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우리의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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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우리의 해피엔딩
2023.02.28.
“어떻게 오셨죠?”
한눈에 봐도 깔끔한 회색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는 보통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형사가 조심스레 묻자 남자가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허윤주 씨 변호사입니다.”
매서운 눈매답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기민해 보였다. 얼떨결에 명함을 건네받은 형사가 살짝 주춤했다.
“K그룹 법무팀?”
익숙한 단어가 나오자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던 윤주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재빨리 남자 쪽으로 다가갔다.
“맞아요. 제 변호사예요.”
수갑을 찬 손목으로 엉거주춤한 자세를 한 채,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는 윤주의 모습은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종이 냄새가 나는 남자와 윤주를 번갈아 보던 형사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흐음, 알겠습니다. 선임계 작성하시죠.”
“아, 살았다.”
동시에 윤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선임계를 작성하기 전, 변호사가 윤주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이곳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게요.”
윤주는 하얗게 터진 입술로 비장하게 대답했다.
***
어둑한 조명이 복도를 따라 이어졌다. 도진을 따라 걷는 지나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변했다. 긴장감에 주먹 쥔 손에 땀이 찼다.
“오랜만에 회포를 풀자고.”
이윽고 방 앞에 다다른 도진이 카드키를 띡 찍었다. 문을 연 도진에게 지나가 말했다.
“약속해요. 저와 하루 동안 만나는 거로 진우에게 어떤 짓도 하지 않겠다고.”
문 앞에 선 지나가 도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좁은 눈매로 지나를 잠시 바라보던 도진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뭐.”
도진의 대답에 안도할 새도 없이 지나의 몸이 확 끌려갔다. 방문이 닫히고 문에 기댄 지나는 도진에게 갇혔다.
깜짝 놀란 지나는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물었다. 지나를 향해 고개를 내린 도진의 얼굴로 음영이 짙어졌다.
“시작도 안 했는데 뭘 그렇게 긴장해.”
도진이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지나의 얼굴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오늘 하루만으로는 부족할 거야. 이 밤이 지나면 나에게 매달리겠지.”
지나가 거칠게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절대.”
매섭게 그를 쏘아보던 지나의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피식 웃던 도진이 다시금 지나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그의 입술이 가까이 닿을 찰나,
‘도저히 안 돼.’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올라왔다. 구역질인 것도 같았다.
“욱.”
도진을 확 밀친 지나가 입을 가렸다.
“너…… 이렇게 하면서 뭘 바라는 거야?”
지나에게 밀려 비틀거린 도진이 미간을 찡그렸다. 거친 숨소리가 커졌다.
“이런 식으로 하고 싶지 않아요.”
지나의 말에 도진이 피식 웃었다.
“그럼, 어떤 식으로 하고 싶은데?”
도진의 날 선 눈빛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서진우처럼 해주길 바라는 거야?”
진우의 이름에 지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이름 함부로 말하지 마.”
지나가 도진을 쏘아봤다.
“하……. 이름에도 금칠했나. 왜 말하면 안 되는데?”
도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것처럼.
“내가 아니라 네가 아무리 불러도 걘 여기 못 와.”
지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알고 있었다. 진우가 출국한걸.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찬 바람이 끊임없이 불었다.
혼자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가 사라지자마자, 이렇게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너 같은 놈이 감히 부를 이름이 아니니까.”
지나의 도발에 도진의 얼굴이 구겨졌다.
“나 같은 놈?”
“이런 짓 하고 회사 계속 다닐 수 있을 거 같아?”
지나가 소리치자 도진이 코웃음 쳤다.
“이지나, 너 진짜 나를 뭐로 보는 거야. 내가 그런 거 하나 염두에 두지 않고 이런 짓 할 것 같아?”
그가 회사를 이직한다는 말은 다 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미 이직할 업체 만나서 말 다 끝냈어.”
“그럼 조용히 사라져.”
제발.
지나가 이를 꽉 다물며 잇새로 내뱉자, 도진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나 같은 놈이랑 찐하게 놀자. 이지나. 어차피 볼 장 다 본 사이잖아.”
“그냥 사라지면 네가 회사 정보 빼돌린 거 고발 안 할게.”
“뭐?”
지나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에는 녹음 중인 화면이 떠 있었다.
“이것 봐.”
도진의 눈이 흠칫 커졌다.
“내가 다 녹음했어. 이대로 경찰에 고발하지 않을 테니 그냥 조용히 사라져.”
지나가 마른 침을 넘겼다.
“진우와는 헤어졌어. 네가 원하는 대로. 그것만으로 충분하잖아.”
간신히 내뱉은 말이 목을 찔렀다. 말 자체에 가시가 달린 것처럼.
“다 컸네. 이지나. 귀여운 짓도 할 줄 알고.”
도진이 음침하게 웃었다. 그의 한층 탁해진 눈빛이 번들거렸다.
“날 너무 모르네. 서운하게.”
셔츠 소매 단추를 천천히 푸는 도진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오빠 화나려고 하네.”
그는 웃음기 없는 눈으로 지나를 내려다봤다.
“내가 벗길까? 네가 벗을래?”
“난 죽어도.”
지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하고 안 만나.”
지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도진의 얼굴이 천천히 구겨졌다.
“그건 내가 결정하는 거고.”
도진이 지나의 어깨를 아프게 잡았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도진의 발이 가차 없이 휴대폰을 세게 밟았다.
“안 돼!”
두세 번의 거친 발길질로 휴대폰이 부서졌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도진의 품에서 증거를 빼앗아야 했다. 그의 재킷 안쪽에 있는 USB를 향해 지나가 팔을 뻗었다. 하지만 도진이 더 빨랐다.
“이게 어딜.”
밀쳐진 지나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지나가 눈을 부라렸다.
“재회 한번 뜨겁네. 좋아.”
도진이 재킷을 벗었다.
“네가 서진우와 헤어졌다니 조금 아쉽네.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사이인지 보여줄 수 있었는데.”
지나를 바라보는 도진의 눈이 번들거렸다.
“어쨌거나 우리의 해피엔딩이네.”
“개소리하지마.”
“헤어졌어도 널 잊지 못한 전남친이라니. 짜릿하지?”
“넌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랑?”
셔츠의 단추를 천천히 풀던 도진이 비웃었다.
“사랑……. 사랑이 밥 먹여주냐. 그냥 조건 맞으면 되는 거지. 나에게 넌.”
어느새 드러난 상체로 도진이 지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완벽한 조건이고.”
지나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조금만 더 다가오면 혀라도 깨물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즐겨.”
띵동-.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도진의 움직임이 멈췄다.
- 룸서비스입니다.
“시킨 적 없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린 도진이 귀찮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도진의 가느다란 눈이 흠칫 커졌다.
“어떻게 여길…….”
기다란 그림자가 도진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놀란 듯한 도진의 목소리가 멈췄다.
누군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익숙한 체향이 코끝에 맡아졌다.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그리운 향기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가 여기게 올 리 없다. 그는 태평양 건너편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저 그를 닮은 향기만으로 마음이 놓였다. 이내 바깥에 서 있던 그림자가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
전날 밤, 잠든 지나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내려다본 진우는 천천히 침대를 빠져나왔다. 균형 잡힌 그의 상체에 은은한 달빛이 부서졌다. 하얀 가운을 걸친 진우는 거실로 나와 어둠에 잠긴 도시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자꾸만 가슴께에 고였다.
‘가지 마, 서진우.’
잠에 든 지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물어도 말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이대로 지나를 두고 떠나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는 한층 짙어진 눈빛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네, 김 실장님. 빨리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칼처럼 벼려진 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나긋했다.
“제 출장일을 미루고 싶습니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천천히 쓸어넘긴 진우의 눈빛이 빛났다.
“네. 중요한 일입니다.”
지나에 관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김도진 과장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가 얼마 전부터 지나를 괴롭히고 있는 걸 알았다.
처음부터 봐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를 몰아갈 구실이 필요했다. 그는 전무가 되자마자 김도진에 관한 일들을 은밀하게 알아보라 지시했다. 김도진은 진우가 쳐 놓은 덫에 꼼짝없이 걸려들었다.
통화를 끊은 진우는 한층 가라앉은 눈으로 짙은 어둠을 응시했다.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지나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온전히 믿고 기대주기를.
하지만 지나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그러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진우에게 티 내지 않으려 한 지나의 모습조차 진우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만큼 자신이 지나에게 믿음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하는 것 같아서.
이를 꽉 문 진우의 턱이 불끈거렸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진우는 지나를 지켜야 했다. 그녀만이 제 세상의 전부였으니까.
***
출국 당일, 원래대로라면 공항으로 출발해야 할 진우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차에 오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 한 통이 울렸다.
- 저, 허윤주예요. 제발 도와주세요.
표정 없는 진우의 얼굴은 싸늘했다. 조금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묵묵히 듣고 있는 진우의 귓가에 애절한 절규가 울렸다.
시간이 다 됐다 재촉하는 경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흘낏 내려다봤다. 통화가 끊겼다.
“전무님, 경찰서로 가면 될까요?”
운전하던 기사가 백미러를 보며 물었다.
“네.”
진우가 건조하게 답했다. 곧바로 휴대폰을 귓가에 댄 진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박 변호사님, 지금 와주실 곳이 있습니다.”
통화는 짧았다. 허윤주는 김도진을 몰아넣을 마지막 패였다.
그녀가 독을 품고 김도진을 역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었다. 아낌없이.
진우는 시트에 깊이 머리를 묻었다. 머릿속에 이미 짜여진 판이었다. 올가미에 걸린 사냥감의 숨통을 끊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