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잔인한 협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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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잔인한 협박
2023.02.17.
방금 본 지 30분도 안 됐는데. 왜?
이해할 수 없는 도진의 호출에 지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거부하고 싶지만 이곳은 회사였다.
엄연히 상사인 도진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지혜가 먼저 가본다는 눈인사를 하고 탕비실을 나갔다. 다시금 탕비실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나가 딱딱한 얼굴로 물었다. 시선은 바닥에 내린 채였다. 예의바름 속에서 물씬 풍겨나는 그녀의 반항적인 태도에 도진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귀엽긴.”
“저 곧 결혼합니다. 자꾸 사적으로 부르시면 사내 성추행으로 고발할 거예요.”
“까부는 것도 작작 해라.”
잔뜩 긴장한 지나와 달리 도진은 여유로웠다.
“성추행 그것도 쉽지 않아. 네가 몰라서 그렇지. 내가 널 손대기라도 했어?”
“……불쾌합니다.”
“불쾌? 뭘 했다고 불쾌야.”
도진이 코웃음 쳤다.
“그거 아깐 못 보던 건데…….”
그때 도진의 예리한 눈빛이 지나의 손가락에 닿았다. 단지 시선만으로도 마치 칼로 베이는 아픔이 느껴졌다.
“청혼받았다고 나한테 시위라도 하는 거야?”
“사적인 대화는 더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지나가 휙 몸을 돌렸다.
“겨우 청혼 갖고 유난은. 보통은 결혼식장 들어서기까지 모른다고 하지 않나?”
“도대체 저한테 뭘 바라는 건가요?”
숨을 헐떡이며 지나가 물었다.
“내가 매번 말했잖아. 돌아오라고.”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집착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결혼식을 올려도 모르는 일이고.”
“저는 김도진 과장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도 그래.”
뜻밖의 대답에 지나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사랑하는 거 같아.”
사랑이란 단어에 소름이 돋았다. 등줄기를 타고 내려간 한기는 지나의 발끝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지나는 애써 그를 외면했다.
“허윤주 씨나 잘 돌봐요.”
“윤주가 우리 엄마 죽였어.”
도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더없이 충격적이었다.
“우리 엄마가 너만큼 윤주가 탐탁지 않으셨나봐. 그래서 윤주와 자꾸 부딪혔는데…….”
“설마요…….”
윤주가 사람을 죽일 법 보이진 않았다.
“임신까지 한 사람이 설마…….”
“걔가 독한 면이 있어. 너랑 사귀는 거 뻔히 알면서도 나한테 들이댄 거 봐.”
“윤주 씨 탓하지 말아요.”
“아, 그래. 걔 탓만 할 생각은 없었어. 어쨌든 우린 다시 만날 수밖에 없어.”
너무나 확신하듯 하는 말에 지나는 말을 잊었다.
“서 전무가 미국으로 가는 이유, 알아?”
“네?”
단지 회사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일 때문이라는 것만 알았다. 지나가 모를 걸 예상한 듯 도진이 입매를 비틀었다.
“회장자리 승계를 위한 밑작업이지. 심지어 K그룹에서 하청을 주는 미국 반도체 업체가 서 전무 거라는 말이 있어.”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상속과 승계에 유리하기 위해 꼼수를 쓴다는 말이야.”
도진이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다시 말하자면 서 전무의 불법과 편법적인 행태에 대해 내가 상세하게 알고 있다는 말이고.”
도진의 말을 이해한 지나가 뒤늦게 입을 벌렸다.
“그럴 리 없어요.”
힘없는 지나의 목소리에 도진은 비열하게 미소지었다.
“선택해. 전무가 무사히 회장 자리에 오르길 바란다면 다시 나한테 오던가. 꼼수가 발각되어 징계받고 감옥 가는 꼴을 보던가.”
아침부터 불길하게 느껴졌던 그의 눈빛은 바로 이것이었다. 얼빠진 지나를 비릿하게 바라보며 도진이 한 걸음 다가왔다.
“네 선택에 달렸어. 이지나.”
그의 야비한 목소리가 지나의 목을 조였다.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는 건데요…….”
이유? 도진이 피식 웃었다.
“글쎄. 사랑이려나?”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도진의 목소리에 기어이 지나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순간 탕비실 문이 열렸다. 무심결에 들어오던 직원 하나가 어딘지 심상찮은 분위기를 목격하고 당황했다.
“아, 대화 중이신 걸 몰랐어요.”
“아냐. 들어와도 돼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도진이 깔끔하게 미소지었다.
“그럼, 잘 생각해봐요. 이지나 대리. 삼일 뒤에 답 주세요.”
사무적인 어조로 지나에게 말한 도진이 먼저 탕비실을 나갔다. 충격에 빠진 지나는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많이 혼나셨나봐요.”
지나의 눈치를 보며 눈치를 보는 직원이 조심스레 위로를 전했다. 아마도 프로젝트 상으로 혼난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네…….”
지나는 어색한 얼굴로 대답하고 탕비실을 빠져나왔다.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지금 당장 진우를 보고 싶었다.
도진의 말이 사실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되는 건지, 도진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건지…….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사무실 창으로 빗줄기가 죽죽 그어졌다. 흐렸던 하늘에서 마침내 비가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대리가 파티션 너머 고개를 돌리더니 쏟아지는 비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비 온다. 드디어 여름도 끝나는구나. 좀 살겠네.”
지나의 여름은 진우였다. 한여름의 열기를 닮은 남자, 뜨거운 사랑을 깨닫게 한 남자.
그 여름의 종말을 알리는 비가 마치 제 사랑의 끝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창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처럼 지나의 가슴에 참담함이 흘렀다.
방금 전까지 혈관을 타고 절절하게 끓던 용암 같던 사랑이 차가운 돌덩어리처럼 식어버린 기분이었다.
‘네 선택에 달렸어. 이지나.’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 당장 전무실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충동과 동시에 어딘가로 숨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진우가 보고 싶었다. 동시에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준 반지를 낀 게 몇 분 전이었다. 이제야말로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용기를 낸 게 고작 몇 분 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다시금 눈가가 홧홧해졌다. 입술을 꽉 앙다물었지만 콧등이 시큰거리며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결국 지나는 도망치듯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정신없이 로비까지 뛰어 내려간 지나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를 보며 천천히 벽에 몸을 기댔다.
‘진우야……. 나 어떻게 해.’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 게 이제는 그에게 독이 되었다.
자신의 사랑이 그에게 해가 된다는 사실이 비참하게 만들었다.
만약 그가 알게 된다면…… 자신을 전처럼 똑같이 사랑할까.
자신이 없었다. 간신히 벽을 짚고 있던 손이 툭 떨어졌다.
“누나.”
듣고 싶은 목소리가 곁에서 울렸다. 부르지 않았지만 가장 필요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서진우.”
들릴 듯 말 듯 그의 이름을 작게 속삭였다.
“무슨 일이에요. 대체.”
지나를 향해 다가오던 진우의 말이 멈췄다. 지나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반지…….”
어쩐지 감격에 찬 눈빛으로 다시금 지나를 바라본 진우는 지나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김도진 과장이 무슨 말이라도 했어요?”
흙빛으로 위태롭게 서 있는 지나를 향해 묻는 진우의 눈빛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지혜가 말했구나…….”
자신이 연락하지 않아도 제 곁에 그가 선 이유. 이제는 너무나 잘 알았다. 쓴 미소를 띤 지나의 말에 진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 아니에요. 이번에는.”
뭔가 말하려던 진우가 한숨을 얕게 내쉬었다.
“혹시 반지와 관련된 일이에요?”
참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애절했다.
“몸이 안 좋기라도 한 거예요?”
진우는 쉽게 물러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 죽어가는 지나의 모습에 결코 양보하지 않을 생각으로 보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나에게는 모든 게 다 흙빛으로 보였다. 자신의 사랑이 진우를 나락으로 몰아간다면 결심해야 했다.
“집에 데려다줄게요. 아니면 병원에 먼저.”
“전무님.”
멍하니 진우를 바라보던 지나가 이윽고 그를 불렀다. 단지 한 단어일 뿐인데 진우의 행동을 멈추게 할 만큼 지독하게 낯설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나가 꾸벅 인사하고는 진우에게서 물러났다.
“누나.”
진우는 그녀를 붙잡는 대신에 그녀의 뒤를 쫓았다.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몇 걸음 걷던 지나가 돌연 몸을 휙 돌렸다. 최대한 환하게 웃는 얼굴로 진우를 바라봤다.
“정말 괜찮아. 나 오늘 너희 집으로 들어가잖아. 이따 퇴근하고 만나자.”
진우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주말에 너무 행복해서 그런지 월요병에 걸린 것 같아. 진짜 괜찮아.”
태연스레 연기하는 지나의 심장이 둥둥 울렸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온몸이 달달 떨렸지만 지나는 끝까지 미소를 그린 입가에 힘을 줬다.
절대 진우에게 들켜서는 안 됐다. 제 사랑이 진우를 바닥으로 내팽개칠 수 있다는 걸, 들켜서는 안 됐다. 진우의 뒤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비서들이 보였다. 아마 어딘가로 이동 중이었는지 비서들은 어딘지 조급한 얼굴이었다.
“바빠 보이는데 얼른 가 봐. 퇴근하고 연락할게.”
지나가 진우를 밀어내자 그가 힘없이 밀렸다.
“연락할게요.”
꼭 울 것 같은 얼굴로 진우가 대답했다.
“응.”
뒤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지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눈을 살짝 감았다.
“하…….”
한여름 밤의 꿈인 걸까.
그와의 사랑은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신기루인 것일까.
진우에게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단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일이었는데도 물을 수 없었다.
‘네 선택에 달렸어.’
도진의 비열한 목소리가 귓가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왜, 왜, 왜…….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러는 거야!
김도진.
‘사랑이려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게 사랑일 리 없다.
김도진은 사랑을 모른다. 그는 여자를 그저 제 좋을 대로 이용해먹으려고 하기 위해 사랑을 들먹거리는 것이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일 층 로비였다. 숫자 버튼을 누르지 않았던 걸 뒤늦게 알아차린 지나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럴 줄 알았어.”
한층 서늘해진 눈빛으로 정면에 서 있는 진우가 지나를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