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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평생 기억에 남을 순간 (57/80)


57 평생 기억에 남을 순간
2023.02.14.


어떤 꾸밈도 없는 담백한 진우의 고백에 지나의 눈가가 홧홧해졌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광활한 우주의 한 별에 살던 어린왕자가,

결국 자신을 만났고, 청혼했다.


“저와 결혼해줘요.”

어쩔 줄 모르는 지나의 이마에 입술을 가볍게 맞춘 진우의 목소리가 애절했다.

지나의 허락을 기다리는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완연했다. 둘만이 있는 듯한 공간에 가득히 퍼지는 그의 잔잔한 목소리가 아름다웠다.


“응.”

지나는 벅차오르는 숨을 토해내듯, 간신히 대답했다. 작게 중얼거린 것 같기도 했다.

그 작은 대답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진우는 이내 세상을 얻은 미소를 그리며 감격스레 지나를 꽉 안았다.


“고마워요. 누나.”

뒤늦게 생각난 것처럼 진우는 곧 지나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맞춘 것처럼 반지는 그녀의 손가락에 딱 맞았다. 지나가 손가락을 쫙 폈다. 하늘에서 뚝 따온 별을 닮은 아름다운 반지가 지나의 가느다란 손가락에서 빛났다.


“너무 예뻐.”

홀린 듯 나온 말에 진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누나가 더 예쁜데.”

달콤한 그의 말에 지나가 웃어버렸다.


“고마워. 진우야.”

이제 네가 없는 세상은 상상도 못 하겠어. 넌 나에게 너무 소중해.


“별 조금 더 볼래요?”

진우의 속삭임은 어딘지 은근했다. 모닥불은 거의 꺼져갔고 산속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불의 열기가 진우에게 옮겨갔는지 피부에 닿는 그의 숨결이 뜨거웠다.


“아니.”

지나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진우가 조금은 급하게 지나에게 입을 맞췄다.

지나가 살짝 고개를 뒤로 물리며 중얼거렸다.


“침실 구경을 아직 못해서…….”

“오늘 밤 잘 생각 말아요.”

진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낮게 으르렁거렸다. 동시에 공주님처럼 번쩍 지나를 안은 진우는 성큼성큼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침실에 들어간 진우가 거칠게 군 것과는 달리 지나를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사랑해. 서진우.”

침대 위에 앉은 지나가 진우의 뺨을 감싸며 먼저 입을 맞췄다. 닿을 듯 말듯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평생 행복하게 해 줄게요.”

진우의 목소리가 아름다운 선율처럼 귓가에 울렸다. 그에 화답하듯 지나의 심장이 둥둥 울렸다. 별이 무수히도 많이 뜬 여름밤의 청혼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

주말이 지난 월요일. 아침부터 꾸물거리는 날씨는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흐렸다. 어쩐지 아침부터 집중을 할 수 없던 지나는 오랜만에 출근한 도진이 자꾸 신경 쓰였다.

프로젝트를 빌미로 계속해서 불러내는 것뿐 아니라, 우연히 눈을 들어 도진을 보면 그의 기분 나쁜 시선과 자꾸 눈이 마주쳤다. 결국, 다섯 번째 불려간 지나는 도진에게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기왕 맞는다면 먼저 맞는 매가 낫다니까.


“아니.”

기껏 용기를 낸 게 무색하게 도진이 가로로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은 이 대리가 있는 것 같은데…….”

슬쩍 떠보는 도진의 말에 지나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차마 기분 나쁜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는 말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없습니다.”

“그나저나 남자친구가 멀리 떠나서 어쩌나.”

전혀 안타깝지 않은 목소리가 지나의 귓가를 자극했다.


“괜찮습니다.”

지극히 덤덤한 어조로 대답한 지나를 향해 도진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그거야 뭐,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일이고.”

일부러 지나를 열 받게 하려는지 도진이 비아냥거렸다. 그가 어떻게 굴던 지나는 동요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 프로젝트 보고서는 지적하신 사항을 전부 수정했습니다.”

“그래.”

정작 프로젝트에는 관심이 없는 듯 도진이 건성으로 대꾸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지나가려는 지나에게 도진이 갑작스레 말했다.


“나 이혼해.”

그의 충격적인 말에 지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네?”

남자로서 연민이나 동정 따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지나의 눈앞에 장례식 때 봤던 윤주의 지친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연달아 그녀의 부푼 배까지 함께.


“윤주 사직서는 부장님께 내가 제출했어.”

당연하다시피 말하는 윤주에 대한 처분을 말하는 도진의 눈에는 조금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갑자기요?”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아이까지 가진 여자였다. 그런데 이렇게 일사천리로 윤주와 이혼하고 윤주는 회사까지 그만둔다니.


“그래.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했잖아.”

펜대를 빙글 돌리는 도진의 미소는 여유로웠다. 마치 제삼자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러면서도 지나의 속을 살피는 듯한 그의 눈빛은 매서웠다.


“심심한 위로를 드립니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지나는 그의 불행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지나야.”

도진은 지나를 놔주지 않았다. 조금은 애달픈 그의 목소리는 딱 그가 지나와 연애를 시작할 때쯤과 닮아 있었다.


“나 너밖에 없어.”

사귈 때 들었다면 매우 낭만적이었을 텐데……. 지나는 답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화가 났다. 그는 아직도 자신을 쥐고 흔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제자리에 머물러있는 지나가 아니었다.

과거에 빠져 힘들어하던 지나도 아니었다. 비어 있는 네 번째 손가락을 바라보던 지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출근하면서 뺀 반지는 가방에 들어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지나는 가방을 열고 반지를 꺼냈다. 반짝거리는 반지는 사무실 형광등에도 영롱하게 빛났다.

결심하듯 반지를 네 번째 손가락에 낀 지나의 표정은 결연했다.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감내할 생각이었다. 더 이상 진우와의 사랑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기, 여기 제안서 말야, 어머, 깜짝이야.”

서류를 들고 다가오던 지혜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뭐야. 이 반지. 어머니가 물려주신……건 아닐 테고. 설마, 설마!”

“프러포즈 반지야.”

지나가 민망한 얼굴로 지혜에게 말했다.


“와……. 대박.”

얼마 전까지 남자친구 없다고 숨긴 이유를 지혜에게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사실은…….”

“자기 잠깐만 이리 와.”

지혜가 지나의 손을 잡고 탕비실로 들어갔다. 마침 탕비실은 아무도 없었다. 지혜는 문을 꼭 닫고 블라인드 너머 바깥을 조심스레 살폈다.


“어떻게 된 거야?”

지혜가 다이아몬드만큼 빛나는 눈으로 물었다.


“그게…….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거든.”

“이번에 프러포즈 받은 거야?”

“응.”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이는 지나의 모습에 지혜가 감동받은 듯 소리 없는 박수를 쳤다.


“축하해. 진짜 잘됐다. 날 잡았어?”

“그건 아직.”

“그래, 아무튼 너무 축하해.”

지혜가 다시금 물개박수를 요란하게 선보였다.


“그런데 오늘도 허윤주 사원 안 보이네. 가족상으로 인한 유급휴가는 끝났을 텐데.”

“그…….”

도진에게 들었던 말을 자기도 모르게 꺼내려던 지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였다. 도진의 말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으니까.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이혼이라니. 게다가 홑몸도 아닌 상황에서.


“임산부라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거겠지? 나 받아야 할 자료 있는데 짜증 나네.”

지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김 과장님한테 말하면 백 퍼센트 커버치겠지.”

“그러게…….”

지나는 작게 맞장구만 쳤다. 더 이상 그와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뿐이었다.


“맞다. 맞다. 남자친구 사진 보여줘봐. 나 너무 궁금해.”

“아, 그게…….”

갑작스러운 지혜의 질문에 당황한 지나가 눈을 굴렸다. 이렇게 공개해도 될까.

이미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순간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지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두려운 한 조각이 남아있었다.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진우에게 불이익이 갈지도 모른다는.


“음……. 사진 보여줄게. 회사 사람이야. 너무 놀라지 마.”

휴대폰을 꺼낸 지나가 화면을 터치했다. 이번 여행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혜에게 보여줬다. 그런데 지혜의 반응이…….


“아, 역시!”

응?

지나가 생각했던 반응과 사뭇 달랐다.


“이럴 줄 알았어. 진짜 잘됐다.”

“알고 있었어? 어떻게?”

뜻밖의 반응에 지혜가 꺼낸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서 전무님이 인턴 끝나는 날 나에게 특별히 부탁했어.”

“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제 전무가 돼서 지나 씨와 떨어지니까 걱정되셨나봐. 사실 자기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나에게 먼저 고백하셨어. 내가 그때 얼마나 자기가 부럽던지.”

지혜는 그에게 기꺼이 둘의 사랑을 도와주겠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 뒤로 자기가 조금이라도 곤란한 일이 있거나 힘들어 보이면 서슴없이 연락하라고 하셔서…….”

지금껏 지나가 혼자 있을 때, 괴로울 때, 진우가 나타났던 이유였다.


“뭐야…….”

그는 어떻게든 자신을 지켜주고 싶어했구나. 말할 수 없는 감동에 코끝이 찡했다.


“만약 지나 씨가 그분을 별로 안 좋아하거나 다른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당연히 그만두려고 했지. 어쨌든 자기 상황을 알려주는 거니까.”

지혜가 잊을 만하면 남자친구 생겼는지 물어보던 이유였다.


“그리고 그분이 나타날 때마다 자기 얼굴이 얼마나 생기가 넘치는지……. 그때 알았지.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은 확실히 다르구나.”

전혀 모르던 이야기였다. 지나는 손을 들어 제 두 뺨을 어루만졌다. 은은한 열감이 느껴졌다.


“진짜 그런 남자가 세상에 있구나, 싶을 정도로……. 전무님 정말 멋지더라.”

“아…….”

“내가 자기네들 사랑의 큐피드야. 잊으면 안 돼.”

지혜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 모습에 지나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축하해. 지켜보는 나는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

“은혜 꼭 갚을게. 자기.”

“거창하게 은혜까지야. 그냥 오늘 점심 자기가 사줘.”

“물론이지.”

그때 탕비실 문이 벌컥 열렸다.


“월급 루팡도 가지가지.”

도진이었다. 지나와 지혜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 탕비실에서 노닥거리는 시간은 월급에서 까야 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도진의 분위기는 꼭 지금 날씨처럼 잔뜩 흐렸다. 얼른 빠져나갈 생각에 인사를 하고 나가는 지나와 지혜의 뒤로 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지나 대리는 나 좀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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