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열기가 가득한 밤
(43/80)
43 열기가 가득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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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열기가 가득한 밤
2022.12.27.
이불 빨래를 끝낸 진우가 들어왔다. 다행히 하얀 와이셔츠를 걸쳤지만 그의 등장에 시원한 공기는 다시금 더워지는 것 같았다.
“누나, 몸은 좀 어때요?”
고생한 건 본인인데 되려 걱정하는 그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달콤했다.
“응, 괜찮아. 고생했어.”
“저 씻고 올게요.”
당연한 말이 새삼스럽게 들렸다.
“응.”
젖은 셔츠 위로 진우의 두드러진 등근육이 돋보였다. 아무래도 햇빛에 머리가 정말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머리로는 시선을 얼른 떼어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눌어붙은 시선은 마음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욕실 문이 닫히고서야 눈동자가 돌아왔다.
‘진짜 왜 이러지.’
미열이 일어난 듯, 계속해서 열기가 느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가 멈췄다.
조금 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진우가 나타났다. 편안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이었지만 마치 화보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멋있었다.
‘미쳤나봐.’
이제 진우의 어떤 모습이든 다 멋있게 보이는 필터가 눈에 생긴 건지.
지나는 괜히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자꾸 진우 앞에서는 스스로를 잃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얼굴이 빨간데.”
순간 훅 들어온 손이 지나의 이마를 짚었다.
화들짝 놀라며 지나가 뒤로 물러섰다. 지나의 행동에 조금 놀랐는지 진우의 표정이 굳었다.
“진짜 괜찮아.”
“네.”
지나가 일부러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진우도 옅게 미소지었다.
“음……. 누나 부모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리고 싶어요.”
그의 목소리는 퍽 조심스러웠다.
“어?”
조금 갑작스러웠지만 언젠가 닥칠 일이라 은연중에 생각했었는지, 지나는 얼른 표정을 고쳤다.
“응. 그래. 이번에 인사드리자.”
지나의 말에 진우가 한결 풀어진 얼굴로 미소지었다. 의외로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휴.”
그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성급한 건 아니죠?”
진우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언제나 지나를 배려하는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야.”
지나가 천천히 손을 들어 진우의 팔을 토닥거렸다. 그녀의 손길에 팔 근육이 살짝 굳는가 싶더니 이내 달뜬 숨결이 지나의 뺨에 흩어졌다. 곧이어 진우의 길고 매끈한 손이 지나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충분해.”
지나를 바라보는 진우의 눈빛이 매혹적으로 빛났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집요한 시선에 지나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오늘 자고 갈게요.”
통보였다. 목소리와 달리 그의 눈빛은 애절했다. 그러면서도 뜨거운 욕망이 일렁거렸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하기 싫었다. 또한 그의 사랑을 외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지나가 고개를 들어 진우의 입술을 머금었다. 살짝 닿은 입술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심장이 다시금 쿵쿵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상관없었다. 지나의 심장만큼 진우의 심장도 뛰고 있었다. 두 개의 소리가 마치 한 개인 것처럼 함께 뛰고 있었다.
잠시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졌다.
“멈추지 않을 거예요.”
진우가 조금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데일 듯한 눈빛에 지나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응.”
이번에는 진우가 먼저였다. 조금은 거칠게 시작된 입맞춤 사이로 더운 숨결이 촘촘하게 얽혔다.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은 열기가 가득한 밤이었다.
***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도진은 심각했다.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은 미간이 있는 대로 구겨져 있어 예민해 보였다.
“오.”
오빠라는 말을 하려던 윤주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한 템포 쉬고 그녀는 해사하게 웃으며 도진에게 다가왔다.
“도진 씨, 이것 좀 먹어볼래요.”
쟁반 위에 요즘 한참 맛있다는 포도가 놓여 있었다. 윤주의 등장에 도진은 관심 없다는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 안 먹어.”
“포도 진짜 맛있다고 어머님이 오빠 갖다 주라고 하셔서.”
“포도 싫어해.”
단번에 거절하는 도진의 모습에 윤주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밤톨아, 아빠 편식하는 건 닮지 말자.”
도진 들으라는 식으로 배를 쓰다듬는 윤주의 모습에 도진이 이제야 고개를 돌렸다.
“야.”
드디어 돌아온 관심에 기뻐할 새도 없이, 사나운 호칭에 윤주가 움찔 떨었다.
“내 앞에서 좀 가라.”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윤주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사나운 태도에 잔뜩 위축되어 아무 말도 못 하고 빠져나왔다.
주방에 있던 도진 모는 윤주가 쟁반 위 포도를 그대로 들고 나오자, 혀를 찼다.
“포도 좀 먹이라니까.”
짜증스러운 목소리는 어딘지 도진의 것과 비슷했다.
“오빠가 안 먹는대요.”
“남편이 먹기 싫다고 해도 이리저리 꼬셔서 먹여야지.”
어휴, 애가 철이 없어.
도진의 어머니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윤주를 바라봤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도진의 전 여친, 지나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아니, 예쁜 구석이 없었다. 임산부면서도 화사하게 치장하는 꼬락서니 하며, 어디 참한 구석이 없었다. 그렇다고 남편을 성심성의껏 내조하기를 하나, 집안일을 야무지게 잘하기를 하나. 애부터 밴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알겠다.”
좀 더 말하고 싶어도 임산부라는 사실에 참았다. 퉁명스럽게 말한 도진의 어머니가 포도를 도로 냉장고에 넣으려는 순간, 윤주가 포도를 집어먹었다.
“음, 이렇게 맛있는데, 왜 안 먹지?”
냠냠거리며 먹는 윤주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으며 도진의 어머니가 윤주의 손을 찰싹 때렸다.
“그렇게 먹다가는 임신 중 당뇨 온다.”
“어머님, 저 지금 딱 두 알 먹었는데요.”
“포도가 워낙 달아서 안 돼.”
야멸차게 말한 도진의 어머니는 포도를 빼앗듯이 비닐에 넣었다. 윤주가 당황한 얼굴로 시모를 바라봤다.
“어머님, 너무하세요.”
도진이야 무서워서 참지만 시어머니는 아니었다. 윤주가 감정을 실어 말했다.
“네 남편은 안 먹는데 너만 먹는 것도 보기 싫다.”
시어머니 역시 만만치 않았다. 두 여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맞닿았다.
“나중에 밤톨이 낳으면 제가 다 얘기할 거예요. 우리 밤톨이가 먹고 싶은데 할머니가 못 먹게 했다고. ”
“어휴, 머리야.”
지지 않고 말하는 윤주 앞에서 도진어 어머니가 이마를 짚었다.
“넌 시어미한테 고분고분한 적이 없니? 내가 진짜 제 명에 못 산다.”
“어머님이 먼저 먹을 거 갖고 치사하게 구셨잖아요.”
“너 정말 끝까지?”
목소리가 높아지자 도진이 나타났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추리닝 바람에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긴 도진을 보고 윤주와 도진의 어머니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게 있잖아. 어머님이 나 포도 못 먹게 빼앗았어.”
말은 윤주가 더 빨랐다. 당황한 도진의 어머니가 눈을 깜빡이더니 얼른 도진에게 말했다.
“너 줄 포도를 쟤가 다 먹잖니. 먹는 거 보면 돼지가 따로 없다.”
“아우, 시끄러워. 주말에 집에서 편하게 쉬고 싶은데……. 어휴.”
누구의 편을 들 생각은 애당초 없었는지, 도진은 짜증을 있는 대로 부리고는 현관을 나갔다.
쾅 닫히는 문소리에 두 사람의 입이 다물렸다. 움찔 놀라는 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둘은 각자 할 일을 했다. 마치 한두 번이 아닌 것처럼 익숙해 보였다.
한편, 집을 나온 도진은 거리를 하릴없이 헤맸다. 오래전에 끊었던 담배가 생각나 편의점으로 들어간 도진의 귀에 편의점 내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 이번에 K그룹이 미국에서 신제품을 발매한다는 소식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미국 시장을 겨냥해 만든 신제품의 출시일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K그룹은 도진이 일하고 있는 회사였다. 진우가 미국으로 가는 날짜가 가까워지는 건 회사 임직원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가 떠나면…….
‘지나를 다시 만나야지.’
현재 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맡길 생각이었다. 역시 지나가 돕지 않으니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서진우 정도 되는 사람이 지나를 진지하게 만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로열층은 어차피 끼리끼리야. 이지나 너 지금 헛물켜는 거야.’
비참하게 버림받을 지나를 떠올리니 이상하게 가슴 한편이 시큰거리면서도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잔말 말고 나한테 와.’
내가 부장되면 널 모른 척할 것 같아? 도진이 비릿하게 웃었다.
적어도 서진우처럼 버리지는 않아. 자신이 한 짓은 새카맣게 잊었는지 도진은 속으로 킬킬거렸다.
‘오피스 와이프 없는 사람이 없다는데.’
담배 한 갑을 건네받은 도진이 편의점을 나왔다. 꾸물거리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당장 비라도 쏟아질 날씨였지만 도진은 개의치 않았다.
한껏 가라앉은 음울한 분위기가 힘없는 지나의 얼굴과 닮았기 때문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 그였다.
‘너는 웃는 것보다 우는 모습이 더 어울려.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겠지.’
손에 쥔 담배갑을 툭툭 치며 하늘을 훑어본 도진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마음이 급해진 탓에 발걸음도 빨라졌다.
***
창을 꼭꼭 숨긴 블라인드 틈새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그 작은 햇살에 감긴 눈을 찡그린 지나는 이내 눈을 번쩍 떴다. 잠에서 깨자마자 낯선 통증이 느껴져 그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윽…….”
“누나, 일어났어요?”
햇살을 머금은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은 진우가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지나는 밤사이 일이 떠올라버렸다.
“어…….”
이불을 확 뒤집어쓰려던 지나는 이불 아래 상태를 깨닫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얼굴을 붉혔다.
“일어났는데 못 일어나겠어.”
창피함에 웅얼거리는 지나의 말에 진우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불을 당겼다.
“어디 아파요?”
“악! 아니!”
지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이불을 놓치지 않았다.
“그냥 저리 가.”
그제야 지나의 말뜻을 이해한 진우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오므라이스 했어요.”
진우가 앞치마를 두른 이유였다. 푹 잤는데도 일어날 기운조차 없었다. 정작 괴롭힌 사람은 멀쩡하다니 내심 억울했다.
“아, 너무해…….”
이불을 칭칭 감은 지나가 앓는 소리를 내자 진우가 바짝 다가왔다.
“힘들면 여기서 먹여줄까요?”
“아냐.”
침대에서 아기처럼 받아먹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지나는 있는 힘을 다해 침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발을 딛는 순간, 마치 갓 태어나 아기 사슴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를 경험해야 했다. 풀썩 주저앉을 뻔한 걸 간신히 버텼다. 그런 지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진우가 할 수 없다는 듯, 지나를 가볍게 안았다.
“조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