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진짜 이유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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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진짜 이유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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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진짜 이유가 뭐야?
2022.11.22.
두 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이었다. 10시에 시작된 치장은 12시가 다 되어서 마무리가 되었다.
“자, 다 됐습니다.”
드디어 끝났다는 소리에 지나가 눈을 떴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안 된다는 걸 지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거기에 퉁퉁 부은 얼굴은 아무리 화장을 한다 해도 커버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기대 없이 눈을 뜬 지나는 순간 다른 사람을 마주 본 줄 알았다.
“헐…….”
자기도 모르게 나온 실없는 소리에 옆에 선 실장이 콧김을 뿜었다.
“자, 어떠세요. 오늘 결혼하는 신랑님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지나 님 보시면 향후 10년 정도 후회하며 땅을 치겠어요.”
거울에 비친 지나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화장을 한 듯 안 한 듯 보이는 투명한 얼굴은 자연스러움이 그대로였다. 하지만 평소보다 눈을 두 배 정도 커 보이고 눈동자는 그윽했다.
정말 호수를 옮겨놓은 듯한 눈망울은 지나 자신이 봐도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았다.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했고 지나가 걱정하는 붓기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조막만 한 얼굴에 가슴께까지 굽이치며 내려오는 머리카락까지 신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 이게 저라고요?”
“네. 저희는 본연의 아름다움을 더 끌어내는 역할만 했어요. 가짜로 만들거나 억지로 만들진 않아요.”
때마침 잠시 외출했다 돌아온 진우가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들어왔다.
“다 끝났습니까.”
실장에게 묻던 진우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지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아…….”
숨소리가 멈춘 듯 얼어있던 진우가 이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듯, 진우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진우의 낯선 모습에 지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지나가 벌떡 일어나 계산할 생각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계산은…….”
“아, 남자친구분께서 이미 하셨어요.”
실장의 말에 지나가 진우를 홱 돌아봤다.
“내가 해도 되는데.”
“제가 무작정 데려왔잖아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진우가 말했다.
“그리고 이거.”
진우는 들고 온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대수롭지 않게 쇼핑백을 받아 내용물을 꺼내든 지나의 눈이 커졌다. 지나보다 주변의 반응이 더 소란스러웠다.
“어머머! 이거 그 에르메르 가방 아니에요?”
실장과 그 밑의 직원들이 몰려들었다.
“아니, 이거 구하기도 어렵다던데 어떻게 구하셨어요?”
신기한 물건을 보는 듯, 쉽사리 만지지도 못하고 연신 환호성만 질렀다.
“이, 이게 뭐야.”
당황스러운 지나가 진우를 향해 다시 물었다.
“여자들끼리 가방을 제일 먼저 본다길래…….”
비참하게 차인 전여친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진우가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지나는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전남친에 대한 기억은 모래성처럼 무너진 지 오래였다. 처음부터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마음과 함께.
“내가 그 사람의 전여친이라는 거 아는 사람도 없어. 우리 관계는 비밀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바보 천치였다. 도진은 자신을 드러내놓기 꺼려한 것이었다. 그 어떤 명분을 갖다 붙여도 자신은 그저 그에게 이용하기 좋은 말이었을 뿐이었다.
“누나가 싫으면 들지 말아요.”
가만히 지나를 바라보던 진우가 말했다.
“누나가 필요 없으면 저도 필요 없어요.”
주변에서 다시금 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저걸 버릴 거야, 어쩔 거야. 수천만 원 아니야? 소곤거리는 소리에 지나는 진우에게 말했다.
“환불해. 나 필요 없어.”
진우에게 쇼핑백을 도로 건네고 지나는 먼저 뷰티숍을 나섰다. 결혼식장은 같은 강남에 위치해 있었지만 차가 막혀 제시간에 간신히 맞춰 도착할 것 같았다.
결혼식장까지 가는 내내, 진우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조용한 실내는 숨 막히도록 정적이 흘렀다. 잠시 신데렐라가 된 것처럼 들떴던 지나는 굳이 전남친의 결혼식장에서 이렇게 해야만 하는 건지 생각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그래서 화가 나는 걸까. 아니면…….
진우 하나만 있어도 충분했다. 어떤 것도 필요 없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지나는 자기도 모르게 차창 밖을 살피던 고개를 진우에게 돌렸다.
“너에게 화난 거 아니야.”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에 진우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알아요.”
운전대를 잡지 않은 한 손으로 지나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알고 있어요.”
그의 따뜻한 목소리와 손길에 지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느 결혼식장이 혼잡하듯, 복잡했다. 단정한 예복을 차려입은 도진은 연신 허리를 굽히며 인사 중이었다.
회사인 줄 착각할 만큼 회사 사람들이 많았다. 입구에서부터 지나와 진우를 알아본 직원들과 가볍게 인사를 했다.
기어이, 전남친의 결혼식장에 오는구나.
지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마른 침을 삼켰다. 복수를 하고 싶다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러나 도진이 후회하는 모습은 꽤나 볼만 할 듯했다. 지나가 진우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가방 말이야. 한 번만 들었다가 반품해도 되겠지?”
물론 태그는 떼지 말고.
갑자기 달라진 지나의 마음에 진우가 웃었다.
“갖고 올게요.”
진우가 사라진 틈을 타 지나는 도진에게 다가갔다. 가방은 신부에게 보일 것이었으므로 여유가 있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예복을 차려입은 도진이 지나를 알아보고 표정을 굳혔다.
그 옆에 서 있던 도진의 어머니 또한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도진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어딘지 살짝 붉어진 얼굴빛이 연애 초기에 자신을 대하던 도진과 비슷해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너 오늘 엄청 예쁘네.”
아니나 다를까. 도진은 마치 여자친구에게나 할 법한 소리를 지껄였다. 지나는 생긋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나 원래 예뻐요.”
“세상에, 지나야.”
도진이 뭐라 하기도 전에 도진 어머니가 빨랐다.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지나의 손을 붙잡았다.
“지나야. 혹시 우리 도진이 결혼하는 거 보니 후회돼서 온 거니?”
“네?”
이게 아닌데. 어딘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한 불길한 느낌에 지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아픈 노파의 손아귀 힘이 얼마나 센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도진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딘지 정신이 빠져나간 얼굴이었다.
“도진이도 억지로 결혼하는 거 같은데……. 혹시 둘이 다시 만날 생각이 있으면.”
“어머니, 그만 하세요.”
갑작스러운 소동에 주변의 시선이 느껴진 도진이 한숨을 내쉬며 제 엄마를 말렸다.
“아니, 결혼식은 식장 들어가기 전까지 모르는 거야.”
꽤나 다부진 목소리였다.
“어머니, 저는 축하하러 온 거예요.”
지나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다가 자신이 그의 전여친이었다는 게 들통날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벌써 눈치챘을지도. 마치 전남친을 잊지 못해 결혼식장에 난리 치러 온 전여친이 되어버리는 것만 같아서 지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지나야, 사실대로 얘기해줘. 응? 우리 도진이 이대로 결혼해도 돼?”
도진 어머니의 애절함이 지나의 숨구멍을 막았다. 당장이라도 호흡이 막혀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잊고 있던 억울함과 분노가 피어올랐다. 눈물이 핑 도는 듯, 눈가가 홧홧했다. 이대로 울어버리면 삼류 막장 드라마 여주인공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누나.”
그때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나가 좋아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예복을 차려입은 신랑보다 훨씬 멋있는 진우가 서 있었다.
“많이 기다렸지?”
진우의 등장에 도진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마치 지나와 자신의 사이를 방해하러 온 것만 같았다.
“누구……?”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도진 어머니가 여전히 지나의 손을 부여잡은 채 물었다.
진우의 시선이 눈물이 맺힌 지나에게 향했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노파의 손에 잡힌 지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발견한 진우의 표정이 단번에 싸늘해졌다.
“이지나 씨 남자친구입니다.”
예의 바르지만 지독하게 차가운 말투였다. 진우가 손을 뻗어 노파의 손을 떼고 지나의 손을 잡았다.
“제 여자친구가 가방을 두고 와서요.”
그는 친절히 들고 온 가방을 지나에게 건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인턴 주제에.”
“전무님, 이만 이동하시죠.”
진우의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발견한 건 거의 동시였다. 낯선 호칭에 도진도, 지나도 굳어버렸다. 분명 아는 직급이었으나 대상이 틀렸기에. 정수리에 얼음을 끼얹은 듯,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김도진 과장님, 결혼 축하드립니다. 저희는 바빠서 결혼식을 끝까지 볼 순 없을 것 같군요. ”
도진을 바라보는 진우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그는 더 이상 인턴 나부랭이가 아니었다.
차분하면서도 여유로운 진우는 여태 어떻게 숨긴 건지 지배자가 풍기는 위압적인 분위기를 뿜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도진은 얼이 빠진 얼굴로 한참을 서 있었다.
놀라기는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진우에게 이끌려 결혼식장을 빠져나온 지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전, 무님……?”
뒤에 있는 사람들은 다 뭐고……. 진우의 뒤를 호위하듯 서 있는 비서들에 지나는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물었다.
“혹시 이것까지 모두 복수를 위한 몰래카메라 그런 거야?”
“…….”
“그런데 이건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 바로 들통날 건데……. 사칭하면 안 돼. 회사에서 가만히 있겠어?”
더듬거리며 말하던 지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요.”
“진, 짜야?”
어쩜 이럴 수 있지? 지나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배신감과 충격, 분노, 원망, 놀람 등등의 감정이 까만 동공에 어렸다.
“말하려고 했는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듯이 진우는 한 음절 한 음절 무거운 목소리였다.
“언제까지 속이려고 했어?”
지나가 진우의 손을 휙 뿌리쳤다.
“나 갖고 노니까 재밌니?”
인턴인 줄 알았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면 너는 일언반구도 안 해. 나에게.
씨근덕거리는 지나의 모습을 진우는 걱정스러운 눈동자로 바라볼 뿐이었다.
“누나가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정체를 밝히는 것보다 누나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게 더 먼저라고 생각했어요.”
나지막하게 말하는 진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하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우리 회사에 진짜 들어온 이유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