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 지나간 똥차는 안 탑니다. (41/80)


41 지나간 똥차는 안 탑니다.
2022.12.20.


서진우 전무의 미국 파견 날짜가 정해졌다. 미국시장에 선보이는 신제품 출시일이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지나가 속해 있는 마케팅부서도 바빠졌다. 제품이 나오기 전에 소비자들에게 소개할 대중매체 광고부터 바이럴 마케팅까지 완벽하게 준비해야 했다.


“요즘 들어 계속 야근이네.”

잠시 한숨 돌리며 탕비실에서 커피를 홀짝이는 지혜가 중얼거렸다.


“전무실도 엄청 바쁜 거 같더라. 내 친구가 전무실 비서잖아.”

그 말에 커피잔을 들고 있던 지나가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해봐. 자기 혹시 이 회사의 흑막 아니야? 지금 보니 자기 친구가 없는 부서가 없는 것 같아.”

“아……. 들켜버렸네.”

지나의 말에 지혜가 과장되게 눈썹을 찡그렸다.


“비밀을 알아버렸으니 할 수 없군. 이지나 대리 한직으로 발령을.”

“감사합니다.”

지혜의 장난에 응수하듯 지나가 고개를 조아리자 지혜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직으로 내려가서 푹 쉬겠습니다.”

“앗! 안 돼. 안 돼.”

이제야 한직이 벌이 아닌 상이라는 걸 깨달은 지혜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목까지 내려오는 단발이 찰랑거리자 은은한 향이 퍼졌다.


“오, 향수 뭐 쓰세요.”

“이거 지나가는 남자마다 한 번씩 돌아보게 하는 향이라던데. 어때?”

“그래서 몇 명한테 번호 줬어?”

지나의 질문에 순간 벙찐 얼굴을 한 지혜가 입술을 꽉 물었다.


“이런 게 마케팅이구나.”

“하하하.”

마케팅은 이렇게 해야 하는 구나. 짧은 수다에 숨이 트였다.


“저기요.”

너무 소란스러웠는지 싶어 얼른 입을 다문 지나 앞에 서 있는 여자는 윤주였다. 여전히 화려했지만 어딘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제법 부른 배는 어느 옷을 입어도 소담하게 부푼 티가 났다.


“이 대리님, 잠깐 시간 되세요?”

결혼 전만 해도 뾰족하게 날을 세운 눈빛은 한층 무뎌졌다. 무슨 대화를 할지 안 봐도 뻔했기에 지나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잠깐이면 돼요. 시간 많이 안 빼앗을게요.”

부탁조로 말하는 윤주의 목소리는 처절했다.


“네.”

지혜의 앞이었기에 더욱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다. 지나는 할 수 없이 어색하게 미소를 그렸다. 눈치를 살핀 지혜가 먼저 눈인사를 하며 탕비실을 나갔다.


“도진 씨 이상해요. 결혼 전과 너무 달라졌어요.”

다짜고짜 튀어나온 말은 역시 김도진이었다.


“제가 회장님과 무슨 연관이 있어서 좋아했던 것처럼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니 다른 사람처럼 굴어요.”

지나는 난감했다.


“저에게 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이제 남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남보다 더 못한 사이였다. 같은 사무실 내에서도 일적으로 얼굴 보는 게 싫었다.

그에게 남은 감정은 찌꺼기조차 찾을 수 없었지만 그의 더러운 인간성을 알았기에 철저하게 아닌 척하는 그에 거부감이 일었던 것이다.


“혹시 이 대리님과…….”

윤주는 지나와 도진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지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원래 남자들이 결혼하고 부인이 임신하면 혼란스러워진다는 거 알아요. 밤에도 제가 상대하지 않으니까. 이 대리님하고는 매일 회사에서 만나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윤주 씨.”

더듬으며 말하던 윤주의 목소리가 멈췄다. 지나는 들고 있던 종이컵을 선반 위에 올려놨다.


 


“남편과의 일은 남편과 풀어요. 엄한 사람 붙잡고 의심하지 말고.”

“네? 하지만…….”

“김도진 과장님과 저는 사적으로 다시 만날 일도 없고 만나지도 않아요. 개인적으로 지나간 똥차는 타지 않는 성격이라서요.”

“똥……차요?”

힘이 빠진 표정에 다시금 힘이 들어갔다. 윤주가 부르튼 입술을 꾹 짓씹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 남편을 똥차 취급하는 단어는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함부로 기분 나쁜 추측은 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유부남과 얽히는 건 정말 불쾌하네요.”

지나가 윤주를 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지나를 향해 윤주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동그랗게 말아쥔 주먹을 부들거리며 어딘지 억울한 표정으로 지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태교 잘 하시고요. 그럼.”

빈 종이컵을 구겨 휴지통에 던진 지나가 먼저 탕비실을 나섰다. 윤주는 불행해 보였다. 자신이 김도진과 결혼했다면 저런 삶을 살고 있었을까. 어쩐지 모골이 송연해졌다.

같은 여자로서 윤주가 측은하기도 했지만, 남의 남자를 빼앗은 염치없는 여자였다. 그녀가 감당해야 할 대가라고 생각했다.

한편, 본전도 못 찾은 윤주는 한참 동안이나 탕비실에 서 있었다. 신혼여행 때부터 도진은 완전히 냉랭하게 변했다.

신혼여행지로 손꼽았던 곳도 윤주의 임신을 핑계로 제주도로 다녀왔다. 그것도 분한데, 몸이 안 좋은 윤주가 친정으로 가 있을 동안, 도진은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윤주는 몸이 어느 정도 좋아지자 다시 시댁에 차린 살림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도진에게서 들은 말은 윤주에게 왔냐는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


‘분명 여자가 있어.’

의심병이 생긴 것처럼 윤주는 도진의 주변에 있는 것들을 호시탐탐 파헤치기 시작했다. 도진은 여자친구가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만났다.

지금도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임산부인 윤주의 매력이 떨어지니까……. 더 예쁘고 더 젊고 그런 여직원들에게 눈길이 갈 수도 있었다.

불안한 윤주의 시야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지나였다. 예전보다 더 반짝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불안함은 해일처럼 커졌다. 그러다 도진이 사무실 내에서 흘낏거리며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어쩌면!’

전 여친에게 미안함이라거나 후회가 들었나.

윤주는 그때부터 지나와 도진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기회를 봐 지나에게 말을 한 것이다.


‘도진 씨에게 떨어져.’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지나의 반응에 꺼내지 못했다. 지나는 도진을 똥차라고 생각했다.


‘그럼 나는 똥차 탔다는 거야? 뭐야.’

도진에게 실망한 점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제 남편을 똥차라고 깎아내리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아니면 저렇게 말하고 뒤로는 둘이 만나는 거 아니야?’

사그라진 의심은 다시 피어오르는 불씨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래……. 나에게 일부러 걸리지 않으려고 나쁘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

윤주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앞으로도 주시할 생각이었다. 탕비실을 나서며 도진의 자리를 힐끔 쳐다봤다.

도진은 서류를 보는지 말끔한 얼굴로 집중하고 있었다. 사무실 내에서 공식 부부였지만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는 도진을 향해 사람들은 역시 공과 사는 분명하다며 추켜세웠다.


‘내 속마음은 모르고.’

회사나 집에서나 똑같은 도진의 태도는 윤주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불길이 솟구쳤다. 윤주는 감정을 들킬까봐 고개를 홱 돌리고 제 자리로 걸어갔다.

***

드디어 지나 부모님이 시골로 이사를 떠나는 날이었다.


‘엄마, 내가 도우러 갈게.’

‘아유, 아냐. 너도 쉬어야지. 집 정리 다 끝나면 그때 와.’

엄마의 만류에 지나는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이불들을 몽땅 끄집어냈다. 이사하면서 더러워진 이불이 평상 위에 쌓였다. 구석에 있던 빨간 대야를 가져와 물을 받으며 지나가 허리를 폈다.


“와, 뷰 좋다.”

옥탑방에서 훤히 보이는 도심의 풍경은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었다. 한참 빨래에 집중하는데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어, 지나 씨.”

주인아저씨가 비닐봉지를 들고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이불 빨래해?”

“네.”

이불이 담긴 빨간 대야를 보며 묻는 아저씨는 한자리에 서서 계속 지나를 바라봤다. 마치 구경이라도 하는 듯한 시선에 지나는 할 수 없이 아저씨에게 물었다.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어?”

지나의 물음에 아저씨는 어딘지 게슴츠레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아이스크림 좋아해? 사다 보니 많이 사서 말이야.”

검정 비닐봉지의 정체는 아이스크림이었다.


“보시다시피 이불 빨래하느라 지금은 먹기 좀 그래요.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거절한 지나는 고개를 내렸다. 부글부글 거품이 대야에 가득 차올랐다.


“왜.”

방금 전과 완전히 다른 목소리에 지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왜 못 먹어. 먹고 빨래하면 되잖아.”

방금 전보다 더 가까이 다가온 아저씨가 어딘지 살벌하게 웃었다. 미소 띤 입과는 달리 눈을 한결 음산하게 굳어 있었다.


“그…….”

더운 여름임에도 등줄기에 소름이 일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지나는 잠시 헛숨을 들이켰다.


“아……. 그게…….”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얼음처럼 굳어 있는 지나를 향해 아저씨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지나 씨는 사람이 참 밝고 예뻐.”

아저씨의 목소리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예쁘다는 말이 더럽고 징그럽게 느껴진다는 걸 처음 느꼈다.


“그, 그럼 두 개 주시겠어요?”

순간적으로 지나가 외쳤다. 그 말에 다가오던 아저씨가 우뚝 멈췄다.


“두 개?”

황당한 얼굴로 되묻자 지나가 얼른 답했다.


“남자친구가 곧 오기로 했거든요. 저만 먹으면 좀 미안하니까 주실 거면 두 개 주세요.”

‘남자친구’라는 단어에 일부러 힘을 주며 지나가 크게 말했다. 아저씨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했다.


“남자친구…….”

불쾌하면서도 화가 난 듯한 얼굴로 아저씨의 주름이 깊이 팼다.


“하긴 남자친구가 있을 수도 있지. 이렇게 이쁜데.”

뭐라고 중얼거리던 말 중에 마지막 말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남자친구 오기 전에 먹으면 되잖아.”

아저씨가 봉지에서 하드 종류인 아이스크림 한 개를 꺼냈다.


“날도 더운데 금방 먹지 뭐.”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아저씨가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이미 녹기 시작했는지 포장지 속 아이스크림이 흐물거리는 듯 보였다.


“아……. 그럼…….”

이제 어쩐담……. 고민하던 지나는 일단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역시나 아이스크림은 녹고 있었다.


“제가 꽝꽝 언 걸 좋아해서 냉동실에 뒀다가 빨래 끝나고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나는 예절 바르게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왜 내가 주는 걸 안 먹어……?”

아저씨는 어딘진 초점 잃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지나에게 묻는 게 아니라 꼭 혼잣말 같았다.


“아, 그게…….”

당황한 지나가 다시금 설명하려 입을 떼려는 순간, 아저씨가 좀 더 크게 말했다.


“왜 내가 주는 건 안 먹어?”

다시금 공포가 엄습했다. 당황한 지나가 숨을 들이켰다.


“지금 날 무시하는 거야?”

한 걸음 더 다가오려던 아저씨의 발에 대야가 부딪혀 물이 출렁거리며 넘쳤다.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를 뻔한 지나가 어금니에 힘을 주며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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