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 누나 생각만 해요. (52/80)


52 누나 생각만 해요.
2023.01.27.



 
진우의 문자였다. 흔들리던 지나의 눈동자가 화면 위에 고정되었다. 그의 문자만으로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응. 어디서 봐?]

[전무실로 잠깐 올래요?]

전무실로? 순간 진우의 할머니를 모시고 갔을 때가 떠올랐다.


[내가 그냥 가도 될까?]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럼요.]

당당하게 대답하는 진우의 문자에 웃음이 살짝 새어 나왔다. 방금 전까지 우울했던 기색은 말끔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냥 가기는 좀…….]

답문을 적어가던 지나는 자신을 부르는 부장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장 부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허겁지겁 부장실로 달려갔더니, 그가 웬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전무님 결재 서류야. 받아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씨익 웃음을 짓는 부장의 얼굴을 보자 진우가 그에게 지시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멍하니 있던 지나가 서류를 건네받자,


“오늘 급한 업무 없으니 천천히 다녀와.”

넉살 좋게 허허, 웃으며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부장답지 않은 행동에 지나가 꾸벅 인사를 하고 부장실을 나왔다.


‘서진우 정말…….’

자신의 생각보다 자신을 더 잘 아는 남자였다. 얇은 서류 봉투를 들고 전무실로 향한 지나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전무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무실이 있는 층에 내리자 긴 복도 끝에 위치한 전무실이 보였다. 그 앞으로 고급스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모습으로 서 있는 비서들은 지나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안내했다.

곧 전무실 안으로 들어선 지나의 앞에 햇살을 찬란히 받은 완벽한 슈트 차림의 진우가 서 있었다. 지나를 보자마자 진우는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아앗.”

그가 근무 중에 그녀를 갑자기 부른 건, 처음이었다.


“무슨 일 있어?”

진우의 단단한 품에 안긴 지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누나가 보고 싶어서요.”

진우가 한숨을 내쉬며 작게 속삭였다. 그의 따뜻한 숨결이 지나의 정수리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것만으로 지나의 쿵쿵 뛰는 심장이 안정을 찾았다. 불안함에 숨이 멎을 것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불러내 안아주는 그였다.


“어떻게 알았어?”

조금 뒤, 품에서 고개를 든 지나가 묻자 진우가 따뜻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네 품이 필요했다는 거.”

조금 수줍은 듯 지나가 말하자 진우가 잘생긴 입술에 미소를 덧그렸다.


“누나에 관해서는 다 알고 있어요. 누나가 뭐가 필요한지. 지금 뭘 원하는지도.”

“와…….”

당연히 부풀려진 말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그의 그런 말에도 못내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진우에게 속의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네가 없으면 어쩌지…….’

네가 없이 잘 해낼 수 있을까.


“여기 서류요. 전무님.”

지나는 애써 제 마음을 모른 척하며 부장이 건넨 서류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이 대리님.”

여전히 품 안에 갇혀 있기에 서류는 둘 사이에 꼭 끼어 있었다. 진우는 대답과 동시에 지나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부고가 있더라고요.”

조금 뒤, 진우가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김도진 과장의 부고가 회사 게시판에 떴으니 전무인 그도 당연히 알 수 있었다.


“으응.”

“이따 같이 갈까요?”

진우의 조심스레 물었다.


“전무님이 장례식장에 직접 오신 적은 없었는데…….”

“결혼식장에도 간 걸요.”

그렇긴 했다.

화환이나 부조금 정도만 보내도 되는 위치였다. 하지만 전무에 오르기 전, 진우가 그와 같은 팀으로 짧게 있던 시간이 있었던 것 때문일까.


“누나 때문에 간 거예요.”

지나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진우는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가볍게 웃었다.


“장례식장에 네가 오면…….”

모두가 다 알게 되겠지. 둘의 사이가 단순한 사내 상사와 부하의 관계가 아니란 걸.


“다들 부담스러워할지도 몰라. 너도 그렇잖아. 직원들의 경조사에 매번 참석할 수 없잖아.”

“…….”

지나가 살짝 뒷걸음질 쳤다. 그의 품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그녀를 진우는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난 우리 팀원들이랑 같이 갈 거야. 그게 자연스러워.”

“누나가 부담스러우면 같이 안 갈게요.”

진우가 입술을 천천히 뗐다. 그게 꼭 지나의 정곡을 찌른 것처럼 지나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넌 어차피 미국으로 떠나니까, 분명 나중에 어느 직원의 경조사는 가고 안 갔다는 소문이 돌 거야.”

핑계였다. 그를 위한 마음보다 지나는 그와 자신의 관계가 드러나는 게 두려웠다.

지금 도진과 한 사무실에서 계속 얼굴을 보는 것도 버거웠다. 다시금 지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보다 못한 진우가 다시 한 발자국 다가왔다.


“내 생각은 하지 말아요.”

손을 뻗은 진우는 지나를 부드럽게 안았다. 그의 손길과 달리 눈동자는 어딘지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늘 온기를 품고 있던 연한 고동색 동공이 어두워 보였다.


“누나 생각만 해요.”

내 생각……. 지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고른 숨소리는 미세하게 거칠어졌다. 내 생각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부고 소식은 지나의 생각을 자꾸만 멈추게 만들었다.


“하고 있어. 내 생각.”

지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금 진우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러니까 너도 네 생각해서 행동해. 이만 가볼게.”

고작 서류 전달 하나로 전무실에 오래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는 진우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전무실을 빠져나왔다.

꼿꼿한 자세로 지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비서들의 시선이 무서웠다.

어쩌면 자신과 진우의 사이를 알아차린 게 아닐까. 그리고 진우가 미국으로 가버리면 사내 연애의 비참한 최후라며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건 아닐까.

잊고 있던 아픔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저 좋은 생각만 하기에는 지나의 상처가 컸다. 김도진이 남긴 멍자국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있었다. 지나는 허겁지겁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전무실에서 멀어지려는 듯이.

***

장례식장은 최신식이었다. K그룹 산하 병원의 장례식장으로 서울에 있는 곳 중 가장 깔끔하고 좋았다. 검은 상복을 입고 침울한 표정으로 빈소에 서 있는 도진과 윤주의 모습을 보자 지나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직원들과 함께 빈소 앞에 선 지나는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흰 국화 더미 가운데에 놓인 영정사진은 얼마 전 결혼식에서 찍은 사진처럼 보였다. 인자한 미소를 지니고 있는 도진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지나는 다시금 가슴 깊이 묵직한 돌덩이를 느꼈다.


‘자신이 그렇게 모질게 하지 않았어도 조금 더 사시지 않으셨을까.’

수척한 얼굴의 윤주를 보자 지나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봉긋 나온 배 속의 손주를 기다리셨을 텐데……. 가족의 불행이 순전히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어쩐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인께서 어떻게…….”

절을 마치고 상주 앞에 선 장 부장이 슬쩍 물었다. 부장 뒤로 줄줄이 선 직원들은 눈치 없는 장 부장의 흰 양말만 바라보고 있었다.


“주무시다가 심장이 멈추신 거 같아요. 급성심근경색이라고 의사가 말하더라고요.”

“아이고. 저런.”

안타까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결혼식에서 뵈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야…….”

“예. 지병도 있으셔서 늘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바쁘신데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진은 씁쓸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윤주 씨도 힘내고.”

“감사합니다.”

장 부장의 위로에 윤주가 부르튼 입술로 작게 인사했다. 모두들 윤주에게 한 두 마디씩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녀의 수척해진 모습에 다들 안타까워했다.


“어? 지나 씨는 식사 안 해?”

건너편에 준비된 테이블에 앉는 대신 신발을 신는 지나를 향해 누군가 물었다.


“네. 저는 바로 가려고요. 몸이 아까부터 안 좋아서.”

그저 핑계 삼아 한 말이었지만 지나의 안색은 정말 좋지 않았다.


“그래. 안 좋아 보이네. 조심히 들어가고.”

“네.”

직원들과 함께 앉아있는 지혜가 지나를 향해 눈인사를 했다. 자신만 빠져나가는 거라 지나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례식장을 나섰다.


‘지나야, 엄마는 말야. 네가 정말 마음에 든다.’

‘한 입만 더 먹고 가. 응?’

살뜰하게 지나를 챙겼던 도진 어머니의 생전 모습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도진과의 추억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이상하게 도진 어머니와의 기억은 생생했다.


‘저놈이 못된 애는 아닌데 방법을 몰라서 그래.’

도진에게 마음 상한 일이 생기면 대신 그녀를 위로해주던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다정했던 도진 어머니의 모습에 지나는 도진에게도 어머니를 닮은 구석이 있으려니 생각했다. 도진의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고…….

막 장례식장을 나서려는 지나의 팔을 누군가 붙잡았다. 눈물을 훔치던 지나의 시야에 도진이 보였다.


“아까부터 불렀는데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자신을 잡으러 뛰기라도 한 듯, 도진은 밭은 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손이 잡힌 지나는 당황한 얼굴로 손을 뿌리쳤다. 그런 지나의 행동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도진이 물었다.


“밥도 안 먹고 그냥 가게?”

“네.”

사람들이 오가는 장례식장 입구였다. 지나는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대답했다.


“먹고 가지?”

“괜찮습니다.”

“그냥 가면 우리 엄마 섭섭해하신다.”

“……아닐 겁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지나는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음식을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염치없는 것도 유분수지…….


“이만 가보겠습니다.”

지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때 도진의 비죽한 음성이 그녀의 귀를 송곳처럼 찔렀다.


“우리 엄마, 화병 때문에 죽었다더라. 스트레스.”

“지병이 있으셨다고…….”

지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읊조렸다.


“지병이 있으셨지만 굉장히 건강하셨지. 갑자기 이렇게 돌아가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만큼.”

지나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도진의 발소리가 저벅저벅 울렸다.

도진 어머니의 죽음의 이유를 밝히는 도진의 표정은 비통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한껏 움츠러든 지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오히려 흥미로워 보였다.


“너 때문이야. 이지나.”

헉. 순간 지나가 헛숨을 들이마셨다. 도진의 뱀처럼 야비한 눈이 지나를 꿰뚫어 보듯 야살스럽게 휘었다.


“우리 엄마가 죽은 거 너 때문이라고, 이지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