄마는 지나의 앞에 앉더니 사뭇 진지한 눈으로 바라봤다.
“도시 생활을 오래 했더니 마음이 더 각박해지는 거 같아서. 아빠랑도 얘기해서 조만간 여기 정리하고 시골 내려가려고.”
엄마의 말에 지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나는……?”
“29년 키웠으면 됐지, 뭐.”
엄마가 진담 반, 너스레를 떨며 눈짓했다.
“작은 오피스텔 하나 얻어. 엄마랑 아빠 이 집 팔아서 내려갈 거야.”
엄마는 완전히 결심한 모양이었다.
지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빈 숟가락만 입에 물고 있었다.
“언제……?”
“어제 집 내놨어.”
이렇게 빨리?
이렇게 갑작스레?
“아, 그럼 회사 근처 오피스텔 알아봐야겠네.”
“그래. 알아보고 말해줘. 엄마가 여력이 되면 도울게.”
갑자기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아니, 원래부터 어른이었지만, 독립이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부모로부터 완전히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지나를 더욱 긴장시켰다.
“나 갑자기 아프거나 그러면 어떻게 해.”
어제처럼. 늘 한집에 살던 부모님의 부재에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그러니까 이참에 결혼하면 얼마나 좋아. 너 회사에 남자친구 있잖아. 그 김도진 대리, 아니, 과장됐다고 했지.”
지나는 엄마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화들짝 놀랐다.
“그 사람이랑 헤어졌어.”
“5년이나 사귀고? 왜?”
엄마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지나의 이별에 유난히 놀란 눈치였다.
“사람이 사귀고 헤어지는데 이유 있나……. 그냥 뭐…….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지.”
애초부터 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지나가 씁쓸한 표정으로 옥수수 죽을 휘저었다.
“엄마는 이참에 너랑 그 사람이랑 결혼시킬까 생각했는데…….”
그 사람, 다른 여자랑 결혼해. 나랑 사귀는 동안에 바람피웠어.
그것까지 차마 말할 수 없는 지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엄마는 어딘지 아쉬운 표정이었다.
“직장도 좋고, 인물도 좋고, 사람도 괜찮아 보이던데…….”
더 있다가는 엄마와 함께 이별의 이유를 곱씹을 것 같아서 지나는 벌떡 일어났다.
“나 씻는다.”
도망가듯 욕실로 들어간 지나는 수도 밸브를 돌렸다. 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지자 심란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독립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지나는 복잡한 시선으로 김이 뿌옇게 낀 거울을 바라봤다. 마치 현재 지나의 심경처럼 흐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