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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폭풍전야 (53/80)


53 폭풍전야
2023.01.31.



“그게 왜 나 때문이죠?”

피가 빠르게 뛰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쉼 없이 요동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도진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머리가 맑아졌다.


‘누나 생각만 해요.’

진우가 했던 말이 또렷하게 울렸다.


“과장님께는 죄송하지만 저랑 상관없는 일입니다.”

지나가 보다 큰 목소리로 말했다. 도진의 비틀어진 입가가 굳었다. 제가 생각한 대로 지나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아서 실망한 기운이 역력했다.


“후……. 너 변했다.”

도진이 한숨을 크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네. 더 이상 전처럼 바보같이 살지 않으려고요.”

지나가 말했다. 더 이상 그가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도진이 또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에 지나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몇 걸음 가기 전, 장례식장 앞으로 차 한 대가 들어왔다. 지나의 앞에 선 차창이 스르르 내려갔다.


“누나.”

진우였다. 깜짝 놀란 지나는 일단 조수석에 올라탔다. 지나를 태운 차는 빠른 속도로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진이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갑자기 어떻게 온 거야?”

갑작스러운 진우의 등장에 지나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운전대를 잡은 진우가 옅은 미소를 그렸다.


“갑자기 누나 생각이 나서?”

“아니, 이 차는 또 뭐고…….”

처음 보는 차였다. 평소 진우가 타고 다니는 차가 아니었기에.


“회사 사람들이 내 차를 알잖아요.”

둘의 사이를 알리기 싫은 지나를 배려해 다른 차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차가 도대체 몇 대야?”

“하……. 누나는 날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요.”

장난스레 진우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이래 봬도 전무인데…….”

“진짜 왜 온 거야?”

지나는 진우의 농에 슬쩍 넘어가지 않을 생각으로 집요하게 물었다.


“김 과장이 신경 쓰여서…….”

전방을 주시하며 태연히 답하는 진우에게 지나는 딱히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고마워.”

도진에게 대차게 말하긴 했지만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여전히 도진은 그녀에게 넘어야 할 산처럼 느껴졌다. 그가 남긴 상처는 속에 그대로 남아 가끔씩 그녀를 괴롭혔다.


“김 과장이 뭐라고 해도 이제 내가 이겨. 이래 봬도 내 남친이 전무인데.”

지나가 진우의 농담을 장난스레 따라 했다. 못 말린다는 듯이 진우가 작게 웃었다.


“장례식은 잘 다녀왔어요?”

진우가 따뜻하게 지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응. 회사 화환도 와 있더라. 다른 부서 직원들은 안 오고 우리 팀만 갔어.”

“고생했어요.”

진우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이제 자신이 직접 챙길 수 없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출국은 다음 주 수요일이었다.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출국일에 진우도, 지나도 말하지 않았지만 어딘지 둘 사이에는 불안감이 고여 있었다.


“집으로 데려다줄게요.”

“응.”

얼마 남지 않은 둘만의 시간이 점점 줄어들수록 둘의 말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소소한 얘기조차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푹 쉬어요.”

지나의 집 앞에 도착해 옥탑방 앞까지 함께 올라온 진우가 인사했다.


“응. 너도.”

기운 없는 얼굴로 겨우 입을 연 지나에게 진우가 말했다.


“같이 잘래요?”

“응?”

갑작스러운 진우의 말에 지나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진우는 더없이 그윽한 눈으로 지나를 내려다봤다.


“꼭 안아주고 싶어서요.”

기운 없어 보인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지만 지나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지나도 그를 원했다.

그의 품에서 잠들면 호랑이 기운도 샘솟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곧 헤어질 시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의 품을 찾을까 두려웠다. 그렇기에 그에게 익숙해지는 걸 서서히 끊어내야 했다.


“다음에. 오늘은 피곤해서 코를 크게 골 것 같아.”

지나가 아쉬운 얼굴로 완곡하게 거절했다. 진우 역시 아쉬운 기색이었다.


“할 수 없죠.”

진우가 팔을 벌려 지나를 꼭 안았다. 그의 품에 꼭 안긴 지나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푹 쉬어요.”

 

 
헤어지기 전, 가볍게 입을 맞춘 진우가 지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체온을 닮은 따뜻한 손길에 지나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옥탑방 안으로 지나가 들어가자 곧 불이 켜졌다.

마치 지나를 바라보듯 어딘가 애틋한 눈으로 잠시 불 켜진 창을 바라보던 진우는 이내 발길을 돌렸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네.”

- 전무님, 김 실장입니다.

“네. 실장님.”

- 알아봤는데, 하나 있는 아들이 도박 빚이 많답니다.

“그렇습니까.”

- 주택 매수를 이대로 진행할까요? 전무님.

운전대를 부드럽게 그러잡은 진우의 긴 손가락이 톡톡, 일정하게 움직였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 웅크린 지나의 빌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보류하세요. 아마 그쪽에서 애가 탈 겁니다.”

- 알겠습니다.

곧 통화가 끊겼다. 진우는 차에 시동을 켰다. 지나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 빌라를 통째로 살 생각이었다.

주인 남자의 음험한 눈빛을 간과하지 않은 진우였다. 처음 이사 올 때부터 수상함을 느끼고 주인 남자의 뒤를 캐본 그였다.

범죄 전과는 있지 않았지만 옥탑방에 이사 왔던 젊은 여자들이 자주 이사를 나갔다는 걸 알았을 때, 진우는 어떻게든 지나를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감히 제 여자를 골리려 하려던 남자는…….


‘합당한 죗값을 치러야겠지.’

액셀을 밟은 진우의 차는 빠른 속도로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

손님들이 거의 없는 새벽 시간의 장례식장. 도진은 테이블 한쪽에 앉아 술잔을 연거푸 들이마셨다.


“그만 마셔. 오빠.”

하루종일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지친 얼굴로 윤주가 다가왔다.


“내버려 둬.”

도진이 차갑게 대꾸하자 윤주가 하얗게 튼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제 오빠에게는 가족이 나밖에 없는데. 이렇게 굴 거야?”

윤주의 말에도 도진은 술잔을 꺾었다.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


“오빠. 손님들이 오실지도 몰라. 술 그만 마셔.”

“현모양처 역할이라면 그만둬.”

도진이 잇새로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뭐?”

“너 말야. 너.”

도진이 고개를 들어 윤주를 노려봤다.


“네가 우리 엄마 죽였잖아.”

도진의 말에 윤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런 무서운 말이 어딨어? 어머님을 내가 죽였다니?”

“클럽이나 쏘다니는 며느리한테 잔소리 좀 했다고……. 시어머니를 죽여?”

다행히 장례식장은 도진과 윤주, 둘 뿐이었다. 도진의 말에 윤주는 입술만 벙긋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술 취했구나.”

“내 주량 알면서.”

반 정도 빈 소주병을 흔들어 보이며 도진은 한쪽 입매를 비틀었다.


“정신이 더없이 멀쩡해. 네가 무슨 속셈으로 개짓거리를 벌였는지도 뻔히 보일 정도로.”

“지, 진짜 사람 몰아가지 마. 내가 얼마나 힘들게 어머니 모셨는지 알면서.”

윤주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 질렀다.


“야, 역겨워. 그만해.”

도진이 매섭게 윤주를 노려봤다.


“밥 한 번을 차린 적이 있어? 네가? 매끼마다 우리 엄마가 차려줬잖아. 설거지는 네가 했냐?”

“하지만 어머니가 하지 말라고…….”

할 말을 잃은 윤주가 말을 얼버무렸다.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냐.”

도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모욕적인 태도에 윤주는 다시금 열을 올렸다.


“왜 사람을 무시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오빠가 자꾸 그러면 이혼할 거야.”

가슴이 미어졌다. 연애 때만 해도 이런 도진의 모습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혼?”

순간 도진의 눈이 선득하게 빛났다. 동시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해. 당장.”

이혼을 원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도진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봐주길. 그가 정신 차리기를 바라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뭐?”

그가 이혼을 바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남자들이 바람을 피운다고 해도 가정을 지킨다는 말을 들었다.


“이혼하자.”

기다려왔다는 듯이 도진이 재차 말했다.


“그래, 진작 하고 싶었는데 잘 됐어.”

“우리 애는……?”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윤주가 가까스로 물었다. 이미 도진과 말다툼을 할 때부터 배가 아팠다.


“오빠 애잖아. 얘는 어떻게 하고……?”

도진이 얼음보다 더 시린 눈으로 윤주를 내려다봤다.


“내 애인 줄 어떻게 알아. 클럽 죽순이 배 속에 있는 걸.”

윤주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점점 배 속의 통증이 심해졌다. 윤주가 배를 부여잡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어떻게? 그럼 나랑 왜 결혼했어?”

“네가 서 회장 쪽 패밀리인 줄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왜 사람을 엿먹여.”

오히려 자신이 당한 것처럼 말하는 도진은 여상하게 눈썹을 올렸다.


“뭐? 아, 아! 배가, 배가 아파!”

마지막까지 기대했던 말은 들을 수 없었다. 도진의 말에 충격받은 윤주의 얼굴이 몰려오는 통증으로 일그러졌다.

뭔가 말하려던 입술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진통이 온 것처럼 배가 찢어져라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악……!”

배를 잡고 뒹구는 윤주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도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시끄럽긴.”

도진은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 들어 119를 불렀다. 고통 속에 신음하는 윤주를 향해 어떤 감정도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신고를 마친 도진은 귀찮은 현장을 피하기라도 하는 듯, 천천히 그 자리를 떠났다.

***

전날 밤, 따귀를 맞은 윤주는 씩씩거리며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도진 어머니 방에서 뭔가 와당탕 넘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순간 놀란 윤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곧이어 끙끙거리는 신음소리가 방문 너머로 희미하게 들렸다. 윤주는 마른 침을 꿀꺽 넘기고 안방으로 향했다.

시어머니가 바닥의 이부자리 위에 모로 누워 있었다. 장롱문이 열려 있는 걸 보니 아마 장롱 위에 있는 걸 꺼내려다 넘어진 것처럼 보였다.


“으…….”

순간 넘어지면서 머릿쪽에 충격을 받은 건지 시어머니가 이상한 소리를 흘렸다. 눈은 뜨고 있는 상태였지만 한눈에 봐도 정상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어머님.”

도진 어머니를 작게 불러보던 윤주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하늘이 자신에게 주는 기회…….


“안녕히 주무세요.”

윤주는 동공이 풀려 있는 어머니를 향해 태연하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마지막에 방문을 꼭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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