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누나 옆은 어디든 좋은데, 난.
(50/80)
50 누나 옆은 어디든 좋은데, 난.
(50/80)
50 누나 옆은 어디든 좋은데, 난.
2023.01.20.
야근은 생각지도 못했다. 퇴근 후, 당연히 진우를 만난다는 생각에…….
당황한 눈동자를 숨길 생각도 못 한 지나를 보며 도진이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프로젝트를 복구하려면 야근은 당연히 기본이지.”
“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나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도진은 길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역시 순해 빠진 바보 같은 지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더없는 충만감이 차올랐다.
“혹시 뭐 퇴근 후에 약속이라도 있나?”
도진의 날카로운 질문에 지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닙니다.”
“그럼, 문제없겠군.”
김도진과 단둘이 남아 야근한다는 게 문제였다. 지나는 빈 주먹을 꽉 쥐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저녁은 뭐 먹고 싶어요?]
때마침 진우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지나보다 훨씬 바쁠 텐데 틈틈이 문자를 보내는 그의 마음이 새삼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 오늘 야근이야.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아.]
그녀의 문자에 금방 답장이 왔다.
[그럼 회사에서 같이 먹을까요?]
문제는 도진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멀리 있는 도진의 눈치를 살핀 지나가 고민했다. 설마 저녁까지 같이 먹자고 하진 않겠지……. 어떻게든 일을 빨리 끝내고 회사를 나가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고민하던 지나는 결국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6시가 되었다. 퇴근 준비를 하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운 가운데 지나는 묵묵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자기, 오늘 야근이야?”
퇴근 준비를 마친 지혜가 다가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응. 일이 생겨서.”
난감한 표정을 짓자 지혜가 눈살을 찌푸렸다.
“월요일부터 웬일이니. 너무 싫다. 수고해.”
“응, 내일 봐.”
썰물이 밀려가듯 사람들이 빠져나간 사무실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오늘 야근이야?”
복도에서 윤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먼저 들어가서 쉬어.”
다정한 도진의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회사에서 사이좋은 부부로 유명한 두 사람이었다.
도대체 윤주가 자신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지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들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칭얼거리던 윤주의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복도를 걸어 다가오는 도진의 발 소리가 빈 사무실에 유난히 크게 들렸다.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지나는 일부러 마우스를 잡은 손에 힘을 쥔 채, 모니터를 노려봤다.
“지나야.”
사무실에 들어온 도진의 부름은 더없이 친근했다.
“과장님. 여기 제안서에 들어갈 자료만 첨부하면 될까요?”
사무적인 말투로 지나가 되묻자 주머니에 손을 꽂은 도진이 피식 웃었다.
“너랑 이렇게 있으니까 예전 생각난다.”
자기 할 말만 지껄이는 도진을 향해 지나가 고개를 돌렸다.
“일단 제가 오늘 할 수 있는 만큼 해놓겠습니다.”
또박또박 다부지게 말하는 지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도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예쁘냐. 너.”
그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지나가 고개를 다시 휙 돌렸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지나는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해 일을 끝내고 빨리 나갈 생각이었다.
“그래. 뭐…….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도진이 천천히 지나에게 다가왔다. 그를 끝까지 무시하려던 지나는 어쩔 수 없이 반응했다.
“과장님, 업무와 관계없는 말씀은 삼가셨으면 합니다.”
“왜 예전에는 몰랐을까. 네가 이렇게 예쁜걸.”
도진은 그녀의 말은 상관없다는 듯이,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다.
“과장님.”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당장이라도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는 중이었다.
“서진우가 잘 해줘?”
다행히 더 다가오지 않은 도진이 삐딱하게 물었다.
“아, 이제 전무님이지. 호칭이 적응이 안 돼서.”
“제 사생활입니다.”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지나가 냉랭하게 말했다.
“곧 미국 간다는데……. 너 어쩌냐. 외로워서.”
도진이 일부러 빈정거린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지나는 어딘지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리는 걸 느꼈다.
“지나야.”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선 도진이 그녀를 어르듯 부드럽게 불렀다.
“윤주 씨한테 잘 해주세요.”
숨을 토해내듯 지나가 매몰차게 말했다.
“응, 잘해주고 있어.”
태연하게 대답하는 도진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너한테도 잘해주고 싶어서 그래.”
“…….”
그가 자신한테 왜 이러는지 지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회사라지만 단둘이 있는 공간이었다.
그를 자극하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진우를 부르고 싶었지만 곧 진우는 미국으로 떠났다. 이제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내가 널 잊지 못했나 봐. 우습게도.”
자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 다 잊었습니다.”
“아.”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도진이 탁음을 냈다.
“그래, 과거는 잊고 앞으로 새롭게 시작하자.”
충격적인 도진의 말에 지나는 더 이상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오늘 야근은 못 할 것 같습니다. 내일 와서 마저 하겠습니다.”
역시 둘이 있으면 안 됐다. 지나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었다. 순간 도진이 눈을 부라리며 지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은 다 끝내야지.”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의 비열하고도 얄팍한 시선에 지지 않으려는 듯, 지나가 매섭게 그를 노려봤다.
“일을 하게끔 도와주세요. 과장님.”
지나의 말에 도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오늘만 날이 아니지.”
비릿한 목소리에 지나의 등줄기에 소름이 일었다.
“그럼, 수고.”
빙그르르 우아하게 몸을 돌린 도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리로 가 가방을 들었다.
“내일까지 제출하도록.”
어딘지 사악한 눈빛을 번뜩인 도진은 먼저 퇴근했다. 지나에게 악독하게 구는 모습이 지질하기 짝이 없었다. 홀로 남은 지나는 씩씩거리는 호흡을 애써 갈무리하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모멸감과 수치스러움, 분노 등의 감정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도진의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도 결코 그가 원하는 걸 내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이직할 거니까, 조금만 버티면 돼. 조금만.’
마치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지나는 마우스를 마구 흔들었다.
“계십니까.”
그때 누군가 사무실로 모습을 드러냈다. 도진이 돌아온 걸까 싶어 온몸이 굳어버린 지나의 앞에 진우가 나타났다.
“밥 아직이죠?”
진우의 손에 포장된 음식으로 보이는 종이가방이 들려있었다.
“직원 밥도 굶기면서 일 시키는 회사였나.”
장난스레 눈살을 찌푸리는 진우를 보자 지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어? 누나. 왜 울어요. 무슨 일 있어요?”
진우는 황당해하며 지나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이 지나의 등을 토닥거리는데도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무섭고 서러운 상황에서 진우의 등장은 큰 위로가 되었다. 지나는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곧 떠나는 그에게 걱정을 끼칠 수 없었다.
“너무 배고팠거든. 네가 갑자기 오니까 너무 좋아.”
그녀의 칭얼거림에 진우의 굳었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전화할까 하다가 방해될까봐 갑자기 왔는데…….”
그의 따뜻하고 든든한 품에 안긴 지나의 심장은 여전히 쿵쿵 뛰었다.
“하루종일 보고 싶었어.”
지나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진우가 잠시 말을 멈췄다.
“저도요.”
당연한 말이라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에 지나가 옅은 미소를 그렸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진우의 옷깃을 꼭 붙잡은 지나가 속삭였다. 그런 지나를 꼭 껴안은 진우는 어딘지 생각에 잠긴 눈빛이었다.
“밥 먹어요.”
지나 앞에 가져온 음식들을 하나씩 꺼내는 진우의 손길은 세심했다.
“나 때문에 불편하게 저녁 먹어서 어떻게 해.”
“누나 옆은 어디든 좋은데. 난.”
달콤한 말도 서슴없이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할 수 있다면 인턴으로 누나 곁에 더 있고 싶었어요.”
“나도 그래. 하지만.”
도진이 있는 한, 진우 역시 괴롭힘을 당할 것이었다. 자기로 인해 그까지 당하는 건 원치 않았다.
“난 전무님이 더 좋은걸.”
억지로 미소짓는 지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 꺼냈어요. 누나가 좋아하는 거로만 사 왔는데…….”
어느새 책상 위를 가득 메운 음식들은 먹기 좋게 진우가 세팅을 했다. 나무젓가락까지 완벽하게 꺼내 지나에게 쥐여주는 걸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고마워. 잘 먹을게.”
초밥 한 덩이를 입에 넣는 지나에게 진우가 미소지으며 물었다.
“이번 주말에 저와 어디 좀 가요.”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잖아.”
“그 후에요. 저에게 일박 이일만 시간 내주세요.”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뜬 지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와 함께라면 그 어디든 좋아.
“고마워요.”
진우의 따뜻한 미소에 지나가 눈을 휘었다.
***
“오빠, 왔어?”
“선영아.”
회사에서 멀지 않은 어두컴컴한 바에서 도진을 반기는 여자는 회계팀의 선영이었다. 윤주와 결혼 전, 비상계단에서 싸웠던 여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도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많이 기다렸어?”
“쪼오금.”
애교스럽게 손가락을 모아 보이는 선영을 향해 도진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오빠가 오늘 맛있는 거 사줄게. 어디 보자.”
윤주와 머리카락을 붙잡고 싸웠던 이후, 도진은 선영에게 연락해 사정을 설명했다. 선영 역시 도진을 놓치기 아쉬웠던지 그가 결혼 이후에도 그와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빠가 가져오란 건?”
“당근 가져왔지.”
작은 핸드백에서 선영이 유에스비 하나를 꺼내 들었다. 도진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잘했어. 역시 오빠한테 우리 선영이밖에 없어.”
마치 강아지한테 하듯 선영의 머리를 쓰다듬는 도진을 향해 선영이 방긋 웃었다.
“오빠가 잘되면 다 선영이 덕분이야.”
“말로만?”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거리는 선영이에게 도진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
“몸과 마음을 다해 보답해야지.”
그의 말에 선영이 꺄르르 웃었다.
“내가 이래서 오빠를 못 끊어.”
여자 마음을 얼마나 잘 아는지, 어리숙한 남자애들보다 도진은 매력적이었다.
“오늘 밤에도 기대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