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 불행의 전조 (51/80)


51 불행의 전조
2023.01.24.


밤늦게 집에 돌아온 윤주는 중문을 열다 잠시 현관에 기댔다. 제법 무거워진 몸 때문에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퉁퉁 부었다.


“이제 들어오니?”

어둑한 실내 한쪽에서 도진 어머니의 목소리가 홀연히 들렸다.


“어머님, 아직 안 주무셨어요?”

당황한 윤주가 고개를 들었다.


“식구들이 아직 집에 안 들어왔는데 어떻게 잠을 잘 수가 있니.”

냉랭한 어머니의 목소리에 윤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도진 오빠 아직 안 들어왔어요?”

“걔는 바깥 일하느라 바쁘고. 넌 홑몸도 아닌 애가.”

순간 윤주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어머님, 저도 바깥일 해요.”

“아니, 얘가 또 왜 이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도진 어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너야말로 임신부가 이 시간까지 어딜 갔다 온 거야?”

“회사일이요.”

윤주가 대충 둘러대는데,


“도진이가 네 상사 아니니? 걔가 일을 그렇게 무리하게 시켜?”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을 생각인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저 쉴게요.”

꼬장꼬장한 목소리를 듣자니 윤주는 골이 울리는 기분이었다. 윤주는 얼른 신발을 내던지듯 대충 벗고 제 방으로 걸어갔다.


“얘, 너 어른이 얘기하는데 이게 무슨 예의야? 너희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던?”

순간 윤주가 몸을 돌렸다.


“저희 부모님 얘기하지 마세요!”

울컥 솟구친 분노에 윤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도진 어머니가 눈을 부라렸다.


“시어미가 말씀하는데 어디서 또박또박 말대꾸야!”

“어머님이 먼저 시작하셨잖아요. 저희 부모님 얘기는 왜 하시는데요!”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집구석에 들어오는 게, 잘 가르친 거니?”

윤주는 억울했다. 자신이 왜 밤 12시가 다 되어서 들어오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결혼 후, 도진은 거의 매일 밤을 늦게 들어왔다. 도진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건 회사에서가 전부였다. 무슨 일 때문에 늦게 오는지 물어보면 짜증만 부렸다. 윤주는 결혼생활에 점점 회의가 들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클럽을 다시 가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복잡한 생각은 저 멀리 사라졌다. 아쉬운 건 술을 마시지 못하는 거였지만, 클럽 안에 있다는 생각만으로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하지만 클럽 안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컴컴한 길에서 남편의 연락 하나 없는 휴대폰을 확인하면 기분이 더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병에 걸려 곧 돌아가실 거라고 말하던 도진의 말과는 달리 시어머니는 건강해 보였다.

밥도 자신보다 많이 먹고 활동량도 많았다. 그뿐 아니라 매사 윤주의 일에 간섭했다. 특히 도진의 전 여친인 지나를 들먹거리며 비교할 때면 윤주는 눈앞이 핑 도는 기분이었다.

지나와 사귀는 걸 알면서도 도진을 좋아했다. 자신이 여태 사귀어온 거지 같은 남자들에 비하면 도진은 훌륭한 편이었다. 대기업의 과장에 젊은 나이에 오른 남자의 능력과 훤칠한 겉모습과 젠틀한 매너까지.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도진의 행동에 곧 그녀를 버리고 자신에게 올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사랑은 움직이는 거니까. 그런데 저에게 왔다고 생각한 그 사랑마저 또 움직일 거라는 생각도 못 했다.


“그러는 어머님은 아들 참 잘 키우셨네요.”

“뭐?”

윤주의 비아냥거림에 도진 어머니가 눈을 크게 치떴다.


“집구석에 아직 안 들어온 거 보니까 밖에서 다른 여자랑 뒹굴고 있는 거 같은데, 듣자 하니 돌아가신 시아버지도 매일같이 다른 여자랑 뒹구셨다고.”

찰싹.

거친 파열음이 집 안을 흔들었다. 눈앞에 불이 번쩍인 윤주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네가 감히, 어떻게 감히 그딴 소리를 해?”

공중에 올린 팔을 부르르 떨면서 도진 어머니가 잇새로 중얼거렸다. 윤주는 화끈거리는 뺨을 부여잡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두 여자의 거친 숨소리가 공기를 채웠다.


 


“배 속의 애만 아니었으면 우리 도진이 결혼시키지 않았어. 절대.”

그 말을 끝으로 도진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말라버린 눈으로 무감하게 시선을 든 윤주는 제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신혼부부의 뜨거움이 있어야 할 방은 차가웠다. 온기 없는 냉랭한 공기가 윤주를 맞이했다.


“흑…….”

차가운 침대에 주저앉은 윤주가 얼굴을 감쌌다. 온몸의 수분이 마른 건지, 울고 싶은 마음과 달리 눈은 사막의 공기처럼 건조했다. 시어머니에게 맞은 뺨은 여전히 화끈거렸다.


“용서 못 해. 김도진.”

윤주는 눈을 번득였다. 결혼 전, 이미 도진에게 여러 여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 결혼하면 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 역시 그중 하나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결혼한 후였다. 무르기에는 제 배 속에는 도진의 아이가 있었다. 소중한 생명이었다.


“미안해. 아가.”

윤주는 부푼 배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사랑 없는 부모 아래 태어날 아이에게 작게 사죄했다.


“엄마가 네 아빠 힘들게 할 거야. 그렇게 만들고 싶어.”

여전히 눈물은 나지 않았다.

***

도진은 경리인 선영에게서 회사 중요한 정보를 받았다. 회계팀 일까지 함께 맡은 선영은 중요한 장부를 정리했다.

도진이 그녀를 꼬신 것도 언젠가는 그녀를 써먹기 위해서였다. 바로 오늘처럼. 상의 재킷 안에 넣어둔 USB가 든든했다.


“싸가지 없는 새끼. 넌 이제 뒈졌다. 내가 그냥은 안 당해.”

선영과 뜨거운 밤을 보내고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집 앞에 도착한 도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냉랭한 집 안은 사람 하나 없는 것처럼 차가웠다.


“어휴, 아무리 여름이지만 집 안이 더 으슬으슬해. 집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대체.”

짜증스레 어깨를 떨며 주방으로 향한 도진은 냉장고를 열었다.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고 잘 생각이었다. 유리병을 꺼내 잔에 물을 따른 도진은 어딘지 선득한 기운에 잠시 뒤를 돌아봤다.


‘엄마는 잘 주무시고 계시겠지.’

요즘 들어 매일 새벽같이 들어오는 바람에 어머니 얼굴을 본 지 오래됐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윤주 있으니까 외로우시진 않으시겠지.’

단숨에 물을 털어 넣은 도진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윤주가 배가 나오면서 함께 자던 침대는 비좁아졌다. 숙면을 못 한다는 이유로 도진은 잠자리를 분리했다.


‘너도 편하게 자야지.’

도진이 따로 자겠다는 말을 한 날, 윤주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도진을 바라봤다.


‘난 남편이 곁에 있는게 마음이 편해. 몸은 불편할지 몰라도 오빠가 내 곁에 있어줬으면 해.’

‘애한테 안 좋아. 편하게 자.’

윤주의 애원에도 도진은 차갑게 돌아섰다. 그 뒤로 함께 자는 일은 없었다. 도진은 옷방 한쪽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벗은 상의 안쪽 주머니를 한 번 더 확인한 도진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한 지나는 어제 완성한 보고서를 도진에게 전송했다. 사내 공유 파일에 업로드를 한 지나는 기지개를 쭉 켰다. 그녀에게 맡겨진 프로젝트들은 제법 덩치가 컸다.

진우가 인턴으로 있을 때, 장 부장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몰라도 도진이 했던 프로젝트들의 대부분이 지나 손을 거쳤다는 걸 알게 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장 부장이 고작 대리인 자신에게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맡길 리 없었다. 물론 도진이 똑바로 하지 못한 것들이었지만.


“좋은 아침입니다.”

직원들이 속속들이 출근하는 가운데 아직까지 도진과 윤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거의 지각하지 않았던 도진이었기에 지나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국 9시가 넘어서도 도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장 부장이 부장실에서 나왔다.


“김도진 과장 모친상 당했다고 연락 왔습니다. 오늘부터 김 과장이랑 허윤주 사원이랑 출근 못 합니다. 업무에 참고하세요.”

잠시 술렁이던 사무실은 이내 타닥타닥 키보드 치는 소리만 들렸다. 회사홈페이지 경조사 게시판에 김도진, 허윤주 직원의 부고 소식이 곧 올라왔다.

모니터를 가만히 바라보는 지나의 눈동자는 어딘지 복잡했다. 자그마치 오 년의 세월이었다. 도진과 연애하며 도진의 홀어머니를 살뜰하게 챙겼던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도진의 부고 소식은 지나의 마음을 따끔거리게 했다. 잘 아물고 있는 상처를 들쑤시는 것처럼. 도진과 헤어질 때도 그의 어머니가 지나를 붙잡았다. 그때 이미 암투병 중이라고 했는데……. 결국…….


“오늘 저녁에 장례식장 같이 가자.”

언제 다가왔는지 파티션 옆에서 지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어?”

그냥 모른 척해줘도 좋으련만……. 지혜의 빠른 촉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아냐. 그냥 누군가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마음이 안 좋네.”

“음……. 우리 착한 아가씨를 어쩌면 좋을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지혜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장례식장에 가서 고인의 명복을 빌어드리면 그걸로 충분해. 지금부터 이럴 것도 아니고. 누가 보면 김 과장님이랑 돈독한 사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지혜의 말에 지나가 화들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뭐?”

“그러니까, 너무 심각하게 있지 마시라고요. 이지나 대리님. 그럼, 이따 만나.”

지나의 기분을 풀어주려 농을 건넨 지혜가 가볍게 인사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후…….”

투병 생활의 끝에 돌아가신 거겠지.

자신이 더 이상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나는 자꾸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꾹 담고 있는 것처럼.

도진과 윤주의 행복을 바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의 죽음을 바란 적 또한 없었다.

자신을 힘들게 한 만큼, 꼭 그만큼만 힘들기를……. 자신이 바란 소원 아닌 소원이 도진의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건가 싶었다.

지나는 결국 화장실과 탕비실을 오가며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불러온 것이 꼭 자신 같아서.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자꾸만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마지막으로 도진 어머니를 만난 건, 도진의 결혼식 때였다.

도진을 대신해 그의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갔을 때도, 결혼식에서도 도진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지나를 붙잡았다. 도진 어머니의 애절한 목소리가 귓가에 떠올랐다.

어쩌면 자신이 모질게 굴어서일까.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드는 순간, 휴대폰이 우우웅 울렸다.


[잠깐 시간 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