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태연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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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태연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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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태연한 거짓말
2023.02.21.
“진우야.”
다급하게 진우를 향해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진우의 날카로운 눈매가 번뜩였다. 다짜고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진우가 최상층을 눌렀다.
“너 회의 가던 길 아니었어?”
닫힌 문을 노려보듯 응시하는 진우의 턱이 답 대신 요동쳤다.
“……나한테 말 못 할 일이에요?”
한참 뒤에야 묻는 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지나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을 열면 목까지 올라왔던 질문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진우의 손이 지나의 손을 잡았다. 꽉 잡은 그의 손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왈칵 나올 것만 같았다.
“무리해서 반지 안 껴도 돼요.”
부드럽게 지나를 이끄는 진우가 나긋하게 말했다.
“누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요.”
임원들만 이용할 수 있는 빈 회의실로 들어간 진우가 문을 탁 닫았다.
“나 진짜 괜찮다니까.”
어두운 회의실이라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지나가 억지로 미소지었다. 지나의 말에 진우는 가만히 지나를 내려다봤다.
그의 잘생긴 이목구비에 희미한 음영이 졌다. 더없이 깊은 눈매는 생각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짙었다. 평소라면 맞닿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을 지나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제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아 얼른 눈을 내렸다.
“잠깐 쉬어요.”
이내 진우가 손을 뻗어 지나를 품에 안았다. 둥둥 뛰는 그의 심장 소리에 지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진우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지나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줄 뿐이었다. 그의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지나는 하마터면 또다시 눈물을 흘릴 뻔했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 절대 흘릴 수 없었다.
그에게 들켜서는 안 돼.
지나의 머릿속에서 외치는 고함소리가 가까스로 지나를 버티게 하고 있었다.
“오늘 짐 옮기기 힘들면 내일 할까요?”
그의 가슴팍에서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진동마저 한없이 감미로웠다.
“아냐. 오늘 진짜…… 월요병이라니까. 퇴근하면 싹 나을 거야.”
지나가 평소와 달리 앙탈 부리듯 웅얼거렸다.
“그래요.”
그제야 진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미소지었다.
“하나만 약속해줘요.”
“응?”
“혼자만 힘들어하지 말기.”
“…….”
진우의 밤갈색 눈동자가 지나를 따뜻하게 바라봤다. 그 눈빛만으로 온몸의 긴장이 한 번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약속해줘요.”
입을 다문 지나를 재촉하듯 진우가 말했다.
“응.”
한 박자 뒤에, 가까스로 지나가 대답했다. 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결국 사실대로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낸 뒤였다.
“그럴게.”
태연한 거짓말과 함께 지나가 환하게 웃었다.
아직 시간은 있었으니까.
너와 함께 할 시간.
우우웅.
진우의 재킷 안에 휴대폰이 연달아 울렸다.
“얼른 가봐.”
“출국 전이라 회의가 좀 많네요. 여기서 조금 더 쉬다 가요. 제 전용 회의실이라 오늘은 아무도 안 쓸 거라.”
바쁜 와중에도 자신을 위하는 그의 마음이 지나의 코끝을 시큰거리게 만들었다.
“고마워. 나 조금 쉬다 갈게.”
떨어지기 아쉬운 눈길로 지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진우가 회의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허물어지듯 지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손발은 여전히 차갑고 얼굴은 평소보다 열이 올라 뜨거웠다.
“미안해. 서진우.”
너에게 말할 수 없었어. 사실대로…… 물을 수도 없었어.
이렇게 용기 없는 난, 널 사랑할 자격이 없나봐.
한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기분에 지나는 잠시 의자에 기대 천천히 호흡을 내쉬었다. 텅 빈 회의실에 진우가 왔다 갔다는 걸 알리는 은은한 그의 향이 감돌았다.
심장을 울리는 달콤한 향만으로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이를 꽉 깨물며 애써 눈물을 참은 지나의 흐려진 시선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닿았다.
***
“잠시만요. 왜 제 얘기는 안 들어주세요!”
“시간 낭비 그만하시고 이제 솔직하게 자백하세요.”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윤주의 앙칼진 소리가 익숙하다는 듯이 형사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조차 떼지 않은 채.
“전 아니라고요. 억울해서 이대로 못 들어가요.”
“억울하시면 변호사 선임하시고요. 변호사 없이 영장실질가면 백 프로 구치소로 이감돼요.”
“선임할 거예요…….”
변호사 얘기에 윤주의 말끝이 흐려졌다. 윤주가 회장네와 연관되었다는 소문과는 달리 윤주의 친정은 가난했다.
간신히 일용직으로 근근이 먹고 사는 친정 부모에게 현재 상황을 말하고 변호사를 구해달라 할 수 없었다. 친정의 상황을 알게 된 도진이 윤주에게 막말과 폭언, 무시를 했을 정도였으니.
그렇다고 윤주가 따로 모아둔 돈도 없었다. 입사해서 출근을 위해 옷과 가방을 비싼 거로 잔뜩 구매한 카드값을 아직도 갚아야 했다.
기죽지 않기 위해 화려하게 입어야 한다는 SNS 상의 조언을 따랐을 뿐인데, 겉모습만으로 윤주는 회사 내 회장의 가족이 되어 있었다.
“저는 안 죽였어요. 진짜. 누굴 죽일 사람이 아니에요.”
다시금 윤주가 창살 너머로 소리쳤다.
“네네, 보통 다들 그렇게 말해요. 돈 없으면 국선 변호사라도 불러줘요? 그래봤자 영장은 나옵니다.”
여전히 서류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은 형사가 여상하게 답했다.
“하씨…….”
씨알도 안 먹히는 형사를 향해 한숨을 내쉰 윤주가 몸을 돌려 앉았다. 온기 하나 없는 차가운 시멘트 벽은 닿는 것만으로도 움츠러들 정도였다. 병원에서 그대로 끌려온 바람에 제대로 된 옷차림도 아니었다.
착하게 살았다면 착하게 살았다.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를 빼앗은 과거만 뺀다면. 김도진이 개자식인 줄 알았다면 눈 한번 마주치지 않았을 것이었다.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 슬슬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서 팔자 폈다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좋은 학력도, 좋은 집안도 아닌 윤주에게는 도진이 자신의 구명줄 같았다. 좋은 직장에 깔끔한 외모에 매너까지 완벽했으니까. 처음에는 여자친구가 없는 줄 알고 접근했다.
사내 비밀연애를 한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갈 데까지 간 상황이었다. 엄연히 김도진이 개자식이라는 증거였다.
“내가 죽이지 않았어.”
시어머니가 죽이고 싶을 만큼 싫었다. 하지만 죽일 정도로 간이 크진 않았다. 그저 시어머니 혼자 넘어졌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으니까.
자신이 굳이 확인하러 가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 않았을까. 119를 바로 부르지 않는 것이 죄면 죄일까. 불렀다고 과연 시어머니가 살 수 있었을까. 쓸데없는 가정들에 윤주의 머리만 아팠다.
기다렸다는 듯이 김도진은 증거와 증언을 경찰에 건넸다. 더불어 이혼소송까지 걸어버렸다. 시어머니를 죽인 며느리가 되어 위자료까지 지불해야 할 판이었다.
“이대로 나만 당할 수 없지. 어떻게든 복수할 거야. 김도진.”
이를 으득, 깨문 윤주가 허공을 노려봤다.
***
퇴근 후, 지나는 진우와 함께 짐을 옮겼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출한 짐에 진우가 의아해했지만 지나가 대충 얼버무려 넘겼다. 진우가 안 되겠는지 지나에게 다시 물었다.
“아예 이삿짐 차량을 보내서 통째로 가져올까요?”
“아냐.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
진우가 출국하고 나면, 지나는 다시 옥탑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우리 누나…….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보일까.”
저녁을 먹고 도시의 야경이 훤히 보이는 거실 소파에 앉았을 때, 진우가 작게 속삭였다.
“네가 떠나니까.”
뜨끔한 지나가 다시금 말을 돌렸다. 완전히 돌렸다고 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사실이었으니까. 그가 떠난다는 사실은 지나를 무의식적으로 자꾸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가지 말까요?”
진우의 말에 지나는 잠시 입술을 벙긋거렸다.
“가지 말았으면 좋겠……지만.”
튀어나올 뻔한 진심을 간신히 눌렀다.
“이제 와서 안 가면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든 되겠죠.”
진우가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말했다.
“회사 망하면 나 백수 되잖아. 안 돼.”
장난스레 지나가 맞받아치자 진우가 피식 웃었다.
“누나 정도면 다른 회사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안달일 텐데요.”
“그래? 헤드헌터 한번 만나볼까?”
가벼운 농담에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혹시 미국 회사에서도 통할까?”
“네?”
“나의 매력이.”
“음. 충분히 통할 것 같은데요.”
“그치? 연봉 세게 한번 불러볼까?”
“손 놓고 빼앗기기 싫은데 큰일 났네요.”
애정 넘치는 농담에 깃털처럼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일 최대한 빨리 끝내고 일찍 돌아올게요. 누나 많이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예요.”
“응…….”
어제 들은 이야기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뻤을 터였다. 이제는 그가 돌아오는 날이 마냥 기쁠 수 없었다.
“기다릴게.”
지나가 먼저 진우에게 입을 맞췄다. 마치 자신의 거짓말을 멈추게 하려는 것처럼.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버티기 힘들었다. 흘러내린 눈물이 지나의 뺨에 아롱졌다.
진우와의 입맞춤은 뜨거웠고 달콤했다. 지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듯 애절했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듯 절절했다.
그 밤이 지나도록 지나는 끝까지 진우에게 말하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잠든 진우를 바라보던 지나가 손을 뻗어 그의 날렵한 콧대와 곧은 입매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마치 손으로 그의 생김새를 익히려는 듯 천천히.
“널 지킬게. 걱정 마.”
나 때문에 네가 바닥으로 떨어질 일은 없을 거야.
누구도 널 건드릴 수 없도록 이번에는 내가 널 지킬게.
사랑해, 서진우.
그때, 진우의 손이 올라와 지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오늘 밤새우고 싶으면…… 난 그래도 되는데.”
감은 눈을 느릿하게 뜬 진우의 목소리는 탁했다.
“잠 깨워서 미안해. 얼른 자.”
진우는 대답 대신 지나를 품에 안았다.
“하……. 좋다.”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진우가 웅얼거렸다. 지나는 팔을 들어 진우를 안았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을 감고 그의 체온에 잠을 청했다.
검은 하늘이 푸르게 변하기 시작하는 시간, 여전히 깔려 있는 어둠 속에서 진우가 몸을 일으켰다. 진우는 잠든 지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살펴보고는 침실을 조심스레 나왔다.
벗은 몸 위로 가운을 걸친 진우는 천천히 크리스털 유리컵에 물을 따랐다. 어둠보다 더 짙은 그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그는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