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너 정체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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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너 정체가 뭐야
2022.11.04.
“그러니까 이게 대한민국의 미래란 말이야. 어?”
대한민국의 앞날을 미리 걱정하는 정 부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도진의 표정은 어딘지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평소 감정을 잘 숨기기로 자신 있던 도진은 오늘만큼은 ‘불안 초조 걱정’이라는 글자가 얼굴에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집안에 걱정거리라도 있나?”
대한민국에서 국제사회의 전반적인 미래 방향성으로 주제를 옮겨 침 튀기며 말하던 찰나, 도진의 똥 씹은 얼굴을 드디어 읽은 부장이 마뜩잖은 얼굴로 물었다.
“아, 그게……. 저희 어머니께서 지금 입원 중이셔서…….”
실상은 그게 아니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둘러대고 말았다.
“그렇구먼. 결혼 앞두고 말이야.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걱정이 크겠네. 남자란 말이야 자고로…….”
다시 시작된 정 부장의 이야기에 잠시 기대감을 가졌던 도진의 얼굴에 실망감이 퍼졌다. 그로부터 점심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까지 느긋하게 이야기를 한 부장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나는 오후에 미팅이 있어서 거래처로 넘어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
“네. 부장님. 살펴 가십시오.”
깍듯하게 부장을 배웅한 도진이 빠른 속도로 회사로 돌아갔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 여자, 회계팀의 이선영 경리였다. 도진이 부탁해서 법인카드 내역을 따로 알려준 여자였다.
‘도진 씨라면 당연히 해드려야죠.’
그녀를 이용해먹기 위해 유혹했다. 그리고 야무지게 이리저리 써먹었다. 그녀는 아마 자신이 결혼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터였다. 결혼까진 아니더라도 사귄다고 생각할 테니 아마…….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사무실로 달려간 도진은 제 앞에서 머리카락을 서로 잡고 뜯는 두 여자를 발견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라 다른 직원들도 사무실에 있는 상황이었다.
“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만 벙긋거렸다. 도진이 나타난 걸 알고도 두 여인, 윤주와 선영은 마치 WWE 라이브 경기를 하는 것처럼 엉켜 있었다.
“야! 놔!”
“네가 먼저 놔!”
“가만 안 둬! 너!”
서로 악에 받친 비명을 질러가며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여기저기 상처가 난 얼굴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두 여자.
“허윤주 씨, 이선영 씨.”
도진은 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두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 거짓말처럼 두 여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오빠…….”
순간 허윤주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도진을 불렀다. 선영도 마찬가지였다.
“도진 오빠…….”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앞이 캄캄해진 도진이 최대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일단 나와. 여기서 싸우면 어떻게 해. 저 좀 봅시다.”
다른 사람들의 쏟아지는 시선을 피하려 도진이 먼저 사무실을 나갔다.
만신창이가 된 두 여자가 손을 놓고 서로를 노려보며 도진을 따라 사무실을 나갔다.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건지 각자의 머리로 상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부장님께서 어떻게 연고를 사라고 허락해주신 거야?”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묻던 지나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아니, 그러니까 네가 부장님과 어떤 사이길래 그렇게 법인카드 사용처까지 허락받을 수 있는 거야?”
질문을 하면 할수록 지나는 스스로 꼬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지나의 얼굴을 여유로운 얼굴로 진우가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의 질문에 난감했던 처음과는 달리 꽤나 느긋한 표정이었다.
“혹시, 부장님의 숨겨진 아들은 아니겠지? 아니, 아니지. 성이 다르니까. 일단은…….”
지나는 혼자 상상에 빠져 말해놓고는 얼른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지나의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진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복리후생으로 사용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당연히 외근 중에 다친 거니까요.”
“어?”
“그런 연고 정도는 당연히 회사에서 지출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 그야…….”
당연히 그럴 수 있는데 그건 네 생각이고. 회사 윗분들의 생각은 그게 아니라니까.
특히 그 깐깐하고 치사한 정 부장으로 말할 거 같으면.
“어? 서진우 인턴.”
순간 정 부장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하마터면 정 부장의 성격을 입에 담을 뻔한 지나가 깜짝 놀랐다.
“아, 부장님.”
자연스레 진우가 인사했다. 윗사람을 만났음에도 진우는 조금도 위축되거나 긴장하지 않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둘이 회의라도……?”
모종의 회의를 하고 있었죠. 하하.
지나가 어색하게 미소지어 보였다.
“이제 들어가보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법인카드 외근 나갈 때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사용내역 일일이 물어볼 필요 없는 거 알지?”
이럴 수가.
지나는 부장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진우와 부장을 번갈아 쳐다봤다.
“우리 회사가 원래 그렇게 깐깐하진 않아. 당연히 외근 때에 복리후생으로 약국에서 비품 살 수 있지. 난 절대 찬성이야. 찬성. 서진우 씨, 알죠?”
어쩐지 간사하게까지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이던 정 부장은 이만 거래처에 미팅하러 간다며 저쪽 길로 사라졌다.
누가 봐도 윗사람은 서진우, 아랫사람은 정 부장이었다. 회사생활 5년 차 지나가 정확하게 잡아낸 분위기였다.
“너……, 정체가 뭐야?”
더 이상 웃을 수만은 없는 지나가 날카롭게 물었다.
***
비상계단으로 두 여자를 데려간 도진이 난감한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 이렇게 만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니……. 애초부터 진지한 관계가 아니었다. 이선영과는.
“오빠, 어떻게 된 거야? 나랑 사귀면서 이 여자랑 결혼한다는 게 말이나 돼?”
아니나 다를까 선영이 눈을 크게 치뜨고 하얀 청첩장을 팔랑거렸다.
“나한테 사기 친 거야? 나 이용하려고 거짓말한 거냐고!”
“뭐, 사기……?”
당황한 도진이 선영을 바라봤다.
“선영아. 오빠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니.”
“그럼 이 결혼은 뭔데. 이 여자는 뭐냐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계단을 쩌렁쩌렁 울렸다. 도진이 선영을 향해 달래듯 말했다.
“널 좋아하긴 했지만 우리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잖아.”
“뭐……?”
이건 무슨 개똥 같은 소린지, 선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랑 결혼하고 싶다며! 사귀지도 않는데 모텔도 가고 여행도 가고 그래?”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윤주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
윤주까지 가세하자 도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선영이랑은 그런 사이 아니었어. 얘 혼자 날 좋아했던 거야. 알잖아. 나는,”
“이거 완전 사기꾼 새끼네.”
이제야 도진의 본질을 알게 된 선영이 빽 소리를 질렀다.
“조상님께 감사제사라도 올려야겠네. 이런 멍멍이 놈이랑 안 엮이게 해주신 거.”
선영은 사납게 말하고는 도진을 향해 침을 퉷 뱉었다.
“액땜했다 쳐야지. 어휴.”
침 옆으로 찢긴 청첩장이 버려졌다. 곧이어 비상계단 철문이 쾅 닫혔다. 선영이 소란스럽게 사라진 후, 도진은 천천히 윤주에게 다가갔다.
“윤주야, 다 오해인 거 알지?”
그 순간, 찰싹, 소리와 함께 도진의 뺨에 불이 일었다. 윤주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도진을 노려봤다.
“더러운 놈.”
“야…….”
비뚤어진 안경을 제대로 고쳐 쓴 도진이 윤주를 사납게 쳐다봤다. 방금 전의 부드러운 표정은 간데없이 사라졌다.
“내가 여친 있는 거 알면서도 꼬리친 게 누군데……. 더럽다는 말을 해.”
도진의 안경 너머로 살벌한 눈빛이 번뜩거렸다. 순간 겁에 질린 윤주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각오한 거 아니야?”
내가 이런 놈인 거.
“태교에 안 좋으니까 성질 그만 부리고. 방금도 선 넘었어. 너.”
화를 억누르느라 탁해진 도진의 목소리가 윤주의 귓가에 꽂혔다.
탐스럽게 굽이치는 윤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도진의 얼굴이 싸늘했다. 한번도 보지 못했던 그의 표정에 윤주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흡.”
“한번은 애교로 봐줄게. 내가 인내심이 없는 놈이라.”
살벌한 목소리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윤주의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이런 성격의 남자인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젠틀하면서 능력 좋은 남자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예쁜 얼굴에 흠이 났네. 쯧. 봐줄 건 이거밖에 없는데.”
선영과의 몸 다툼에 생긴 상처를 못마땅하게 훑어본 도진이 혀를 찼다.
“사무실에 엄한 소문 나면 손해 보는 건 너니까 말 안 나오게 알아서 잘해.”
윤주의 뺨을 가볍게 톡톡 친 도진이 비릿하게 웃었다. 난생 처음 느낀 공포에 윤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도진은 그런 그녀를 홀로 둔 채, 그대로 비상계단을 나갔다. 동시에 긴장이 풀린 윤주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누나, 숨길 생각은 없었는데…….”
진우가 낮아진 목소리로 지나에게 말했다.
“사실…….”
지나는 숨을 쉴 생각도 못 하고 잔뜩 긴장한 얼굴로 진우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뭔가 엄청난 비밀이 튀어나올 것 같아 심장까지 뛰는 걸 멈춘 것 같았다.
진우가 어딘지 비밀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조심스레 열었다.
“제가 그날 부장님 노트북 수리 도와드렸잖아요. 그 이후로 부장님께서 저를 자주 찾으세요.”
아……. 진우가 부장과 친해진 이유였다.
“아니, 그런데 노트북 수리해준 거로 부장님이 저렇게 사근사근해졌다고?”
고작 그걸로? 지나는 석연찮은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개인 노트북인데 업무용으로도 쓰신다 하니 그냥 고쳐드렸어요.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부장님께서 호출하셔서 고쳐드렸거든요. 그랬더니 저를 좋게 보시네요.”
“아…….”
그래서 법인차량까지 빌려준 거였구나. 어쩐지 머쓱해진 지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또…….”
정 부장과 무슨 지연, 학연, 혈연 중 하나인 줄 알았네.
속으로 말을 삼킨 지나가 이번에는 어이없는 얼굴로 말했다.
“서진우, 너 그런데 바보야?”
“네?”
“그 비장의 카드를 고작 연고에 쓰다니.”
조금 억울해진 목소리로 지나가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진우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여름의 바람을 닮은 청량한 웃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