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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두 번 다시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55/80)


55 두 번 다시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2023.02.07.



 


“어머니?”

“할머니?”

두 남자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동시에 나왔다.


“어?”

그다음은 지나였다. 회사에서 지나가 전무실까지 안내했던 할머니였다.


“할머니, 여긴 어떻게…….”

벙한 얼굴인 세 사람을 바라보던 강복희 여사는 예사롭지 않은 얼굴로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섰다.


“어머니!”

“서일준 너 보러 온 거 아니다.”

다시금 감격스러운 듯, 외치는 서 회장의 말을 대차게 자른 강 여사는 지나에게 곧바로 다가왔다.


“우리 장손 며느리가 될 줄 알았다. 내가 사람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보지.”

“할머니…….”

지나의 손을 덥썩 잡은 강 여사가 감동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내 새끼랑 결혼해줘서 고마워.”

“감사합니다. 아니, 제가 더 감사드려요.”

지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어머니, 제가 연락할 때 오신다고 하셨으면 사람을 보냈을 텐데, 어떻게 오셨어요? 힘들게.”

서 회장은 방금 전과 다르게 자신의 어머니에게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발이 없니, 손이 없니. 신경 꺼라.”

그에 반해 강 여사는 서 회장에게 매몰차게 대꾸했다.


“할머니, 인사드리러 가려고 했는데…….”

“미국 출장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일일이 늙은이한테까지 올 필요 없지. 시간 많은 내가 오면 되는데.”

손자에게 연신 미소짓는 할머니의 얼굴에 사랑이 넘쳤다. 지나는 서 회장과 진우에게 극과 극인 강 여사의 태도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래, 우리 새끼들 결혼할 때까지 할미가 무조건 버틸 테니 미국 잘 다녀오너라. 그리고 우리 장손 며느리도 그동안 몸조심하고.”

“네. 할머님.”

지나의 손을 꼭 쥔 강 여사의 손은 앙상했지만 아귀힘이 대단했다.


“그럼, 난 이만 갈련다.”

볼일을 다 봤다는 듯, 강 여사가 몸을 돌리자 서 회장이 다시금 제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서운한 목소리가 역력했다.


“시끄럽구나.”

사랑하는 며느리를 버린 아들이었다. 강 여사는 자신의 마지막 부탁에도 며느리를 버리고 새 여자를 들인 아들을 끝까지 용서할 수 없었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어머니.”

서 회장이 벌떡 일어나 강 여사 뒤로 달려갔다. 몇 번이나 어머니께 용서를 구했지만 강 여사는 서 회장을 무시했다.


“시끄러워서 더는 있을 수가 없구나.”

매정한 목소리에서 찬 바람이 불었다.


“죽기 전에 용서해주세요 어머니.”

“내가 죽는 건 신경 쓰지 말거라.”

“저요. 얼마 남지 않았대요.”

순간 강 여사의 걸음이 멈췄다.


“뭐?”

제 귀를 의심하듯, 강 여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 회장을 바라봤다.


“암 말기예요. 어머니.”

“너…….”

강 여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너 기어이 어미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구나.”

“죄송해요. 어머니.”

“네가 어미보다 기어이 앞서가려는 거니?”

쇠꼬챙이처럼 비쩍 마른 강 여사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와 충격이 한데 섞인 듯 그녀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다.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서 회장의 사죄에 거실에 있는 모두가 숙연해졌다.


“네가! 끝까지!”

고함을 지르려던 강 여사가 비틀거렸다. 진우가 얼른 달려와 강 여사를 붙들었다.


“어머님, 용서해주세요.”

서 회장의 옆으로 달려온 그의 아내가 강 여사 앞에 엎드렸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강 여사가 지팡이를 꼭 쥐었다.


“난 당신 같은 며느리 둔 적 없어요. 내 며느리는 진우 어미입니다.”

“죄송합니다.”

엎드린 아들 내외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강 여사가 몸을 돌렸다.


“험한 꼴 보여 미안해요.”

그러면서도 지나에게 깔끔하게 사과까지 했다.


“할머니, 모셔다드릴게요.”

“이 할미 두 다리 튼튼하다. 열심히 걸어야 오래 산다고 하잖니. 돌아와서 보자.”

주름진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강 여사가 사라지고 나자 서 회장은 아들과 지나를 볼 면목이 없는지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민망하긴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서 회장의 아내에게만 인사하고 저택을 나온 진우와 지나는 차에 올라서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많이 놀랐죠?”

서울의 복잡한 도로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진우가 내심 머쓱하게 말했다.


“아니……. 아냐.”

서일준 회장의 아들이라는 부분부터 놀랐지만 이후의 일도 꽤나 충격적인지라 지나는 태연하게 답했다.


“저희집 가정사가 좀 복잡해요.”

“친어머니는 어디 계셔?”

아버지에게만 인사드린 것과 다름없었다.


“어머니는 미국에 계세요. 미국 가서 직접 말씀드리려고요.”

진우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렇구나.”

흔들리는 창 너머 서울을 벗어난 걸 알려주는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크지 않은 소담스러운 산들이 끝없이 펼쳐진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주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잠시 풍경을 감상하던 지나의 질문에 진우가 지나를 바라봤다.


“아름다운 곳.”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진우의 말에 지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나처럼.”

마지막에 덧붙인 말에 지나는 괜히 민망한 얼굴로 시선을 빙글 돌렸다.


“그러고 보니, 네가 미국에 간 게 고2 올라가자마자였나?”

고작 일 년 정도 친하게 지낸 시간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진우를 좋아했던 마음을 부정하려 수많은 노력을 했었다. 학교에서 인기 많았던 그와 평범하기 짝이 없던 자신과의 거리는 서울과 부산보다 더 멀어 보였다.


“네.”

반 박자 늦게 진우가 대답했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처럼 손가락 마디가 툭 불거졌다.


“갑자기 누나와 헤어졌죠. 그때.”

지나가 고2, 진우가 고1일 무렵 여름, 지나에게 고백한 진우는 지나에게 차였다. 그녀의 거절에 진우는 한 발자국 물러나 친한 동생으로 선을 지켰다.

어색해질 만도 했지만…… 진우는 그때마다 노력했다. 그녀가 더 이상 자신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진우는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두 번 다시 누나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그때의 심정이 떠오르는지 진우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도…….’

하마터면 대답할 뻔한 말을 지나는 도로 삼켰다. 3일 후, 진우는 떠난다. 또다시 미국으로.

물론 어떤 연락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때와 지금은 달랐지만, 그와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코앞까지 닥친 현실에 울적해지려는 찰나, 지나의 손을 진우가 부드럽게 잡았다.


“미국 가서도 매일 매일 전화할 거예요. 외롭게 하지 않을게요.”

그의 말에 코끝이 찡 울렸다. 지나는 내색하지 않으려 태연스레 물었다.


“전무님 미국 가셔서 전화만 하시면 일은 언제 하시나요? 회사의 운명이 달렸습니다.”

“그게 제 숨 쉬는 거라서요.”

생각지도 못한 진우의 대답에 지나의 말문이 막혔다.


“하여간, 못 당해.”

지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 왔어요.”

구불거리던 산길을 올라가나 싶더니, 울창한 나무숲이 시작되는 길목에 차가 멈췄다.


“여기?”

문을 열자 도시에서 맡을 수 없는 상쾌한 피톤치드 향이 물씬 풍겼다. 깊은 산속인 걸 증명하듯 주변에는 오로지 나무뿐이었다.


“따라와요.”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낸 진우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양쪽으로 하늘 높이 뻗는 나무 터널이 100미터 정도 이어졌고 그 끝에는 숲과 친화적인 고급스러운 건물이 하나 보였다.


“우리의 숙소입니다.”

아무도 없는지 건물은 고요했다. 오로지 한 채뿐인 건물은 독채라고 하기에 꽤 컸다. 그들이 올 줄 알고 준비되었는지 실내는 무척 깔끔했다. 이 층짜리 건물로 이루어진 건물은 생각보다 방이 많았다.


“엄청 넓다…….”

신기한 듯 여기저기 둘러보는 지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던 진우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최신식 냉장고와 주방기구들은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듯 깨끗했다.


“우와!”

발코니로 연결된 창문을 연 지나가 감탄 어린 소리를 질렀다. 단순한 발코니라고 생각한 곳은 넓은 나무 데크로 꾸며져 있었다.

특히 그 위에 있는 돌로 만든 자쿠지는 이미 채워진 맑은 물로 찰랑댔다. 따뜻한 물인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수면 위에는 꽃잎 몇 장이 둥둥 떠다녔다.


“하하…….”

뒤늦게 지나의 뒤에 선 진우가 당황한 웃음을 터뜨렸다. 지시한 것보다 과한 것 같은 기분에 조금 민망해진 탓이었다. 나무 데크 끝에는 방금 전 봤던 울창한 숲의 풍경이 펼쳐졌다.


“와……. 여기 그런데 아무도 못 들어오는 거야?”

담이 없었다. 혹시라도 외부인이 들어올까 내심 걱정되는 지나가 주변을 살폈다.


“네. 여기 사유지라서요.”

“아……. 사유지. 사유지?”

무심코 진우의 말을 따라 하던 지나가 입을 크게 벌렸다.


“네. 산 자체에 아무나 못 와요.”

태연하게 답하는 진우를 보며 지나가 손가락으로 자신과 진우를 가리켰다.


“우리는……?”

진우가 그런 지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주인은 예외죠.”

헐. 사유지 주인이 너였어? 일반적인 펜션이 아니었다. 지나가 눈을 느리게 껌뻑거렸다.


“그럼, 이 건물도……?”

“네.”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은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오늘 밤에 캠프파이어 할 장작을 가져와야겠네요. 어딘가 뒀을 텐데…….”

나무데크 위로 나간 진우가 갑자기 윗옷을 훌러덩 벗었다. 깜짝 놀란 지나가 몸을 휙 돌렸다. 그러다가 뒤늦게 고개를 살짝 돌려 진우를 살폈다.

베이지색 정장 바지만 입은 진우의 등은 매끈한 근육으로 완벽한 역삼각형을 자랑했다. 과하지 않은 근육으로 햇살이 길게 내리쬐자 음영이 그려졌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근육의 모양이 불룩거렸다.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나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하늘을 채울 듯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청량한 숲 내음 속에 진우의 달콤한 체향이 맡아졌다.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단단하게 뭉친 지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주는 것 같았다. 한쪽에 놓여진 장작들을 모으던 진우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뜨거운 여름날의 온도를 닮은 눈빛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지나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온 세상에 오로지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사랑해. 서진우.”

지나의 입술에서 더는 감출 수 없는 마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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