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같이 자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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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같이 자도 돼요?
2022.12.16.
닿을 듯 말 듯한 입술이 멈췄다. 아쉬운 얼굴로 진우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
“아, 갑자기 미안하네.”
집주인아저씨였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지나가 묻자, 아저씨는 어쩐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말도 없이 방 안쪽을 살피는 눈이 무례했다.
“혹시 뭐 공사라도 했어?”
“공사는 아니고……. 블라인드 달았어요.”
지나의 말에 아저씨가 고개를 쭉 빼고는 창문을 살폈다.
“저쪽은 어차피 해 드는 방향이 아니라 괜찮을 텐데…….”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하는 아저씨의 모습에 집주인이 못을 못 박게 한다는 인터넷 글들이 떠올렸다. 지나는 다소 황당했지만 세입자 신세라는 걸 재차 떠올리며 억지로 웃었다.
“네. 그런데 밤에 너무 안쪽이 보이는 거 같아서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드는지 곤란한 얼굴을 짓던 아저씨에게 마침내 진우가 입을 열었다.
“커튼이나 블라인드조차 달지 못한다는 조건이 계약서에 있었습니까.”
칼처럼 날카로웠다. 아저씨가 이마를 문지르며 진우를 바라봤다.
“하참, 젊은 사람이 세를 안 내줘서 모르나 본데, 저렇게 블라인드 단답시고 벽에 구멍을 내면 다음 세입자는 어떻게 받으라고.”
아저씨가 다소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계약사항에 진작 명기했으면 입주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당연히 못 하나 박는 거 일일이 보고하고 박아야지. 그걸 구차하게 계약서에 일일이 쓰나?”
누가 구차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진우는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아저씨를 내려다봤다.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는 회사에서 업무를 볼 때와 같았다.
“네. 쓰셔야죠. 쓰지 않고 지적하는 건 계약에 위반되는 행동입니다.”
말문이 막혀버린 아저씨는 괜히 헛기침만 해댔다. 진우를 슬쩍 보던 아저씨가 작게 중얼거렸다.
“뭐, 법 쪽을 조금 아나 본데…….”
“법으로 하고 싶으시면 법으로 해드리겠습니다.”
목 주변을 긁적이던 아저씨는 할 말이 없는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 아무튼 그건 그렇고, 아가씨 혼자 사는 거 맞지?”
지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동자 색이 탁했다. 진우를 의식하고 물어보는 말인가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려는데, 이번에도 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 곧 결혼할 거라서요. 제가 왔다 갔다 합니다.”
“어어어?”
그의 말에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치켰다.
“계약할 때 그런 말 안 했는데……. 흠흠…….”
“그게 문제가 됩니까?”
날카로운 눈빛으로 묻는 진우의 질문에 아저씨는 당황한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 아니, 아니, 뭐, 그건 아니고. 알겠어요. 허허, 젊은 사람들이 참……. 이만 가지.”
아저씨가 나가고 나서 진우가 문을 닫았다.
“아, 오늘 현관문 키도 바꿀게요.”
마치 뒤늦게 생각난 것처럼 말했지만 이미 블라인드가 담긴 봉지 안에서 새 번호키를 꺼내는 진우였다. 뚝딱뚝딱 제법 능숙하게 번호키까지 바꾼 진우가 굽힌 허리를 펴며 말했다.
“비밀번호는 누나가 설정해요.”
현관문을 열고 새 키에 번호를 설정하라는 진우를 향해 지나가 말했다.
“0925”
“공구……이…….”
지나의 말에 번호를 꾹꾹 누르던 진우가 순간적으로 지나를 바라봤다.
그가 누르고 있는 비밀번호는 서진우의 생일이었다.
“우리 곧 결혼할 사이니까.”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까 아저씨에게 서진우가 했던 말을 장난스레 따라 하자 진우가 피식 웃었다.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 아래로 수천 개의 불빛들이 진우의 등 뒤에서 반짝거렸다. 그중 가장 아름답게 반짝이는 빛은 진우였다. 단연코 지나를 위해 아낌없이 모든 걸 내어줄 사람.
“마저 하고 들어와. 라면 끓여줄게.”
지나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오늘 고생했으니까 특별히 너구리 한 마리 잡아줄게.”
삐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불을 켜는데 언제 다가왔는지 진우의 손이 지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어깨 위로 진우의 따뜻한 숨결이 내려앉았다. 단단한 그의 품은 포근했다.
“배고프지? 빨리 끓여줄게. 저기 앉아 있어.”
“오늘 고생했으니까 충전 좀 할게요.”
지나의 가느다란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채, 진우가 웅얼거렸다.
그 행동에 간질거림이 온몸으로 퍼져갔지만 지나는 애써 태연한 척 라면 봉지를 뜯었다.
“누나, 나 오늘 많이 피곤한데…….”
진우의 칭얼거림이 듣기 좋았다. 한없이 어른 같았던 진우가 지금은 어린 아기처럼 귀여웠다.
“알았어. 계란 특별히 두 개 넣어준다.”
지나는 생색이라도 부리는 듯, 냉장고를 열어 계란을 꺼냈다.
“오늘도 자고 가면 안 돼요?”
진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가락에 힘이 절로 풀린 까닭이었다.
바닥에 부딪힌 계란은 파삭,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지나는 허둥거리며 휴지를 뽑아 계란을 닦았다. 어제도 잤지만 그저 잠만 잔다는 의도가 아니란 걸 느꼈다. 그의 목소리가 끈적한 흰자처럼 귓가에 진득하게 고인 것 같았다.
“함부로 그런 말 하면 못 써.”
마음의 동요가 부디 얼굴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며 진우를 괜히 타박했다.
불에 올려진 냄비에서 끓는 소리가 났다. 보글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김이 차올랐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끈적한 여름날의 공기가 달아올랐다.
“조금 덥지……?”
계란을 치운 휴지를 버리며 에어컨 리모컨을 찾았다. 아까 분명 탁자 위에서 봤는데 그새 어디 갔는지 눈에 띄지 않아 지나는 허둥거리며 리모컨을 찾았다.
그때 삑- 소리와 함께 에어컨이 켜졌다. 진우가 리모컨을 흔들며 싱긋 웃었다.
“이쪽에 있었어요.”
“으응…….”
민망함에 진우의 시선을 피했다.
“이제 라면 넣어야겠다.”
어째서인지 라면 봉지가 자꾸 미끄러졌다. 손가락까지 바보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 순간 매끈하고 긴 손가락이 능숙하게 봉지를 뜯었다. 그러더니 속살처럼 나타난 면을 잽싸게 꺼내 끓는 물에 넣었다.
“우리 누나는 나 없이 아무것도 못 하네요.”
장난스러운 그의 말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넌 저기 가 있어.”
민망함을 들킬라 진우를 멀찍이 밀어냈다. 창밖으로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왜 이리 더운 건지.
다행히 진우는 별말 없이 멀어져 구석에 있던 상을 꺼냈다. 이내 완성된 라면 냄비가 상 위에 올랐다. 작은 상을 가운데 두고 진우와 마주하자 기분이 묘했다.
“맛있게 먹어.”
“잘 먹겠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을 크게 한 젓가락 집어 후후 부는 진우의 모습이 친근했다. 친근하면서도 낯선 진우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는데,
“누나는 안 먹어요?”
문득, 진우가 물었다.
“응, 나는 됐어.”
좋아하는 사람의 식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이 일었다.
“나는 너 보고 있을래.”
지나의 말에 진우가 가볍게 웃더니 라면을 먹었다. 이마에 땀이 송공송골 맺히는 걸 보니 괜히 지나까지 더운 기분이었다.
이윽고,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운 진우가 차가운 물을 따라 마셨다.
“다 먹었으면 집에 가.”
지나가 빈 그릇을 챙기며 넌지시 말했다.
“왜 자꾸 쫓아내려고 해요. 저, 자주 왔다갔다 하잖아요.”
진우가 웃으며 말했다. 방금 전 주인아저씨한테 거짓으로 둘러댄 말이었다.
“넌 곧 미국으로 갈 거잖아.”
다시금 애써 무시하려던 말이 튀어나왔다. 사실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말. 그리고 지독하게 외면하고 싶던 말.
말을 내뱉고 멈칫한 지나는 서둘러 개수대 수도를 틀었다. 손 위로 고인 물이 줄기차게 쏟아졌다. 그럼에도 답답한 속은 뚫리지 않았다.
세게 틀어진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개수대에 둔 통에 물이 찰랑거리며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넘칠 것처럼 아슬하게 보였다.
진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지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지나의 뒤에서 뻗어진 손이 수도꼭지를 잠궜다. 끼익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거침없이 쏟아지던 물이 멈췄다.
“같이, 갈래요?”
진우의 목소리가 무겁게 깔렸다. 숨소리조차 뱉을 수 없었다.
지나의 몸이 굳은 걸 느꼈는지 진우가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나 없는 시간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요.”
지나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선 진우와 지나의 시선이 촘촘하게 얽혔다.
“나도 그래.”
진우의 눈이 커졌다.
“그러면 같이.”
“그런데 갈 수 없어.”
당연히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줄 알았던 진우의 얼굴에 실망이 서렸다.
“나에겐 나의 삶이 있어. 널 쫓아갔다가 그곳에서 널 힘들게 할지도 몰라.”
“…….”
“네가 날 기다린 것처럼 나도 널 기다릴게.”
처음에 진우를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진우는 긴 세월 동안 지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 기다렸다. 지나를 만나러 오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는 내 차례야.”
그녀의 말에 진우는 일렁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요.”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시간인지 알기에.
진우는 차마 열지 못한 입술을 느릿하게 달싹거렸다. 그의 괴로운 얼굴이 대신 그의 마음을 전했다.
“나도 기다리고 싶지 않아. 하지만.”
지나는 조금 더 차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 너랑 나.”
“그럼, 부탁이 있어요.”
진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쩐지 묘한 긴장감에 지나는 떨리는 눈동자를 깜빡였다.
“나 없는 동안 우리 집에 있어요.”
예상치 못한 부탁에 지나는 조금 늦게 반응했다.
“응?”
“여기보다, 적어도 보안 하나는 철저하니까. 내가 미국에 있을 동안은 누나를 직접 지켜주지 못하니까.”
그의 부탁은 애절했다.
“그렇게 해 줄래요?”
그의 잘생긴 눈빛이 뚫어져라 지나를 바라봤다. 결국 지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행복한 미소를 지은 진우가 지나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고마워요.”
그가 떠날 걸 알았지만 비참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기에.
지나도 그를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같이 자도 돼요?”
능구렁이 같은 진우의 기습질문에 지나가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안 돼.”
기습공격의 실패를 예감한 듯 진우는 신사답게 순응했다.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간 둘은 계단 어귀에서 헤어졌다.
“잘 자요. 누나.”
요요한 달빛이 흐르는 아래, 진우가 그윽한 눈으로 인사했다. 언제 어디에서도 그는 빛났다. 현실에 있는 그가 가끔 허상으로 느껴질 만큼.
진우와 헤어진 지나는 천천히 돌아왔다. 현관에 새로 단 번호키가 더할 나위 없이 든든했다. 창밖으로부터 시야를 가려주는 블라인드까지. 모두 다 진우의 손길이 닿은 것들이었다.
“자자, 찌누야.”
하얀색 강아지 인형을 품에 안고 지나는 침대에 누웠다. 부드러운 털에서 진우에게서 나는 익숙한 향이 맡아졌다. 덩달아 마음이 편안해졌다. 불안감을 느낄 새도 없이 지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