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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까불지 마요 (44/80)


44 까불지 마요
2022.12.30.



 
진우의 말에 지나는 눈만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예의 존대가 아닌 그의 자연스러운 말투에 또다시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기에.


“아…….”

수줍은 듯 어물거리는 지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진우가 지나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 맞췄다.


“역시 침대에 있는게 좋겠어요.”

이번에는 거절할 수 없었다. 여전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허리까지 미미한 둔통이 느껴졌던 탓이었다.

침대에 안착한 지나는 이불을 둘둘 두른 채, 아기새처럼 진우가 주는 오므라이스 몇 숟가락을 받아먹었다.


“맛있어요?”

“응.”

진우의 요리실력에 내심 감탄하던 중이었다.


“점심에는 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오늘 하루, 데이트를 예고하는 그의 말에 지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눈에 한가득 지나를 담은 진우의 동그란 눈동자가 한없이 그윽했다.


“그래.”

“부모님께 드릴 선물도 사고요.”

쇼핑까지 염두에 둔 진우의 말에 지나는 한 번 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사는 김에 양가 부모님 선물 사야겠다.”

“아…….”

살짝 당혹감이 스친 진우의 얼굴은 곧 미소가 그려졌다.


“좋아요.”

곧 준비를 마친 지나와 진우는 옥탑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니 하필 주인아저씨가 앞에 서 있었다.

어제 일이 떠오른 지나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어제 자신을 향한 기이한 눈빛이 떠올랐다. 초점 없는 동공은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그냥 무시할 수는 없어 지나가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지었지만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지나를 내려다보는 진우의 시선에 의아함이 실렸다.


“어. 그래요.”

어제와 달리 아저씨는 인상 좋은 미소를 지었다. 지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곧이어 진우에게 향했다. 크흠, 헛기침을 한 아저씨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곧 진우의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는데 진우가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진우의 물음에 지나는 괜히 뜨끔했지만 태연하게 대답했다.


“응? 아니.”

아직도 그의 끈적한 눈길이 눌어붙은 기분이었지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었으니까.

딸깍, 안전밸트가 채워지는 명쾌한 소리에 안정감이 들었다.


“아무 일도 없어. 왜?”

괜히 진우의 걱정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지나는 최대한 밝은 얼굴로 진우를 바라봤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얘기해요. 이제 누나는.”

훤칠한 이목구비가 창을 관통한 빛에 눈 부셨다. 가만히 지나를 바라보던 진우가 이내 시동을 켜고 기어를 조작했다.


“내 것이기도 하니까요.”

이내 따뜻한 손이 다가와 지나의 손을 잡았다.


“알겠어.”

가슴이 쿵쿵 뛰었다. 손을 부드럽게 그러쥔 그의 손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너도 얘기해 줘.”

지나의 말에 앞을 보던 진우가 설핏 웃었다.


“네.”

함께 있는 것만으로 자꾸만 미소가 지어졌다. 창밖의 푸른 나뭇잎처럼 마음에 생기가 가득했다.

바야흐로 여름이란 계절이 좋아지고 있었다. 한 사람으로 인해.

***



“어서 오십시오.”

단정한 차림새를 한 매니저가 우아하게 인사했다. VVIP만 출입할 수 있다는 은밀한 공간 내부는 고급스러우면서도 쾌적했다. 진우는 익숙한 듯 지나를 이끌고 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웰컴 드링크부터 준비하겠습니다.”

다른 직원이 메뉴를 묻고 사라지자 지나와 진우를 맞이한 매니저가 능숙하게 물었다.


“고객님, 오늘은 어떤 물건이 필요하신가요?”

진우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그사이 지나는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리 봐도 진열된 물건 비슷한 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쇼핑을 하고 주문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부모님들께 드릴 선물인데 혹시 추천하시는 제품이 있나요?”

진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매니저가 카탈로그를 건넸다.


“60대 이상 어르신들께서 좋아하시는 제품들입니다. 말씀하시면 바로 선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진우는 카탈로그를 펼쳐 지나에게 보였다.


“부모님께서 좋아하시는 거로 골라봐요.”

그의 나지막한 말소리에 지나는 이내 카탈로그로 눈을 돌렸다.


“헉.”

순간,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낸 지나가 입을 다물었다. 보통의 일반적인 카탈로그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물건들 같은데 아래 적힌 금액은 지나가 생각하는 것보다 0이 두 개씩이 더 붙어 있었다.


“진우야. 우리 잠깐 나갈까?”

자기도 모르게 진우의 팔을 잡아끌자 진우가 놀란 듯 지나를 바라봤다.


“어디 불편해요?”

고요한 룸이라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매니저 또한 대화내용이 고스란히 들렸다.


“그게…….”

단지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선물들을 가져가면 아마 부담되시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 엄마아빠는 먹을 걸 좋아하셔.”

머리를 굴려 나온 답이었다. 진우는 알겠다는 듯이 카탈로그를 뒤쪽으로 넘겼다.


“여기 식품 종류도 있네요. 혹시 이 중에 좋아하시는 것 있을까요?”

마지못해 다시 시선을 내리자 역시나 지나가 상상도 못 한 숫자들이 즐비해 있었다. 어쩐지 아찔한 기분에 눈을 얼른 돌렸다.


“잘 모르겠네. 엄마아빠 취향이 어떨지…….”

일단 이곳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지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런 지나의 마음을 읽은 듯, 진우가 카탈로그를 탁 소리 나게 덮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알아서 준비할게요.”

“어……. 어?”

깜짝 놀란 듯 묻는 지나를 데리고 진우는 매니저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VIP실을 나섰다. 어딘지 침울해진 지나의 얼굴을 보며 진우가 물었다.


“우리 아이쇼핑할래요?”

그 뒤부터는 평범한 데이트였다. 손을 꼭 붙잡고 백화점 층층이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멋진 옷을 보면 서로에게 대보기도 하고, 귀여운 소품이 있으면 들고 사진을 찍어보기도 했다.


“배고프지 않아요?”

백화점은 자고로 백 바퀴를 돌아야 한다는 지나의 말에 부지런히 돌아다닌 진우가 슬쩍 운을 뗐다.


“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함께 있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진우의 말에 지나는 그제야 출출함을 느꼈다. 그런 지나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지은 진우는 지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진우가 예약한 식당은 도심 속에 있는 고급스러운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감성을 자극하는 세련된 내부 인테리어가 눈길을 끌었다.


“먹고 싶은 거 다 시켜요.”

“살쪄서 안 돼.”

“살 더 쪄야 할 거 같아요. 너무 말랐는데.”

진우의 입에 발린 말에 지나는 싫지 않은 듯, 눈을 흘겼다.


“솔직히 말해봐. 전무 자리에 오른 거 아부로 된 거지?”

진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들켰네요.”

“어쩐지 그럴 거 같더라. 사람 마음을 쏙 빼놓을 때부터 알아봤어.”

“아……. 성공했네요.”

진우가 능청맞게 미소지었다. 그러면서도 지나를 향해 바라보는 눈빛은 아침햇살처럼 부드러웠다.


“쏙 빼놓은 누나 마음 잘 간직할게요.”

지나를 향해 곧은 시선이 뜨거웠다.


“음, 여기 뭐가 맛있어?”

동시에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른 지나는 메뉴판으로 눈을 내렸다.


“제일 맛있는 거로 시킬게요.”

진우가 자연스레 종업원을 불렀다. 그의 우아한 손짓 하나하나에 지나의 볼이 달아올랐다.


“이거…….”

종업원이 가고 나서 지나가 소품매장에서 진우 몰래 산 물건 하나를 수줍게 내밀었다.

하얀색 고양이 인형이 달린 열쇠고리였다.


“자동차 키 홀더야.”

“제 거예요?”

조금 상기된 듯, 진우의 목소리가 살짝 울렸다.


“미국 가서 외롭지 말라고…….”

하얀색을 보고 집에 있는 찌누가 생각나 충동적으로 산 것이었다.


“그냥 보고 귀여워서 샀어.”

머쓱한 표정으로 말하는 지나에게 진우가 눈을 휘며 웃었다.


“고마워요. 계속 갖고 다니면서 누나 생각할게요.”

솜뭉치를 닮은 고양이 인형을 만지작거리는 진우는 귀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고마워요.”

“진짜 별거 아닌데.”

작은 선물에도 감동받은 진우의 모습에 지나는 마음속에 작은 파도가 치듯 따뜻함이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밤하늘의 작은 별조각들이 반짝이며 떨어지는 것도 같았다. 진우와 함께 있는 시간이 모두 소중했다.


“식사 나왔습니다.”

그사이 나온 음식들이 식탁 위에 올려졌다. 상큼한 유자 소스가 뿌려진 샐러드부터 커다란 홍합이 올려진 스파게티와 먹기 좋게 구워진 스테이크는 먹음직스러웠다.

진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테이크 접시를 얼른 제 앞으로 당겨 능숙하게 칼질했다. 조각낸 고깃덩어리는 지나의 앞접시로 올려졌다.


“많이 먹어요.”

진우의 행동, 목소리 하나하나에 사랑이 듬뿍 담겨있었다. 바보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도진과 연애할 때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마음이었다.


“너도 많이 먹어.”

지나가 그를 따라 잘린 고기조각을 쿡 집어 진우의 입에 넣어줬다.


“맛있네요.”

오물거리며 진우가 싱긋 웃었다. 지나 쪽으로 상체를 살짝 기울인 그의 눈빛이 빛났다. 그 빛무리가 지나의 마음에 콕 박혀 들었다.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서 빛났으면.


“오늘도 자고 갈래?”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에 진우의 눈이 살짝 굳었다. 표정과 달리 귀까지 붉어진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지나 앞에서 부끄러움을 탄 적이 없던 그였기에 보다 생경하게 다가왔다.


“누나…….”

목이 잠긴 듯 낮은 목소리가 다소 거칠었다. 언제 붉어졌냐는 듯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지나를 바라봤다.

테이블 위에 달린 조명이 살짝 가려지자 진우의 또렷한 이목구비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래서인지 지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낮아진 명도 때문인지 한결 탁하게 느껴졌다.

강렬한 그의 눈빛이 지나를 옭아매듯 쏟아졌다. 어젯밤에 봤던 눈동자에 고인 열기가 일렁거렸다. 어딘가 잔뜩 참는 듯, 그의 턱 근육이 불끈거리며 경직되었다.

어쩐지 그의 곧은 입매가 비틀린 것처럼 보였다. 아주 잠시 지나를 뜨겁게 쳐다보던 진우가 마른세수를 하더니 피식 웃었다.

처음 보는 낯선 미소에 목덜미가 괜스레 선득해졌다.

이윽고, 지나에게 상체를 기울인 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느릿하게 말했다.


“까불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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