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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물 딱 한 잔만 (34/80)


34 물 딱 한 잔만
2022.11.25.



 
조금도 믿을 수 없다는 지나의 물음에 진우는 어쩐지 아픈 표정을 지었다. 곧게 뻗은 눈썹 끝이 조금 떨렸다.

그러면서도 지나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이지나.”

갑자기 튀어나온 제 이름에 지나가 흠칫 떨었다.


“지나 누나 때문이에요.”

전에도 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나는 그때와 달리 진우를 믿을 수 없었다.


“못 믿겠어. 네가 갑자기 나한테 온 이유도, 너도.”

“사실이에요. 다만 제가 말 안 한 건…….”

진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인턴이되 인턴이 아닌 직원의 사수라면…… 누나가 감당하지 못할까봐 그랬어요. 부담되는 거 뻔히 아니까. 누나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아서…….”

진우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만약 지나가 미리 알았더라면 그녀는 진우와 이렇게 가까이 지낼 수 없었을 것이었다.


“누나 곁에 있고 싶어서 인턴을 자원했어요.”

진우의 마지막 말은 진심이 담긴 듯 지나에게 묵직하게 닿았다. 손가락 끝에 핏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처럼 지나는 머리가 어질거렸다.


“내가 뭐라고…….”

한계 없는 그의 사랑에 지나가 쓰게 웃었다. 어쩐지 이것조차 사치라 느껴졌다.


“자기!”

누군가 지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지혜였다. 지나만을 발견하고 무작정 달려온 지혜는 뒤늦게 진우를 발견하고는 꽤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혼식 안 봐? 둘이 여기서 뭐 해?”

결혼식장의 들뜬 분위기와는 달리 질식할 것만 같은 냉랭한 분위기에 지혜가 화들짝 놀랐다.


“저분들은 누구야.”

진우의 뒤에 서 있는 비서들을 발견한 지혜가 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난 인사하고 나왔어. 결혼식 끝까지 못 볼 거 같아.”

지나가 지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본 지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뭐? 어?”

당황한 지혜는 지나를 미처 잡지 못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지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진우 씨, 무슨 일 있었어요?”

황당한 얼굴로 진우에게 묻는 지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따라 엄청 예뻤는데, 사진이라도 찍지.”

도무지 이유를 종잡을 수 없는 지혜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

불행 중 다행인지, 지나는 결혼식 다음 날부터 휴가였다. 회사에 가면 진우 생각이 자연스레 날 것 같았다. 그의 사수로서 함께했던 시간들은 짧지만 강렬했다.

마치 도망가듯 진우와 헤어진 결혼식 날 이후 진우에게 연락 오는 족족 피하고 있었다. 자신이 없었다.

그는 제 회사의 임원이었다. 자신과 닿지 못할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함부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 전에 어떠했든……. 도진만 해도 그랬다. 과장을 달고 나서는 직급 차이에 대해 늘 가르쳤다. 그래서 어쩌면 더 도진의 뜻에 무작정 순종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 계획도 없던 휴가를 어떻게 지내야 할지 고민하던 지나는 드디어 집이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사 날도 정해졌다. 서울 떠날 생각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네.”

지나의 엄마가 빨래를 접으며 말했다.


“너 이참에 시집가면 얼마나 좋아.”

엄마의 진심이었을까. 지나는 사과를 아삭 베어 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난 혼자 살 팔자인가봐. 엄마.”

“아니, 직장 동료 결혼식장에서 보통 눈도 맞고 그러던데.”

엄마는 아쉽다는 듯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큰 회사 다니면 보통 알아서 연애도 잘 하더니만.”

속상한 마음이 물씬 담긴 목소리에 지나는 대꾸할 의욕이 사라졌다.


“그래, 뭐 인연이 다 있겠지.”

아닌 척하지만 딸이 내년에 앞자리가 3으로 바뀌는 게 여간 걸리는 모양이었다.


“앞자리가 3이면 어떻고 4면 어때. 아무 남자나 만나서 덜컥 결혼했다가 나중에 이혼한다고 하는게 더 머리 아파.”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이쯤 되면 엄마 혼잣말 레벨도 거의 수준급이었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어떻게 살까 걱정됐는데 우리 엄마 보니 누구보다 잘살 것 같아.”

적어도 외롭지는 않을 듯싶었다. 지나가 장난스레 말하자 빨래를 툭툭 털던 엄마가 지나를 흘겨봤다.


“어이구, 말은 잘해요.”

“그럼, 다 이게 말발로 회사에서 근근이 버티는 거야. 엄마. 회사가 이것만 잘해도 돈이 나온다니까.”

“그래? 엄마가 또 한 입 하잖아. 엄마도 취업 좀 시켜달라 해야겠네.”

엄마가 반색하며 말하자 지나가 뭔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맞아. 나 엄청 든든한 백 있는데.”

“백? 무슨 백?”

“있어. 엄마 취업이나 시켜달라고 부탁해?”

쓸데없는 농담을 지껄이면서도 괜히 마음이 쓰렸다.


“네가 회사에 무슨 백이 있다는 거야.”

“엄마 딸을 뭐로 보고.”

노란 사과의 속살에 포크를 푹 찔렀다.


“그런데 너무 능력 있는 남자랑 만나면 여자가 힘들겠지?”

“응? 무슨 헛소리야. 능력 있는 남자 만나야 고생을 덜 하지.”

엄마가 무슨 소리냐며 반문했다.


“아니……. 그렇잖아. 남자랑 여자랑 능력 차이나면…….”

너무 비교되잖아.


“연애하는데 능력이 무슨 상관이야. 남자친구랑 올림픽 경기라도 해? 우리 딸 큰일 났네. 로맨스를 몰라. 로맨스를.”

과장되게 고개를 흔드는 엄마를 향해 지나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진짜 모르나봐.”

“신데렐라 봐라. 백마 탄 왕자는 예로부터 여자들의 환상이잖아. 엄마가 신데렐라 동화책 좀 다시 읽어줘?”

“됐거든요. 오피스텔 알아보러 나갔다 올게.”

백마 탄 왕자에 피식 코웃음을 친 지나는 마저 사과를 입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공주가 아닌데……. 아무리 백마 탄 왕자가 온들…… 그 사랑을 온전히 받을 수 있을까.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실제로는 날 이용하기 위해……. 그렇지 않고서야 대등하지 못한 관계에서 진정한 사랑은 있을 수 없어.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선 지나는 답답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회사 근처 오피스텔로 알아볼 생각이었다.


[대박, 서진우 인턴 퇴사했대.]

[헐, 대박. 미쳤. 서진우 인턴 전무된 거 알아?

월요일 아침부터 회사 특파원처럼 소식을 바삐 알리는 지혜의 문자가 아침부터 연달아 울렸다.

징징, 울리는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하던 지나는 태연한 얼굴로 버스에 올라탔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진우와 나눴던 뜨거운 키스와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가 전무가 되었다고 해서 변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그와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아서 지나는 두려웠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린 기분.’

딱 그랬다. 그래서 그 순간이 오기 전에 미리 잘라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많이 사랑하지 않을 때, 잘라내야 상처가 크지 않을 테니까.

회사 근처에 내린 지나는 매일 출근하는 회사 건물을 덤덤하게 올려봤다. 마치 외부인이 된 것처럼 흘낏 올려다본 회사 건물의 외벽은 그 위용을 자랑하듯 햇살에 반짝였다.

중요한 건 오피스텔을 빨리 구하는 것이었다. 지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대충 지도를 켰다. 부동산 관련 어플이 중구난방으로 켜졌다. 어디서부터 알아봐야 할지 난감한 찰나, 누군가 지나에게 다가왔다.


“학생.”

학생이라는 소리에 지나는 선뜻 자신을 부르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회사에 출근할 때처럼 정장 복장이 아닌지라 남이 볼 때 대학생처럼 보이는 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 네.”

두어 번 불려진 소리에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자 할머니 한 분이 서 있었다.


“여기 회사에 손자가 다니는데 혹시 어떻게 어떻게 들어가는지 알아요?”

나이 지긋한 할머니는 등이 굽은 채로 무거워 보이는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아…….”

아주 잠시 고민하던 지나는 결심한 듯,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무슨 부서인지 아세요?”

지나의 친절한 반응에 할머니의 주름진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

30분 뒤, 엘리베이터에 탄 지나는 자신이 놓인 현실에 정신이 반쯤 빠져 있었다. 어째서 저 할머니의 손자가 전무가 되어 첫 출근한 서진우라는 말인가. 저 할머니는 왜 하필 자신을 콕 집어 도와달라고 한 걸까.

그것도 ‘학생’으로 봤으면서. 무거운 보자기를 직접 들고 할머니를 대신해 말해줄 이름을 듣는 순간, 지나는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제 와서 할머니를 못 도와주겠다고 할 수도 없는 사실이었다.

회사를 수년간 다니면서 로비 정중앙에 위치한 인포 데스크에 들른 적이 없었다. 이곳에 들르는 이유는 두 가지였으니까.

외부인이거나 임원에 관련된 방문이거나. 둘 중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않았던 지나가 들를 일은 여태 없었다. 할머니에게 손자의 이름을 듣는 순간 지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응, 우리 손자 서진우. 이번에 전무됐대.’

해맑게 웃는 할머니가 진우 할머니라니. 할 수 없이 전무실 인포에 문의하고 비서라도 내려오면 할머니를 모시라 부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나의 야무진 목표는 비서가 내려와 할머니를 안내할 때 깨졌다.


‘홀홀, 학생도 같이 가. 가서 물 한 잔 마시고 가.’

그렇게 임원용 엘리베이터에 오른 지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올라가는 숫자판만 바라봤다.

띵- 맑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홀홀…….”

기력 없어 보이는 할머니는 지나보다 더 빠르게 걸음 했다. 처음 와본 전무실은 낯설면서도 어딘지 심장을 둥둥 울렸다. 진우가 저 안에 있다는 걸 상상만 해도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할머니, 이 안에 손자분이 계실 거예요. 저는 이만 내려갈게요.”

청바지에 흰 티만 입고 회사에 나온 것도 어색할 지경이었다. 거기에 전무가 된 진우를 맞닥뜨리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고 가요. 내가 이렇게 신세를 졌는데.”

할머니의 말에 지나가 두 손을 휘저었다.


“아유, 괜찮습니다.”

그 물 마시다 사레 걸리느니 안 마시는 게 낫습니다.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슬슬 뒷걸음질 치는데 전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여전히 잘생긴 진우의 모습이 나타났다. 할머니를 발견한 진우가 환하게 웃었다.


“할머니! 연락하시면 제가 모시러 갔을 텐데요.”

“우리 손자 승진했다길래 보러 왔지.”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여기 예쁜 아가씨가 도와줬어.”

지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옮기는 찰나, 진우의 시선이 지나에게 닿았다. 지나를 발견한 진우의 표정이 놀람과 반가움, 그리고 그리움으로 변했다.


“저,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대로 가면 내가 뭐가 돼.”

진우와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아, 얼른 도망가려 했지만 할머니는 지나를 보내주지 않았다.


“물 딱 한 잔만 마시고 가요. 응?”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진우는 무슨 일인지 알 것 같다는 미소를 지으며 지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네…….”

도망가긴 글렀다. 지나는 포기한 듯, 힘없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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