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위험한 내 남자
(42/80)
42 위험한 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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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위험한 내 남자
2022.12.23.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아저씨가 먼저였다.
“아, 차가워!”
넘친 대야의 물에 아저씨 바지가 젖은 것이었다. 화들짝 놀란 아저씨가 뒤로 물러났다. 순간 지나의 머릿속에 뭔가 번뜩였다. 대야 속에 잠긴 긴 호스를 꺼냈다.
“어유, 날씨가 너무 덥네.”
지나가 호스를 공중에 뿌리기 시작했다. 촤아아아- 시원하게 뿌려지는 물줄기에 아저씨는 손을 흔들며 뒤로 멀찍이 뒷걸음질 쳤다.
“아이씨.”
어느 정도 떨어진 아저씨는 물방울이 튄 옷을 신경질적으로 툭툭 치면서도 지나를 바라봤다. 언제까지 그럴 건지 지켜보는 눈빛에 지나는 호수를 여기저기 뿌려대며 어떻게 빠져나갈지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그 순간,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땅에서 불쑥 솟아오른 사람처럼 계단 끝에서 갑자기 나타난 남자, 진우였다.
“어. 어. 네. 네.”
혜성 같은 진우의 등장에 아저씨는 난감한 얼굴로 옷을 툭툭 치며 유유히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자기야!”
반가운 마음에 튀어나온 낯선 단어. 이건 분명 회사에서 지혜가 지나를 즐겨 부르던 단어였는데. 이게 왜 또 이렇게 튀어나오는 건가.
부르자마자 지나의 입이 멈췄다. 하얀 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나타난 진우 또한 잠시 굳은 듯 보였다.
자신을 부른 건지 잠시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지나가 얼른 호스를 대야에 넣어놓고 진우를 태연한 목소리로 다시 불렀다.
“진우야.”
그제야 얼음땡의 주문에서 풀린 듯, 진우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해사한 미소가 내리쬐는 햇빛처럼 빛났다.
“자기야.”
아, 제대로 들었다. 지나의 낭패 어린 얼굴과 달리 진우의 눈빛이 곱게 휘었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팔랑거리는 것 같았다.
“듣기 좋은데 계속 불러주면 안 돼요?”
“어……. 안 돼.”
끝까지 모르쇠 하려는 지나가 대꾸했다.
“왜요?”
그냥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진우가 집요하게 물었다.
“그건……. 그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어.”
“자기.”
뒤에 덧붙이라는 듯, 진우가 말했다.
윽, 창피해.
지나가 붉어진 얼굴로 진우의 시선을 요리조리 피했다.
“나 빨래 중인데 무슨 일이야.”
“도와줄게요. 자기.”
아주 마음먹은 것처럼 진우가 말끝마다 ‘자기’를 꺼냈다. 그렇다면…….
지나도 진우처럼 아예 모르쇠로 나가기로 했다.
“그래. 옷 젖을 각오 해야 해.”
“여기서 벗을까요? 자기?”
윽.
지나는 오소소 돋는 소름을 애써 무시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것도 나쁘진 않네. 어차피 젖을 거니까.”
설마 벗을까 싶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들다 셔츠 단추를 반 정도 풀고 있는 진우를 발견하고 말았다. 지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자기가 벗으라면서요.”
진우가 싱긋 웃으며 발간 입술을 휘었다. 수분을 머금은 듯한 진우의 입술이 유난히 촉촉해 보였다.
당황한 지나는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진우의 눈빛에 단단히 얽힌 기분이었다. ‘자기’라는 단어가 지나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든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드디어 끝까지 단추가 끌리자 셔츠가 느리게 벌어졌다. 그의 보기 좋은 복근이 드러났다.
단단하면서도 적당히 부푼 근육은 탐스러워 보였다. 언젠가 그의 집에서 봤던 기억이 났다. 처음이 아니었지만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지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바보야! 바지가 젖는다고…….”
핀잔하듯 말하던 지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바짓단을 접는 진우의 단단하게 여문 등 근육이 햇살에 반지르르 빛났다.
“하…….”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지나는 피어오르는 욕망을 애써 흩었다. 마치 만져보라는 듯이 찰흙으로 아름답게 빚은 조각상 같았다.
“바보란 말도 좋네요. 자기.”
이윽고 양쪽 바짓단을 꼼꼼하게 접어 올린 진우가 느긋하게 미소지었다.
“그럼 빨래를 한번 해볼까요.”
어디서 본 건 있는 건지 방법을 묻지도 않은 진우가 대야 속으로 성큼 들어왔다. 보글거리며 이는 거품이 흔들림에 비눗방울이 되어 공기 중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이렇게 하면 되나요? 자기.”
잊지도 않고 꼭 덧붙이는 단어에 지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알았어. 한번 노력해볼게. 지금 당장은 못 해도.”
결국 그녀의 항복에 진우가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자기.”
아무리 들어도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티브이에서 보니까 이런 거 둘이서 같이 하면 더 빨리 잘 되는 것 같던데요.”
능청스레 진우가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어?”
“같이 할래요?”
그의 말에 지나의 얼굴이 확 뜨겁게 달아올랐다. 콩콩 뛰던 심장은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뛰었다. 아마 심장으로 이불을 두들겨도 빨래가 잘 될 것 같았다.
“응.”
짧은 바지를 입은 지나는 따로 바짓단을 걷을 필요 없었다. 진우의 내민 손을 잡고 대야로 풍덩 들어갔다.
“좀 좁네…….”
코끝이 맞닿을 만큼 밀착해버렸다. 진우가 자연스레 지나를 품에 안은 꼴이 되어버렸다.
“이래서 빨래가 될까……?”
“힘닿는 데까지 노력해볼게요.”
지나를 내려다보는 진우가 상큼하게 말했다. 목소리와는 달리 진우의 눈동자는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눈빛이 닿자마자 심장이 더 빠르게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소리를 들킬라, 놀란 지나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으아!”
대야에 발이 툭 걸린 지나가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갈 것처럼 비틀거렸다. 다행히 진우가 지나의 허리를 얼른 잡았다.
“헉.”
지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방금 전보다 훨씬 가깝게 밀착해버렸다. 진우의 맨 가슴에 안긴 지나는 하마터면 숨을 멈출 뻔했다.
탐스러운 근육에 얼굴을 비빈 것이었다. 아찔함에 눈을 감았다 떴지만 여전히 살색향연은 그대로였다.
“얼굴이 조금 뜨거운데……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지나의 정수리에 내려왔다. 지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햇빛에 벌겋게 익었다고 둘러대면 들키려나, 그 와중에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괘, 괜찮아.”
“더운 날씨에 무리했나봐요.”
네가 옷을 벗는 바람에 무리했어.
더 이상 만질만질한 진우의 맨 가슴팍에 안겨 있을 수 없는 지나가 서둘러 고개를 푹 숙이고는 대야를 빠져나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의 온도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얼굴이 진짜 빨간데요?”
진우의 시선이 얼굴에 닿자마자 지나가 두 뺨을 손으로 감쌌다. 손으로도 열감이 확실히 느껴졌다.
“더워서 그래. 더워서.”
이상하게 진우의 드러난 상체에 자꾸만 시선이 미끄러졌다. 손을 부채처럼 흔들며 몸을 돌리던 지나의 발에 뭔가 걸렸다.
“꺄아.”
긴 고무호스가 걸린 지나가 비명과 함께 양팔을 공중에 흔들었다.
대야에 폭 박혀 있던 고무호스가 꿈틀거리며 수면 위로 드러나며 진우를 향해 물줄기를 뿜었다. 다행히 넘어지는 걸 면한 지나가 천천히 진우를 바라봤다.
맙소사…….
물에 젖은 진우의 상체는 마치 완벽한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처럼 보였다.
굴곡진 근육 사이 사이로 물방울이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따라 시선을 따라 내리던 지나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꼴깍 넘겼다.
바지까지 푹 젖어버린 탓에 하체가 여실히 드러났다. 연한 색감의 바지는 찰싹 달라붙어 원시적인 느낌을 더했다.
“아……. 미안해.”
당혹감에 지나가 눈을 돌리며 사과했다.
“괜찮아요. 시원하네요.”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진우가 청량하게 웃었다. 오늘따라 물에 젖은 진우의 야릇한 모습은 수컷의 체향을 물씬 풍겼다.
위험하다.
“바, 바지가 있으려나…….”
있을 리가.
여자 혼자 사는 집이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지나가 입술을 잘근 물었다.
“근처 옷 가게에라도 가서 바지 사 올게.”
편의점에서 바지를 파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급한 불은 꺼야 했다. 지나의 급한 불은 다름 아닌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있는 심장이었다.
일단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 게 급선무였다.
“옷이라면 갖고 왔어요.”
진우가 그런 지나의 걱정을 가볍게 덜었다. 평상 한쪽에 올려놓은 진우의 가방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혹시 몰라서 제 짐 좀 갖고 왔어요.”
얼마 전 주인아저씨한테 한 말 때문인지…….
“여자 혼자 사는 집에는 남자 짐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요.”
“아…….”
도망갈 기회를 놓쳤다. 지나는 막 잡힌 생선처럼 펄떡이는 심장을 움켜쥐고 싶은 심정이었다.
억지로 안도하는 미소를 짓는 지나의 얼굴은 어색했다.
“이불 빨래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누나 아무래도 몸이 안 좋은 거 같은데 들어가서 쉬어요.”
진우의 배려가 고마웠다. 지나는 덥석 받았다.
“응. 알았어. 역시 괜히 했나 봐. 나 조금만 쉴게.”
토마토처럼 발갛게 익은 얼굴로 지나가 서둘러 현관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진우와 떨어져서인지, 아니면 실내로 들어와서인지 한결 얼굴이 식었다. 지나는 뺨을 연신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진우의 촉촉하게 젖은 몸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진짜 미쳤나봐.”
여태 티브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웬만한 연예인의 몸을 봐도 열이 오르는 기분은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춘기 소녀처럼 예민하기 짝이 없었다.
“날이 더워서 그래. 날이 더워서…….”
엄한 날씨 탓을 하며 지나는 냉장고 문을 더듬었다. 차가운 물이라도 마시면 정신이 들 것 같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을 마신 지나는 에어컨을 켜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겨우 이불 빨래 하나에 진이 다 빠졌다.
밖에서 철벅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빨래에 진심을 다하는 진우의 모습을 상상하니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고마워. 서진우.’
한 차례 파도가 지나간 듯, 나른해진 지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늘 곁에 있을 거라 생각한 진우가 미국을 간다는 생각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무릎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지나는 우울해지는 기분을 애써 무시했다.
‘아주 가는 것도 아니고……. 자주 연락하면 되지.’
불안해졌다. 예전에 지혜로부터 장거리 연애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대.’
중요한 종교 교리처럼 설파하던 지혜의 말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그럴수록 지나의 눈썹이 점점 찡그려졌다.
‘진우는 다른 남자들과 달라.’
주문처럼 속으로 중얼거린 지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