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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같은 냄새 (46/80)


46 같은 냄새
2023.01.06.



 
놀란 지혜의 눈이 커졌다. 어째서 도진이 대신 대답을 하는 건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렀다.


“진짜?”

엉겁결에 지혜가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물었다. 지나의 남친이 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걸 도진이 알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 모양이었다.


“과장님은 어떻게 아세요?”

“이지혜 대리는 내 결혼식장에 안 왔나? 남자친구랑 결혼식장에 같이 왔는데.”

대수롭지 않게 도진이 턱짓했다. 그러더니 이내 그들을 지나쳤다.


“진짜?”

도진의 뒤통수를 어이없는 시선으로 쳐다보던 지나에게 지혜가 재차 물었다.


“나 왜 못 봤지?”

유독 예쁘게 하고 간 지나의 모습은 기억이 났지만 옆에 같이 왔다는 남친은 보지 못했다.


“아…….”

잠시 혼란스러운 지나가 지혜에게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나중에 말해줄게.”

사람들이 몰아닥치는 바쁜 출근 시간을 핑계 삼아 지나가 눈을 찡긋거렸다. 지혜는 어쩔 수 없이 궁금해 죽겠다는 눈으로 썰물에 밀려가듯 자신의 자리로 갔다.


‘김도진 진짜…….’

파티션 너머 도진이 있을법한 자리를 째려보며 지나가 입술을 꾹 물었다. 어쩌면 진우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제 입으로 연애를 밝히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책상 위에 올려둔 지나의 휴대폰이 울렸다.


[누나, 출근 잘했어요?]

단지 문자일 뿐인데도 그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진우의 문자에 지나는 자동으로 입가에 미소를 덧그리며 답문을 하려고 액정을 터치했다. 하지만 다음 문자가 더 빨리 도착했다.


[미국 가는 날짜가 앞당겨졌어요.]

숨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이상하게 심장이 둥둥 뛰었다. 각오를 한 게 무색하게 자꾸만 마음이 무너지려 했다.


[잠깐만 볼 수 있어요?]

진우의 세 번째 문자에 지나는 호흡을 갈무리하며 천천히 답장을 썼다.

[응] 이라고 쓴 지나는 잠시 손가락을 멈추더니 이내 삭제했다.


[아니, 일 끝나고 보자.]

지금 그를 만나면 약한 모습을 보일 것 같았다.

***

퇴근 후, 지나의 집으로 퇴근한 진우는 서슴없이 그녀를 안았다.


“하루종일 보고 싶었어요.”

지나의 정수리 위에 내려앉는 따뜻한 숨결에 지나의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가능하다면 누나와 24시간 함께 있고 싶은데…….”

진우는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의 가슴팍에 안긴 지나가 피식 웃었다.


“미국 갈 준비는 잘 되어 가?”

“네. 사실 준비랄 것도 없어요.”

그의 품에서 시원한 향이 느껴졌다. 진우의 체취와 잘 섞여 맡기 좋았다.


“이번 주말에 부모님 만나 뵈러 가요. 우리.”

더 당겨진 일정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지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번 주말에?”

“네.”

진우가 길게 미소를 지었다.


“사랑해요.”

뜬금없는 그의 고백에 지나의 얼굴이 굳었다. 진우는 다시 한번 지나를 향해 속삭였다.


“사랑해.”

그의 뜨거운 고백에 지나의 온몸이 말랑말랑 녹는 것 같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그의 고백에 반응했다. 쿵쿵 뛰는 소리가 온몸을 울렸다.

상기된 표정으로 지나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잡았다. 발뒤꿈치를 올려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자 진우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의 웃음에 지나가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뜨자 진우의 뜨거운 눈빛이 지나에게 쏟아졌다.


“입술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누나한테 반응해서.”

그의 짓궂은 표정에 지나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큰일 났네. 정말.”

밀도 높은 그의 낮은 목소리가 유난히 섹시하게 들렸다.


“잡아먹어도 돼요?”

어두운 조명 아래 지나의 뺨을 감싼 진우의 손이 뜨거웠다. 온몸을 녹일 듯한 그의 눈빛은 질식시킬 것처럼 형형했다. 지나의 대답은 필요 없는 것처럼 진우가 곧장 고개를 내려 지나의 입술을 머금었다.

서로를 갈구하느라 모로 기울어진 고개는 어딘지 애달팠다. 긴 헤어짐을 모르는 사람처럼 진우와 지나는 서로에게 깊숙이 파고들었다.

***

점심시간에 우르르 쏟아지는 회사원들 속에 섞여 지나와 지혜도 회사 밖으로 나왔다.


“우리 뭐 먹을까?”

지혜는 언제나처럼 먹고 싶은 메뉴들을 신나게 나열하기 시작했다.


“날도 더운데 콩국수 어때?”

“좋아.”

콩국수 식당에 들어가자, 도진과 윤주가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콩국수를 먹고픈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지나는 티 내지 않았다.


“어머, 왜 또 여기에서 만나니.”

지혜가 대신 성질을 부리자 어쩐지 바닥까지 떨어진 기분이 조금 좋아진 것도 같았다.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은 지나와 지혜는 얼른 주문했다.


“이제 신사업 프로젝트 끝나면 연차 다 몰아서 쓸까봐. 너무 피곤해.”

지혜의 귀여운 투정을 듣고 있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살짝 고개를 돌리니 윤주가 지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힐끔거리던 시선이 맞닿자마자 윤주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문득 얼마 전 탕비실에서 도진과 만나는지 캐묻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한숨이 날 정도로 기분이 저조해졌다.


“어디서 들었는데 김 과장님 이직할지도 모른대.”

“이직?”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응, 그때 둘이 대화하는 거 지나가면서 얼핏 들었는데 윤주 씨가 그런 식으로 말했어.”

“이직 잘 되었음 좋겠네.”

자기도 모르게 본심이 나와버렸다. 같은 사무실 내에서 계속해서 얼굴 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윤주가 도진에게 이직을 종용하는 듯했다.

김도진이 이직하고 허윤주가 출산휴가든 뭐든 얻어서 사라지게 된다면, 나의 평온하고 행복한 사무실 라이프를 되찾게 된다. 그러니 누가 먼저든 함께 사라져주길.


“그래서 남자친구가 누군데?”

지혜가 음흉한 눈빛으로 콧김을 내뿜었다.


“이번에도 말 안 하면 나 진짜 삐질 거야.”

“알았어. 나 사실…….”

지나가 입을 열자 지혜가 손을 뺨에 올리고는 침을 꼴깍 넘겼다.


“콩국수 나왔습니다.”

뽀얀 국물에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콩국수가 나왔다.


“완벽한 타이밍이네.”

콩국수를 원망스레 바라보던 지혜가 할 수 없다는 듯이 젓가락을 들었다.


“국수가 불면 안 되니까! 먹고 얘기해줘!”

“알았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한 입 넣자 구수하면서 시원한 콩 맛이 진하게 퍼졌다.

콩국수를 흡입하듯 먹은 두 사람은 부른 배를 두드리며 식당을 나왔다. 지혜와 오랜만에 점심을 같이 먹어서인지 두 사람의 수다는 끝없이 이어졌다.


“아 맞다, 나 며칠 전에 친구들이랑 클럽 갔잖아. 거기서 허윤주 봤다.”

“어?”

지혜의 말에 지나는 깜짝 놀랐다. 임산부가 클럽을……?


“처음에 아닌가 싶었는데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에 확신했지.”

지혜는 주변을 살피는가 싶더니 목소리를 더 낮췄다.


“스트레스가 심한지 하필 우리 옆자리여서 시댁이랑 남편 욕하는 소리가 다 들리더라. 모르긴 몰라도 결혼하고 별로 행복하지 않나봐.”

얼마 전 지나에게 따로 보자고 했던 윤주의 퀭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지혜의 말까지 듣자 모르긴 몰라도 스트레스가 심한 걸 알 수 있었다.


“둘이 죽고 못 살 것 같더만.”

지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자 지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게나 말이야. 회사에서 티를 내지나 말던가. 애인 없는 사람 옆구리를 오벼파더니 쌤통이야.”

지혜의 말에 지나가 작게 웃었다.


“파인 옆구리 어디 좀 보자.”

“옆구리 하도 패서 통장 털어 산 옷들이 안 맞을까봐 열심히 살찌워서 맞추고 있잖아.”

능청스러운 지혜의 말에 다시금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자, 그러면 말해보실까. 남.자.친.구.”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지혜가 이번에는 꼭 듣겠다는 야심 찬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입을 열려는 순간 지나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김도진, 허윤주가 카페에 있었다. 마치 그들의 루트를 따라온 것 같아 짜증이 솟구쳤다.


“우리 다른 카페 갈까?”

결국 지나는 참지 못하고 지혜에게 나가자고 말했다.


“왜? 여기 아인슈페너 맛있단 말야. 옆 카페는 별로야.”

콩국수 집에서 느꼈던 속 시원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잔뜩 구겨진 종이 더미가 가슴에 꽉 뭉친 것 같았다.


“그래서 남자친구 누구냐고.”

지혜의 닦달에 지나는 잠시 입술을 물었다.

도진을 보자, 어쩐지 사내연애는 비밀로 해두는 편이 여러모로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진우는 곧 미국으로 떠난다. 연애 사실을 밝히는 건 진우가 돌아와서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남자친구 아니야. 과장님이 잘못 보신 거야.”

“뭐?”

김이 확 빠지는 표정에 지나가 장난스레 웃었다.


“진짜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지혜가 한 번 더 물었다.


“어……. 내가 남자친구 생기면 당장 자기한테 제일 먼저 말하지.”

“뭐야. 괜히 기대했잖아.”

지혜가 싱겁다는 듯이 웃었다.


“자기,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지혜가 떠나자마자 귓가에 낯익지만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지나 대리.”

도진의 부름에 지나가 표정 하나 없는 사무적인 얼굴로 대답했다.


“네. 과장님.”

“나랑 잠깐 얘기 좀 할까.”

“지금 점심시간이라 업무시간에 하시면 안 될까요.”

부드럽게 돌려차기를 하자 도진이 피식 웃었다.


“사적인 얘기라.”

“아, 사적으로는 과장님과 할 얘기 없는데요.”

딱 잘라 말하는 지나를 잠시 주시하던 도진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자리를 떴다. 마침 화장실에서 윤주가 나와서인지 순순히 사라졌다.


“이지나 대리님.”

아까와는 현저히 다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방금 카페에 막 들어왔는지 진우가 서 있었다.

와락 반가움이 일어 하마터면 뛰어가 안길 뻔했다. 밝은 톤의 슈트를 입은 진우는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거려 보였다. 방금 전까지 지질한 남자를 봐서 더 그런지 몰라도.


“안녕하세요. 전무님.”

화장실에서 나온 지혜가 어느새 다가와 진우에게 살갑게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진우가 미소를 지으며 지혜에게 인사했다. 회사 앞이라지만 우연한 만남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럼, 전 먼저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지혜 앞에서 반가움을 티 낼 수 없었다. 지나는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커피를 받아 떠나는 진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등장으로 밝아졌던 카페 안에 조명이 꺼진 것처럼 어두워진 기분이었다.


“좋았어. 일할 기운이 나네.”

지혜도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심전심, 서로 마주 보고 웃음을 터뜨린 둘은 수다를 떨며 회사 로비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문득 지혜가 입을 열었다.


“자기, 전무님이랑 같은 냄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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