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한 번만 더 안아도 돼요?
(37/80)
37 한 번만 더 안아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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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한 번만 더 안아도 돼요?
2022.12.06.
조금 뒤, 세 사람은 식탁에 앉았다.
“어유, 재료가 없어서 그냥 있는 거로 대충 만들었어.”
갈비찜이 가득 쌓인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엄마가 수줍게 말했다.
“엄마……. 아침부터 웬 갈비찜이야. 우리 집에 이런 게 그냥 있었어?”
지나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묻자 엄마가 호호, 웃으며 진우에게 말했다.
“우리 원래 아침에 이렇게 먹어. 부담 갖지 말고 먹어.”
우리 집이 언제부터 아침에 갈비찜을 먹었어? 엄마…….
나 지금 배신감 드는데…….
지나의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진우가 젓가락을 집었다.
“와, 너무 맛있어 보이네요. 잘 먹겠습니다.”
진우가 예의 바르게 말하고는 윤기가 반지르르르 돋는 갈비찜 하나를 집었다. 엄마는 어딘지 요리경연대회에 나간 듯 긴장한 얼굴이었다. 마치 심사위원에게 심사를 받기 일 초 전 같은 분위기였다.
“와…….”
입안 가득 갈비찜을 먹은 진우가 꿀꺽 삼키고는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입맛에 맞아? 아우, 내가 간을 안 봐서.”
“저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갈비찜은 처음 먹어봐요.”
진우의 감탄에 비로소 엄마의 웃음이 터졌다.
“아유, 갈비찜이 뭐 다 거기서 거기지. 아이구, 정말.”
지나 홀로 관객이 된 기분이었다. 둘의 콩트를 일렬에서 직관하는 외톨이 관객.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아 억지로 웃어야 하나 싶을 찰나.
“진짜예요. 누나 한번 먹어봐요.”
진우가 젓가락으로 갈비찜 살코기를 집어 지나의 입에 들이댔다. 순식간이었다.
진우의 애정 어린 눈동자에 당황한 지나의 얼굴이 비쳤다.
“어머어머, 나는 물 좀 갖다 줄게.”
호들갑스럽게 박수를 치던 엄마가 갑자기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연신 웃음을 멈출 줄 몰랐다.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근육까지 몽땅 얼어버린 것처럼 지나는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런 지나를 언제까지고 기다려줄 생각인지 진우는 미소지은 얼굴로 지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딩동-
얼음 땡처럼 초인종 소리에 지나는 정신을 차린 듯 벌떡 일어났다.
“아, 아저씨들 오셨다.”
붉어진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바로 코앞에 있던 진우에게 벗어나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조여들었던 가슴에 숨통이 트인 기분이었다.
“짐 정리하러 엄마가 가야 하는데.”
“아냐. 나 혼자 할 수 있어. 겨우 한 칸짜리 방인데.”
지나의 짐이 트럭에 모두 실렸다. 엄마는 연신 진우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여기 멋진 동생 있으니 엄마가 굳이 안 가도 되겠다.”
어딘지 속셈이 뻔히 보이는 말에 지나가 얼른 손을 흔들었다.
“짐 정리하고 연락할게. 얼른 들어가.”
“그래.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해. 이왕이면 내일까지.”
못 살아. 지나는 진우의 팔을 잡고 휙 당겼다.
“빨리 가자.”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먼저 출발했다. 지나는 진우의 차에 올라탔다.
매일 슈트를 입은 그의 모습을 보다가 평범한 복장을 보니 뭔가 기분이 새로웠다.
풋풋한 진우의 대학교 시절을 엿보는 것만 같아 어딘지 시선을 똑바로 둘 수 없었다.
“오늘 이사인 거 어떻게 알았어?”
능숙하게 운전을 하는 진우가 지나를 힐끗 쳐다봤다. 더운 날씨답게 햇볕이 찌를 듯 강했다.
“이 대리님이요.”
에어컨을 한층 강하게 켜며 진우가 대답했다.
“아…….”
지혜에게 이사한다는 문자를 보낸 기억이 떠올랐다. 앓는 듯한 신음소리를 내며 지나가 이마를 짚었다.
“회사에 비밀이 없다는 걸 깜빡했네.”
“이사가 비밀이었어요?”
“뭐, 너의 비밀에는 비할 수도 없지만.”
어딘지 뾰족한 지나의 말에 진우가 기분 좋게 웃었다.
“아직도 화났어요?”
진우가 넌지시 물었다. 지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네가 이제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가버린 것 같아서.”
사실은 그랬다. 간신히 마음이 닿은 줄 알았다. 그런데 닿자마자 또다시 진우와의 거리가 멀어졌다. 지나가 작게 중얼거리고는 얼른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렸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영 민망했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둔 지나의 손을 진우의 손이 덮었다.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진우의 손에 지나가 움찔 놀랐다.
“닿아요.”
정면을 향한 진우가 부드럽게 말했다.
“닿고 있잖아요. 저 어디 안 갔어요.”
그의 따뜻한 손만큼이나 따뜻한 목소리였다. 지나는 울컥 솟구치는 감정을 꾹 누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뭐야…….”
핀잔하듯 말하면서도 지나는 진우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
이삿짐은 뺄 때처럼 금방 옮겼다. 비어 있을 때와는 달리 짐이 들어가니 방은 금방 비좁아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어느덧, 텅 빈 원룸에 짐들이 자리를 잡았다. 아저씨들에게 수고비를 드리고 인사를 하는 것으로 일단락이 났다.
소소한 짐들을 대충 정리한 뒤 옥상 마당을 나온 지나의 눈에 평상에 팔을 기대고 앉아 있는 진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후 늦은 시간답게 노랗게 짙어진 햇빛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치익-.
캔 따는 소리에 서진우가 고개를 돌렸다. 지나는 미소와 함께 시원한 맥주캔을 들이밀었다.
“수고했어.”
진우가 씨익 웃으며 맥주캔을 건네받았다.
“전망이 참 좋네요.”
“집 잘 구했지?”
짠, 맥주캔을 살짝 흔들며 내밀자 진우가 피식 웃으며 맥주캔을 살짝 부딪쳤다. 시원한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피곤이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눈을 돌리자 맥주를 마시는 진우의 꿀렁거리는 목울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슬로모션처럼 보이는 탓에 지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벌써 취기가 도는 건지 제 눈이 이상했다.
“대문 안전장치는 좀 더 손 봐야 할 것 같아요.”
시원하게 맥주를 마신 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혼자 괜찮겠어요?”
넌지시 묻는 진우의 질문에 지나가 다부지게 주먹을 쥐었다.
“그럼. 난 잘 살 수 있어. 그렇고말고.”
어쩐지 비장하게 느껴지는 탓에 진우가 작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옥상의 공기에 잔잔히 녹아드는 것 같았다.
“이거.”
진우가 지나 앞으로 뭔가를 들이밀었다.
진우를 닮은 하얀 강아지 인형이었다. 까만 눈에 털이 복슬복슬한.
“이사 선물이에요.”
“고마워.”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진우는 말을 멈추고는 강아지 인형의 배를 꾹 눌렀다. 그러자 곧 진우의 휴대폰이 우우웅- 울렸다.
“이렇게 절 불러요.”
“와!”
일반적인 인형이 아니었다. 지나는 인형을 들고 요리조리 살피다 이내 품속에 꼭 껴안았다.
“정말 든든하다. 이름 지어줘야지.”
“이름이요?”
살짝 놀란 얼굴로 진우가 되물었다.
“찌누.”
“와…….”
서진우가 낮게 탄식했다.
“왜? 별로야?”
어딘지 뜨끔 놀란 얼굴이었지만 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뇨. 귀여워서요.”
“찌누찌누찌누.”
“으아…….”
난감한 표정을 짓는 진우를 괴롭히듯 지나는 장난스레 찌누를 들이밀었다. 강아지 털이 간지러운지 고개를 돌리며 피하던 진우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못 견디겠던지 지나의 팔을 꽉 잡았다. 마치 그녀의 행동을 멈추기라도 하는 듯. 돌연 그의 품에 안기게 된 지나 역시 웃음을 멈췄다.
“뭐야……. 왜.”
한층 낮아진 진우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의 숨결이 지나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언젠가 봤던 그의 집요해진 눈빛에 열기가 어렸다.
그것도 잠시,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입을 맞췄다.
더운 여름날보다 훨씬 뜨거운 입맞춤에 지나는 온몸이 데는 것 같았다.
여름날 특유의 향기와 어우러져 진우의 달콤한 체취와 알싸한 맥주 냄새가 함께 풍겼다.
온몸을 감싸는 충만함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이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행복이 한꺼번에 쏟아진 것 같았다.
“하아…….”
쪽 소리와 함께 맞물렸던 입술이 떨어졌다.
진우는 여전히 일렁이는 눈으로 지나를 바라봤다.
“이렇게 예뻐서 걱정이에요.”
진우가 큰 손으로 지나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자 지나는 눈을 감으며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잠시 후, 진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역시 누나 두고 못 가겠어요.”
“그럼, 자고 갈래?”
순간 진우의 얼굴이 굳었다.
지나는 키득거리며 얼른 품속에 있던 찌누를 흔들어 보였다.
“아니다. 나에겐 찌누가 있었지.”
아무렇게나 흔들리는 찌누의 털을 보며 진우가 속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지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함부로 그런 말 하지 마요. 누나.”
진하게 내려앉은 진우의 눈빛에 지나는 흠칫 놀랐다.
그의 눈빛에 심장이 조일 듯 두근거렸다.
“흠흠.”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계단 입구에 주인아저씨가 서 있었다. 지나는 황급히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얼마나 진우에게 몰두했으면 계단 올라오는 발소리조차 못 들었을까.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사는 다 끝났고?”
사람 좋은 얼굴로 묻는 아저씨의 질문에 지나가 밝게 대답했다.
“네. 덕분에 잘했어요.”
“허허, 그래요. 젊은 아가씨가 아주 야무지네.”
흡족한 웃음을 짓던 아저씨가 옆에 서 있는 진우를 흘낏 살폈다.
“아가씨 남자친구……?”
지나가 뭐라 답하기 전에 그녀의 어깨를 감싸는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네. 남자친구입니다.”
서진우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렇구먼. 알겠어요. 혹시 문제 생기면 언제든 말하고.”
“네. 감사합니다.”
옥탑방을 휘 둘러보고는 몸을 돌리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향해 지나가 꾸벅 인사했다.
“너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 주인집 아저씨라 잘 보여야 한단 말야.”
“…….”
지나의 핀잔에 진우는 어딘지 불만스러운 눈이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난, 그래야 해.”
너와 다른 나는, 이제 이곳에서 버텨야 해.
지나의 고집스러운 말에 진우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지나를 바라봤다.
“난 다음 달부터 월세도 밀리지 않고 내야 하고, 혹시라도 무슨 일이 터지면 주인아저씨 눈치를 봐야 하는 세입자 신세니까.”
뭔가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던 진우가 한숨을 나직이 내쉬었다.
“후……. 힘들면 언제든 말해요.”
“응, 그럴게.”
지나는 하얀 강아지 찌누를 들어 보이며 웃어 보였다.
“나에겐 찌누가 있잖아.”
그런 지나를 바라보던 진우가 그녀를 못 이기겠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한 번만 더…… 안아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