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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결혼할 거니까 (45/80)


45 결혼할 거니까
2023.01.03.



 


“나 많이 참고 있는데…….”

지나의 얼굴에 닿는 그의 숨결이 뜨거웠다. 말을 잊어버린 바보같이 지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영혼마저 속박당한 듯, 우두커니 그의 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누나가 그러면 내가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말아요.”

심해처럼 깊은 눈동자로 지나의 얼굴을 훑으며 진우가 느릿하게 미소지었다.


“알았어.”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지나가 진우를 가볍게 흘기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진우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착하네, 우리 누나.”

폐부까지 차오른 긴장감이 사라졌다. 하지만 진우의 말에 다시금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어둠에 싸인 동네는 손바닥만 한 작은 창에서 새어 나오는 희끄무레한 빛이 전부였다. 혼자였으면 무서울 법도 한 동네가 진우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괜찮았다.

이윽고 계단을 올라온 지나는 비밀번호를 누르러 현관 앞에 섰다. 이제 진우를 보내야 할 시간이었다. 아쉬움에 괜히 미적거리는 순간, 뭔가 발에 밟혔다.


“이게 뭐……. 악!”

죽은 쥐였다. 내 옆에 있던 진우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지나의 손을 붙잡았다.


“저, 저게 왜 여기 있지……?”

숨이 가쁘게 새어 나왔다. 지나의 팔뚝만큼 큰 쥐였다. 진우는 조심스레 지나를 뒤로 보내고 휴대폰 랜턴을 켜서 살폈다. 문 앞에서 죽은 쥐라니……. 누군가의 질 낮은 장난으로 보였다.


“먼저 들어가요. 제가 치울게요.”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이 연신 떨렸다. 그러자 진우가 대신 손을 들어 빠르게 눌렀다.

삐리릭,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가서 쉬고 있어요.”

달래듯 부드럽게 말한 진우에게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는 여전히 떨리는 손을 꼭 맞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마치 발바닥에 들러붙은 것처럼 닿은 감촉이 선명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물컹한 쥐를 밟는 기분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웅크린 채, 지나는 침대를 기댄 상태로 주저앉았다.

밖에는 저벅거리는 진우의 발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 와중에 지나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다. 처음 느끼는 공포에 뒷목이 뻣뻣하게 얼어붙은 것 같았다.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고 진우가 들어왔다.

곧장 화장실로 가 손을 씻은 진우는 서둘러 지나에게 다가갔다.


“많이 놀랐죠…….”

따뜻한 진우의 품을 기다렸다는 듯이 지나가 그에게 안겼다.


“깜짝 놀랐어.”

진우의 체향을 맡자 떨리던 손끝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이제 없어요. 괜찮아요.”

지나를 꼭 안은 진우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따뜻한 손길이 좋아 지나는 좀 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정수리에 내려앉는 포근한 숨결조차 좋았다.


“오늘 자고 가라고 하면 또 까분다고 할 거야?”

지나의 질문에 맞닿은 가슴에서 웃음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럴 리 없잖아요.”

그의 말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지나를 안은 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누날 어떻게 혼자 둬요.”

한결 낮아진 진우의 목소리가 묵직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지나의 놀란 가슴을 꾹꾹 눌러주는 것 같았다.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지나가 작게 속삭이며 고개를 들었다. 지나와 진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윽한 진우의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던 지나가 장난스레 말했다.


“오늘은 손만 잡고 자야 해.”

그러자 진우가 피식 웃었다. 지나를 안고 있던 커다란 그의 손이 곧 그녀의 작은 손을 감쌌다.


“분부대로.”

밤새 꿈을 꿨다. 이사 온 집 문을 열면 죽어 있는 쥐가 나오는 꿈이었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꿈이라 그런지 지나는 계속해서 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 또 다른 문이 끊임없이 나왔다. 끝없는 악몽에 시달리던 지나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누나, 괜찮아요?”

가까이 진우의 얼굴이 보였다. 지나는 진우의 얼굴을 보자 안도감에 맥이 탁 풀렸다.


“응, 괜찮아.”

언제 가져온 건지 옆에 있던 수건을 들어 지나의 얼굴을 닦아줬다. 어둠 속에 얼핏 보이는 그의 눈빛은 한없이 가라앉아있었다.


“진짜 괜찮아요?”

진우가 나직이 물었다.


“응.”

아니.

아직도 심장이 쿵쿵 울렸다. 눈을 감으면 다시 쥐가 가득한 집을 볼 것 같아서.

그럼에도 지나는 진우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정말 괜찮아.”

일부러 미소까지 지어 보인 지나는 얼른 눈을 감았다. 그제야 진우는 손을 들어 지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갈퀴처럼 지나의 머리카락 사이를 스치는 그의 손길이 좋았다.


“더 자요. 누나.”

마치 그의 주문에 걸린 듯, 잠이 쏟아졌다. 가물거리는 눈꺼풀을 내리자마자 지나는 이내 잠이 들었다. 다행히 더 이상의 악몽은 없었다. 그런 그녀를 지키듯 진우는 밤새 뜬눈으로 곁에 있었다.

***

악몽 같은 밤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었다. 지나가 눈을 뜨자 깔끔하게 슈트를 입은 진우가 인사했다.


“잘 잤어요?”

해사하게 웃는 그의 미소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커피를 내리는지 코끝을 간질이는 커피 향까지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설마 지각한 거야?”

잠시 멍한 눈을 비비던 지나는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뇨. 정확하게 칼처럼 맞춰서 일어났어요.”

오랜 시간 직장인으로 살아온 습관이었다. 진우가 손목에 찬 시계를 흘낏 내려다보며 대견스럽게 말했다.

그의 말에 안심이 된 지나는 진우가 건넨 커피를 마시며 서진우의 복장을 살폈다. 어두운 남색이 진우의 흰 얼굴을 더 부각시켰다.


“옷은……?”

지나의 질문에 진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새벽에 잠깐 집에 갔다 왔어요. 옷만 갈아입으러.”

“뭐 하러 다시 왔어. 그냥 거기서 바로 출근하지.”

지나의 말에 진우가 다소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누나 또 깰까봐.”

새벽에 악몽으로 다시 깰까 걱정된다는 말에 지나는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감동받은 얼굴로 진우를 바라봤다.


“잠…… 못 잤어?”

진우를 살피는 지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 때문에 밤을 꼬박 새웠다니, 걱정이 앞섰다.


“사실은.”

말문을 연 진우가 천연덕스럽게 씨익 웃었다.


“누나 곁에서는 잠 잘 못자요.”

“어?”

예상치 못한 소리에 지나의 말문이 막혔다.


“설레서.”

지나의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인 진우가 발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귓불까지 붉어진 지나가 입술을 꽉 물었다.


“그럼, 출근할까요?”

현관에 선 진우의 모습이 당장이라도 촬영장으로 출근해도 손색없이 보였다. 서둘러 준비를 마친 지나는 진우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마주치지 않고 싶은 사람은 어째서 자주 보는 걸까. 일 층에서 주인아저씨가 빗자루를 들고 땅을 쓸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무시할 수 없기에 지나가 건성으로 인사했다. 기척을 느낀 아저씨가 지나를 돌아봤다. 곧이어 진우까지 바라본 아저씨는 대꾸 없이 고개를 휙 돌렸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지나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지나쳤다. 그녀의 뒤로 보다 거칠어진 빗자루 소리가 고막을 긁듯 불쾌하게 들렸다.

***



“회사에 말할까요?”

차 안에서 문득 진우가 나직하게 물었다.


“뭘?”

아무 생각 없이 묻자 진우가 지나를 힐끔 바라보고 미소지었다.


“우리 사이.”

순간, 지나의 표정이 놀란 듯 얼어붙었다. ‘공개연애’라는 네 글자가 머릿속에 큰 글자로 떠올랐다.


“미국에 있을 동안 이상한 놈들이 누나 귀찮게 굴지 못하게.”

농담 식으로 말하는 진우의 표정은 가볍지 않았다. 어쩐지 생각에 잠긴 듯, 진지해 보였다.


“음…….”

“마음 같아서는 대문짝만하게 회사 건물에 광고하고 싶은데…….”

지나는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누군가는 그렇게나 숨기고 싶어했던 연애를, 이 남자는 모두에게 알리고 싶어한다. 비교할 수도 없는 차이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렇게 알렸다가 혹시라도.”

혹시라도…….

비관적인 미래를 말하려던 지나의 말이 멈췄다. 진우가 말을 잘랐기 때문이었다.


“결혼할 거니까요. 누나랑.”

마침 빨간 신호에 걸렸다. 지나를 향해 올곧은 눈으로 응시하는 진우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에 지나는 살짝 벌어진 입술을 얼른 다물었다. 다시금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일단, 오늘은 저기서 내려줘.”

회사 도착하기 한 블록 전 사거리. 차를 세우기 전 진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회사까지 같이 가면 안 돼요?”

안전밸트를 푸는 것으로 지나는 대답을 대신했다. 정해진 수순처럼 도롯가에 차가 멈췄다.

아쉬운 진우를 향해 씩씩하게 손을 흔든 지나는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도로에 마냥 정차할 수 없는 진우의 차는 어느새 저 멀리 사라졌다.

여름의 아침답게 아직 달궈지지 않은 공기가 상쾌했다. 회사가 몰려있는 도심은 이른 아침부터 출근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딱딱한 아스팔트 도보를 걸은 지 어언 5년… 나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지나는 회사 로비에 들어섰다.


“자기!”

산뜻한 투피스를 입은 지혜가 반갑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

지나와 지혜는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이윽고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데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어머, 전무님. 안녕하세요.”

지혜가 놀란 얼굴로 인사했다. 지나는 반가움을 꾹 누르고 최대한 사무적으로 지혜를 따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차분하게 사원들의 인사에 답한 진우는 마지막에 지나에게 눈길을 주고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이상하게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자꾸만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억지로 입술을 꾹 물고 참았다.

함께 오른 엘리베이터 안에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진우의 향이 퍼져 있었다. 그의 향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찌르르 울렸다. 사무실 층에 도착한 지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진우와 눈을 살짝 마주쳤다.

비록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눈빛만으로 충분했다.


“자기, 솔직히 말해봐.”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지혜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대뜸 물었다.


“응?”

“남친 생겼지?”

지나의 속을 샅샅이 살피듯 지혜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도진의 결혼식 때, 진우가 남자친구라 말한 사실은 도진밖에 듣지 못했다. 그 후, 지혜에게 딱히 말할 기회가 없었기에 지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있잖아. 남친.”

뒤에서부터 삐딱한 목소리가 대신 들렸다. 막 출근했는지 도진이 묘한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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