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제가 많이 사랑합니다
(4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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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제가 많이 사랑합니다
2023.01.17.
“누난 내게 한 번도 부족한 적 없던 사람이었어요.”
단 한 번도.
진심을 담아 말하는 진우의 눈빛이 깊었다. 자칫 잘못하면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만큼.
“서진우. 넌 정말 바다 같아.”
지나의 말에 진우가 바다만큼 청량한 미소를 그리며 물었다.
“바다요?”
“그래, 내 마음을 흔드는 바다 같아. 너.”
“…….”
“난 저기 쪽배 신세고.”
지나의 손가락 끝을 따라간 진우의 시선에 작은 고기잡이배가 보였다. 출렁이는 파도에 따라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서진우.”
날 너무 흔들지 마.
이미 네가 아니어도 나는, 나는, 작은 너울에도 휘청거리는 보잘것없는 존재야.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입 안에 맴돌았다.
“잘 갔다 와.”
작은 흔들림에도 버틸 수 있는 내가 되도록 노력해볼게.
“네.”
아쉬움이 가득한 진우가 낮게 대답했다.
어쩐지 그를 돌아볼 용기가 안 났지만 뜨거운 햇살 아래 고개를 돌렸다.
“기다릴 테니까 바람 피우면 안 돼.”
조금 진지한 목소리가 과장되게 흘러나왔다. 스치듯 진심을 말한 지나의 눈동자가 이내 진우의 시선과 맞닿았다.
언제부터 응시하고 있었는지 진우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지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내리쬐는 빛에 그의 밤 갈색 동공이 유독 옅어 보였다.
맞닿은 시선에 진우는 빙긋 웃으며 지나의 머리 위로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을 따라 한 뼘만 한 그늘이 만들어졌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작은 그늘에 어딘지 지나의 마음이 두근거렸다. 차단된 햇살에도 그의 뜨거운 시선에서 여전히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네.”
햇빛을 닮아 이글거리는 진우의 시선과 달리 그의 대답은 담백했다.
“난 누나 말고는 안 보여요. 어떤 여자도.”
코끝이 맞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귓가에 닿는 목소리가 진득하게 고였다. 쉼 없이 철썩거리며 밀려드는 파도 소리 사이에서도 선명했다.
지나는 천천히 그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동시에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
여전히 파도는 발치를 간지럽혔고 머리를 내리쬐는 햇볕은 뜨거웠다. 그와의 키스는 숨이 멎을 만큼 달콤했다.
***
꿈같았던 주말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시금 지독히 딱딱하고 건조한 현실로 돌아온 지나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틈틈이 찾기 시작했다.
진우가 없는 동안 빈 시간을 채우기 위한 것들이었다. 그에게 말했던 대로 성장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다행히 최근 야근을 하면서까지 준비했던 해외 신사업 마케팅 프로젝트는 마감 단계였다. 진우가 미국으로 가면 이제 미국 지사로 넘어가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이번 주말에 부모님께 인사드려요.’
진우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나도 떨리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좋은 인상을 보여드려야 할 텐데…….’
회사 입사 면접 때보다 더 떨렸다. 사랑하는 남자의 가족에게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은 작은 욕심일지도 몰랐다.
그때 부장실에서 큰 소리가 났다. 웬만하면 큰 소리를 내지 않는 부장의 목소리가 포효하듯 울렸다.
사무실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무슨 일인지 판단하기 위해 직원들의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도진이 나왔다. 평소와는 달리 잔뜩 성이 난 표정이었다. 억울하면서도 분한 얼굴로 직원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씩씩거리며 사무실을 나갔다.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도진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지나와 상관없는 남자였다. 지나는 무덤덤한 시선을 모니터로 돌렸다.
“이지나 대리.”
조금 뒤, 부장의 호출에 지나가 얼른 부장실에 들어갔다.
“김도진 과장이 맡았던 프로젝트가 지금 펑크가 났어.”
큰소리가 터진 이유였다. 다소 붉어진 얼굴로 부장이 뒷목을 매만졌다.
“완전히 나를 엿 먹이는 거야. 저 새끼. 후…….”
화가 단단히 난 부장이 말하던 중간에 거칠게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지금 우리 부서 내에서 이거 해결해줄 사람이 이 대리밖에 없어서 그래. 해외 신사업 마케팅도 얼추 끝났으니까, 김 과장 프로젝트 좀 도와줘.”
김도진과 프로젝트를 다시 하라는 말에 지나가 입술을 꽉 물었다.
싫었다. 죽기보다 더.
“저보다는 다른 사람이 더 낫지 않을까요?”
사내비밀연애의 후폭풍을 정통으로 맞는 기분이었다. 애써 티 내지 않는 얼굴로 지나가 묻자, 부장이 손사래를 쳤다.
“믿을 만한 사람이 이 대리뿐이라고.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 연말에 승진이고 인센티브고 이 대리 무조건 밀어줄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도진과 다시금 머리를 맞대고 그의 아래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게 끔찍이도 싫었다.
“인사고과는 걱정하지 마. 응?”
부장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다. 어쨌든 김도진이 싼 똥은 비단 그의 것만이 아니었으니까. 지나가 있는 부서는 물론이고 회사 전체적으로까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진우……. 그가 임원이니 어쩌면 그에게까지 문제가 될지 몰랐다.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지나가 주먹을 꼭 쥐며 간신히 대답했다.
“네.”
“그래. 고마워. 이 대리.”
그제야 부장이 미소를 지었다.
“기간이 좀 빠듯하긴 해. 제안서랑 관련 서류 다 줄 테니까 한번 보고 김 과장이랑 해봐.”
“네, 알겠습니다.”
굳은 얼굴로 부장실을 나온 지나의 얼굴이 무거웠다. 부장의 걱정거리가 자기에게로 옮겨진 탓이었다.
‘최대한 비대면으로 하자.’
지나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얼핏 지혜에게 들었던 말도 떠올랐다.
‘김도진 과장 이직할지도 모른대.’
그가 이직하는 확률은 높았다. 부장에게도 찍힌 그가 이 회사에서 승승장구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조금만 버티면 돼.’
그가 이직하기 전까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부장이 전달해준 서류들이 도착했는지 메일 수신음이 울렸다. 지나는 긴장된 얼굴로 마우스를 클릭했다.
***
“아, 진짜…….”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서 잘 정돈된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도진이 연신 욕을 내뱉었다.
전에 맡았던 프로젝트는 지나에게 빼앗기고 얼마 전 그가 새롭게 맡은 프로젝트에 대해 부장한테 크게 깨졌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그 시작을 가늠해보던 도진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이게 다…… 이지나 때문이잖아.”
엉뚱하게 화살이 날아갔다. 황금 동아줄인 줄 알고 잡았던 허윤주가 알고 보니 썩은 동아줄이었다. 지나의 손을 놓은 건 자신이었지만 헤어지자고 당차게 말한 지나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아직도 왕왕 울렸다.
“가만히 있으면 예뻐해 줄 것을.”
쯧, 혀를 차는 도진은 누군가의 발소리를 듣고 머리를 똑바로 매만졌다.
“안녕하십니까.”
직원 하나가 도진을 향해 가볍게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세면대 거울에 비친 도진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가져야 했다. 그게 김도진의 방식이었다.
***
“결혼?”
오랜만에 찾아온 아들을 향해 서 회장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여느 때처럼 업무보고를 하고 돌아나갈 줄 알았던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이번 주말에 함께 인사드리러 찾아뵙겠습니다.”
서 회장은 못마땅한 눈으로 진우를 바라봤다.
“한국 들어온 지 얼마 안된 거로 아는데, 신분은 확실한 여자냐.”
서 회장의 걸쭉한 목소리에 진우는 하마터면 비웃음을 뻔했다. 제 어머니를 버리고 사랑 운운하며 떠난 비정한 아비였다.
“네. 무엇보다 제가 많이 사랑합니다.”
진우가 흔들림 없는 곧은 눈빛으로 서 회장을 바라봤다. 그런 진우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서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겠다.”
딱히 별말 않는 서 회장의 반응에 진우는 무감한 얼굴로 이내 회장실을 나왔다. 그녀를 홀로 이곳에 두고 가야 하기에 불안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건 서로의 마음뿐이었다.
벌써 다음 주가 출국이었다. 가기 전에 이곳의 일들을 해결하느라 먹는 시간조차 빠듯했다.
그럼에도 진우는 틈틈이 지나를 생각했다. 퇴근하면 그 시간 동안 오롯이 지나만을 바라봤다. 마치 그녀를 온몸에 새기듯, 머리와 마음에 각인하듯, 뜨겁게 안았다.
“김 실장님, 이후 일정은 어떻게 됩니까.”
“한국전자회사 대표님과 약속이 되어있으십니다.”
“가죠.”
속속들이 짜여있는 스케줄을 거침없이 해결하고 빨리 지나를 안고 싶은 생각에 진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김 과장님.”
도진을 직면하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한 번으로 끝낼 생각에 지나는 도진이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그의 앞에 섰다.
“왜.”
무슨 일인지 뻔히 알면서 태연하게 묻는 도진의 눈이 번들거렸다. 능청맞은 눈웃음 속에 알 수 없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부장님께서 과장님의 프로젝트를 도우시라 하셨습니다.”
“아, 이번에도 내 걸 가져가시겠다?”
명백한 비아냥에 지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겨우 이 정도 도발 가지고 화내고 싶지 않았다.
“아닙니다. 필요한 자료가 있으시다면 저에게 알려주세요. 제안서 보완은 이번 주 중으로 마무리해보겠습니다.”
시선을 비켜 내린 지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도진의 입가에 조소가 어려 있었다.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좌우로 흔드는 모양새도 진중함이 없었다.
“그래요. 어디 마음껏 해봐.”
끝까지 비아냥거리는 그의 말에 지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그 와중에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윤주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사실이 터무니없이 우스웠다. 하지만 자신은 이들 부부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자신을 의식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지나는 최대한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지나 대리.”
“이지나 대리.”
“이지나 대리.”
수도 없이 자신을 호출하는 상황에서 지나는 불현듯 기시감이 들었다. 예전에도 분명 이런 일을 겪었던 것 같았는데……. 도진은 아주 사소한 지시에도 지나를 불렀다.
“과장님. 다음부터는 서면상으로 내려주시면 처리해서 보고하겠습니다.”
여전히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지나를 향해 도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과장님께서도 업무를 보시는데 제가 자꾸 방해하는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지금 나 생각해주는 건가?”
도진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순간 지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런 미묘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도진이 다시금 미소를 그렸다.
“그래. 어차피 오늘 정시 퇴근은 물 건너갔으니까 천천히 하지 뭐.”
“네?”
그의 말에 지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눈을 마주친 도진이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왜. 야근하는 데 문제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