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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고기압일땐 고기 앞으로 (27/80)


27 고기압일땐 고기 앞으로
2022.11.01.



 
월요일부터 회사는 시끄러웠다. 김도진 과장이 작정한 듯, 서진우를 불러 아침부터 혼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출근한 지나는 얼른 지혜를 향해 눈짓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지혜는 지나의 시선을 읽고 얼른 문자를 보냈다.


[우리 진우 인턴이 무슨 실수라도 했나봐. 출근하자마자 분위기 이래.]

지혜의 문자에 지나는 잠시 굳은 얼굴로 고민했다. 분명 자신에게 악의를 품고 진우를 혼내는 게 분명했다.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은 지나가 서둘러 도진과 진우에게 다가갔다. 도진의 냉랭한 목소리와 그 앞에 곧게 서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듣고 있는 진우의 모습에 지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과장님.”

지나의 목소리가 들리자 도진이 싸늘한 시선을 들어 힐끗 지나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죠.

“서 인턴이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꼿꼿하게 묻는 지나를 향해 안경을 추켜올린 도진이 입술을 비틀었다.


“네.”

비열한 눈빛을 마주 보며 지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실수이든 간에 사수인 제가 잘못 가르쳐서 한 거니 용서해주세요.”

도발적인 눈빛과 달리 지나의 말투는 공손했다.


“하.”

빌어도 부족할 판에.

새벽부터 지나에게 전화해 으름장을 둔 진우는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진우를 부른 것이었다.


“스테이플러를 누가 이렇게 박아요. 예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회사의 규칙과 질서가 있는데 사수부터가 글러먹었으니 인턴이 이 모양이지. 어휴.”

스테이플러? 지나가 얼른 도진의 책상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서류를 확인했다. 같잖은 트집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똑바로 가르치겠습니다.”

지나가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 대리님께서 똑바로 가르쳐주셨는데 제가 실수했습니다.”

고작 스테이플러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사무실 직원들이 한결같이 고개를 저었다.

진우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인상 좋고 성격 좋았던 과장이 어느 순간 변했다는 걸 느꼈다. 진우를 의식하기라도 한 것처럼 도진은 다른 사람들의 작은 실수에도 트집을 잡아 신경질을 내거나 화를 냈다.

다른 직원들의 눈치를 힐끔 살피던 도진은 자신에게 불리해진 걸 눈치채고 고개를 휙 돌렸다.


“다음부터 조심해. 둘 다.”

얼굴이 붉어진 채, 도진이 가보라는 듯 턱짓했다. 지나는 얼른 진우와 함께 자리로 돌아갔다.

죄없이 한참을 까인 진우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도진의 발악에 굳이 대응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그는 지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제 자리로 갔다.


[와……. 김 과장 그렇게 안 봤는데 개꼰대]

지혜로부터 온 문자를 확인하고 지나는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괴롭히려고 작정을 한 건지 도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단정한 자세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지나가 어머니 마음을 바꾸지 못해서일까. 자신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분풀이를 진우가 당한 것 같아 심란해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평소보다 집중력을 더 발휘해야 할 것 같았다. 제 잘못으로 진우가 또 혼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



“와, 축하드립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무실 내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평소와 다른 들뜬 축하 소리에 키보드 위를 움직이던 지나의 손가락이 느려졌다.


“대박.”

언제 나타났는지 지나의 귓가에 지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김도진 과장 지금 청첩장 돌리고 있는데.”

“어?”

청첩장이라니. 지나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고 말았다.


“뭘 그렇게 놀래. 우리 이미 다 알고 있었잖아.”

여기까지 말한 지혜가 은밀한 비밀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허윤주랑.”

파티션 너머 소리가 나는 쪽을 살피니 이미 김도진 과장과 허윤주가 나란히 축하를 받고 있었다. 사무실 직원들의 축하 소리가 유난스레 컸다.


“사내 부부 1호네. 언제 사귀었데.”

못마땅한 얼굴로 지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게. 언제 사귀었데.”

지나는 한결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버젓이 청첩장까지 만들어 돌리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나보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아도 얼마나 속이 탈까, 그 생각을 하자 통쾌한 마음이 들었다.


“둘이 잘 어울리네.”

지나가 성의 없이 말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입맛은 없었지만 제일 맛있는 걸 사 먹고 싶었다.


“맛있는 거 뭐 드실래요?”

순식간에 끼어든 낯익은 목소리에 지나와 지혜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나타난 진우가 지나의 파티션 너머에 서 있었다. 애정이 담긴 그의 선명한 눈빛에 지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고기!”

“점심부터 고기?”

지혜가 어리둥절해하며 묻자 지나가 기합을 넣었다.


“고기압일 때는 고기 앞으로!”

“가시죠.”

의기투합한 것처럼 지나와 진우가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그 뒤를 지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라 나갔다.


“점심부터 고기라…….”

 

***



“부장님.”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정 부장에게 다가간 도진이 깍듯하게 인사했다. 엘리베이터에 선 부장이 도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저, 이거.”

조심스레 내민 청첩장에 부장의 게슴츠레한 눈이 조금 커졌다.


“오, 자네 이제야 가는구먼. 이런 훌륭한 인재를 낚는 행운의 여인은 누구야?”

“같은 부서의 허윤주 사원입니다.”

“그렇군. 잘됐네. 잘됐어.”

부장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요즘같이 결혼 안 하는 시대에 애국하는 거야. 저출산에도 도움 되게 힘내라고.”

“하하, 감사합니다.”

도진이 수줍게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밥이나 같이 먹으러 가자고.”

“아, 네.”

부장은 안 그래도 잘됐다며 도진과 함께 이동했다.


“허 사원은 어딨어. 같이 먹어야지.”

“아……. 속이 안 좋아서 사무실에서 쉰다고 합니다.”

“그렇군.”

입덧이 부쩍 심해진 윤주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사무실에 올라갈 때 그녀가 먹을 걸 챙길 생각으로 도진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벌써부터 와이프 챙기는 거 봐. 자세가 됐어.”

부장이 짓궂게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올라타려는 순간, 도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여자가 사무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당황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거, 문 좀 닫지.”

부장의 채근에 잠시 머뭇거리던 도진이 닫힘 버튼을 눌렀다. 사무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무겁게 들렸다.

***



“독립?”

점심시간의 화두는 자연스레 나온 지나의 독립이었다. 깜짝 놀란 지혜는 그 뒤로 연신 부러움을 티 냈다.


“아, 나도 독립하고 싶다. 우리 부모님은 시골로 안 내려가시나. 혼자 살고 싶어.”

“난 좀 막막하긴 해. 내가 진짜 어른이구나, 싶고…….”

“스물아홉살이 이제 어른으로 각성하는 거야?”

장난스러운 지혜의 말에 지나가 눈을 가볍게 흘겼다.


“각성자 이지나 대리, 축하드립니다.”

변조음성으로 지혜가 익살스럽게 말했다. 회사 앞 카페에서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지혜의 장난은 이어졌다.


“오피스텔은 구했어요?”

지혜가 잠시 화장실로 사라진 틈을 타, 진우가 물었다.


“아직…….”

어디서부터 알아봐야 할지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네가?”

“저 혼자 살아서 조금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진우가 지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가끔 잘생긴 진우의 얼굴을 보면 지나는 화들짝 놀라곤 했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잘생긴 조각상이 말하는 것 같아서. 진우와 함께 있을 때면 그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이 이제는 익숙해지고 있었다.


“뭐…….”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지혜가 돌아왔다.


“커피 나왔어?”

“아니, 아직.”

괜히 놀란 지나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넌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나 없을 때 우리 진우 인턴이랑 무슨 짓을 한 거야.”

“응? 아냐.”

지혜의 장난에도 지나의 붉어진 볼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때마침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진우가 얼른 받아왔다.


“독립한 이지나 각성자님, 이제 가시지요.”

여전히 장난기 다분한 지혜의 말투에 지나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 맞다. 청첩장 우리 아직 못 받았잖아?”

도진에게 청첩장을 미처 받지 못한 사실을 깨달은 지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별로 안 궁금한데……. 게시판에 올리지 않을까? 사무실 직원한테 일일이 어떻게 다 돌려.”

“그래도 우리 부서 사람에게는 다 돌리겠지. 과장인데 설마.”

지나는 도진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와 결혼하기를 원했던 예전의 시간들이 너무나 바보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가 누구와 하던 아무런 감흥도, 아픔도 없었다. 진우 때문일까.


 
전신이 다 나오는 장면으로 정면을 향해 지나와 진우가 커피를 들고 나란히 걷는다. 그 와중에 지나가 진우를 바라보는 시선.

주변 풍경을 예쁘게 그려주세요. 초록풀들이 보이도록. 한여름.

지나는 제 옆에서 나란히 걷는 진우를 바라봤다.

어쩌면 너 때문일까.

자신의 작은 상처에도 안타까워하며 연고를 사러 달려가던 너…….


“맞다. 법인카드…….”

묻고 싶었던 질문이 갑작스레 떠오른 지나가 진우를 향해 물었다.


“서진우. 그때 연고 법인카드로 구매했지?”

“……?”

“개인 물품은 법인카드로 구매하면 안 돼.”

“허락, 받았는데.”

“응?”

누구한테 허락을 받아? 지나의 눈이 커졌다.


“음…….”

어딘지 곤란스러워하는 표정의 진우였다.


“누구한테?”

지나가 사뭇 심각한 얼굴로 재차 묻자 진우가 미소를 지었다.


“부장님께요.”

“정 부장? 부장님? 진짜?”

어떻게? 겨우 인턴 주제에 부장한테 물어봤다고? 그것도 개인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비품을 구매하는데?

지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진우를 쳐다봤다.


“음……. 부장님께 확인해드릴까요?”

진우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맑은 눈동자로 지나에게 말했다.


“아니, 믿어. 믿고말고.”

놀란 지나 대신 지혜가 얼른 대답했다.


“우리 서진우 인턴님의 말씀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마지막까지 방점을 찍는 지혜의 말에 지나는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랑 얘기 좀 해.”

진우를 향해 단호하게 말한 지나가 앞서 걸었다. 그 뒤를 진우가 말없이 따르자 지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에서 말했다.


“우리 서진우 인턴님 살살 다뤄주세요. 이지나 각성자님.”

 

***

한편, 기획마케팅부 사무실에서는 한바탕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텅 빈 복도를 울리는 비명소리가 날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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