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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갔다 올게요 (64/80)


64 갔다 올게요.
2023.03.10.



 
지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던 진우가 낮게 웃었다.


“일은 누나에게 있었죠.”

순간, 호텔 객실 안의 상황이 떠오른 지나가 입술을 꾹 물었다.

도진과 자신의 사이를 의심하는 걸까.

두려움이 불쑥 솟았다.


“그게, 그러니까.”

변명을 하려는 지나의 손을 진우가 꼭 잡았다.


“다 알아요. 누나가 나 몰래 하려던 일.”

어딘지 중의적인 말에 지나의 표정이 굳었다.


“나, 김도진이랑 그런 게 아니라.”

“USB 고마워요.”

아.

그제야 자신이 건네준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열이 오른 상황에서 기억 조각은 뚝뚝 잘린 채였다.


“이선영의 말만으로는 증거가 없었는데 덕분에 경찰에 완전하게 다 넘길 수 있었어요.”

“그렇구나.”

자신이 도움이 됐다는 말에 지나가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말이야. 나 진짜 네가 의심할 만한 그런 거 아니야. 절대 오해하지 마.”

바로 이어 지나가 말했다.


“나 그런 거지 같은 놈이랑은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

그녀의 말에 진우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 이제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무슨 말?”

“나쁜 말.”

“거지 같은 놈한테 거지 같다고 해야지.”

꽤 진지한 눈으로 말하는 지나를 보며 진우가 미소 띤 얼굴을 가까이 내렸다.


“그렇네요. 그러면 아기가 들으니까 나한테만 작게 말해요.”

“어?”

당황한 지나가 눈을 크게 떴다.


“아기?”

그게 무슨…….

진우는 더 이상의 설명 대신 지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어? 진짜?”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지나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지르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진짜야?”

그러고선 작게 속삭인 지나의 모습에 진우가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얼떨결에 그의 품에 안긴 지나가 커다란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그의 말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러워 놀라지 않았어요?”

지나의 머리 위로 달큼한 숨이 쏟아졌다.


“갑작스럽긴 한데…….”

진우의 품에 얼굴을 댄 지나가 웅얼거렸다.


“좋아.”

“……정말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던 진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응. 좋아.”

지나가 미소지었다.

그 모습이 한없이 사랑스러워 진우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누나가 싫다면 전 누나 의견에 따를 거예요. 그러니까 억지로 그럴 필요 없어요.”

“진짜 좋아.”

지나가 눈을 곱게 휘었다.


“고마워요.”

감정에 북받친 진우가 지나를 다시 품에 안았다. 이제 둘이 아닌 셋이 되었다.

더 이상 그녀를 힘들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미국 일 금방 끝내고 올게요.”

“응.”

지나를 위해, 그리고 아기를 위해 진우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리고 있을게.”

날이 밝으면 진우는 다시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K그룹과 미국 회사들과의 미팅이 연기되었다는 기사들로 인해 K그룹과 관련 주가들이 요동을 쳤다.


“잘하고 와.”

“네.”

허공에 맞닿은 시선이 뜨거웠다.


“이건 선물.”

진우가 손바닥만 한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휴대폰 고장 났잖아요.”

도진의 발길질에 깨져버린 휴대폰이 그제야 생각났다.


“내가 사면 되는데…….”

“누나랑 연락 안되면 내가 불편해서.”

“고마워.”

지나가 작게 속삭였다.


“사실 누나에게 할 말이 있어요.”

진우가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뭇 진지해진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갔다 와서 들을래.”

그게 뭐든.

지나가 의연하게 대답했다.


“네.”

하고픈 말을 억지로 삼키며 진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그녀에게 빌고 싶었다.

잠시였지만 의심했다고.

하지만 제 안의 두려움으로 하지 못했다.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를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 욕심에.


“갔다 올게요.”

드디어 진우가 몸을 돌렸다. 초승달이 서쪽에 걸린 새벽이었다. 기지개를 켜는 햇살이 동을 밝히는 시간이 되어서야 진우는 발길을 옮길 수 있었다.

***

며칠 뒤, 병원을 퇴원한 지나는 부모님과 함께 강원도로 향했다. 올해의 연차는 몽땅 끌어써 속이 조금 씁쓸했지만 엄마의 성화를 이길 수 없었다.

가을 햇볕이 진하게 내리쬐는 9월 말의 강원도는 꽤 선선했다. 지나는 매일같이 도톰한 카디건을 몸에 두른 채, 마루에 나와 따뜻한 가을볕을 쬐었다.

병실에서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미국을 간 진우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아마 전력으로 일에 매달리고 있을 테지.

지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마치 그곳에 진우가 있는 것처럼. 그런 지나의 시선을 잡아끈 건 엄마의 목소리였다.


“고구마 쪄줄게.”

마당에 고추를 깔던 엄마 옆으로 고구마 잎들이 푸릇푸릇 솟아 있었다. 엄마가 마지막 고추를 잘 펴고는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엄마가 직접 키운 작물 중에 처음으로 성공한 고구마는 갓 캐서 그런지 맛있었다. 대부분의 음식을 넘기지 못하는 가운데 고구마는 그나마 괜찮아서 엄마는 하루에 두세 번씩 고구마를 쪘다.


“응.”

‘갔다 올게요.’

아직도 진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를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심장이 꾹 쥐어짜지는 것처럼.

그가 올 때까지 웬만하면 그를 떠올리지 않기로 했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계속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나야, 고구마 먹자.”

엄마의 목소리에 지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달콤한 고구마 냄새가 거실에 진동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소반에 크기가 다양한 고구마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랐다.


“아빠는?”

지나는 적당한 크기의 고구마를 집어 호호, 불며 껍질을 벗겼다. 잘 익은 고구마답게 껍질이 부드럽게 사르르 벗겨졌다. 숨겨져 있던 노란 알맹이가 촉촉한 자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네 아빠는 아침 일찍 낚시 갔어. 딸 몸보신에 제철 생선 좋다고……. 서 서방은 잘 지낸대?”

“응, 잘 지내.”

엄마의 질문에 지나가 싱긋 웃었다. 앞니로 살짝 고구마 속을 깨무니 뜨거운 기가 확 올라왔다.

엄마는 고구마에 시선을 둔 채,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지나의 눈치를 보며 쉽사리 말하지 못하는 걸 보니 진우에 관한 것이 분명했다.


“나 엄마 아빠한테 할 말이 있는데…….”

“어?”

지나의 말에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뭔데, 뭔데?”

지나는 대답 대신 입에 넣은 고구마를 오물거렸다.


“엄마, 이제 고구마 팔아도 되겠다.”

“아니, 무슨 할 말인데.”

불안함이 고스란히 보이는 엄마의 얼굴에 지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별거 아니야. 아니다. 별거일 수도 있겠다.”

“얘가 밥통도 아니고 왜 이렇게 뜸을 들여.”

답답한 엄마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아빠 오면 말하려고 했는데.”

“왜? 너 설마.”

여태 고구마를 보던 지나의 시선이 엄마에게 향했다.


“진우랑 헤어졌어?”

여태 불안해 보이던 엄마의 걱정이 튀어나왔다.


“뭐? 아냐.”

결국 지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휴, 다행이다. 난 또.”

“왜 헤어져. 절대 안 헤어져. 아니, 이젠 못 헤어져.”

“그럼, 뭔데.”

한숨 놓은 듯 엄마가 이제야 고구마 껍질을 휙휙 까며 물었다.


“나 임신했어.”

“아……. 난 또 별거라고.”

무심코 대답하던 엄마의 손이 멈췄다.


“뭐?”

엄마와 눈이 마주친 지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할머니 되겠네. 축하해.”

“세상에. 세상에!”

깜짝 놀란 엄마의 입이 벌어졌다.


“아이고. 세상에!”

우는 듯, 웃는 듯 엄마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했다.


“서 서방은 알고?”

“응, 진우가 알려줬어.”

“일 년 뒤에나 온다며.”

현실적인 걱정이 밀려오는지 엄마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괜찮아?”

“응. 진우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정확히 언제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진우를 믿었다.


“회사는 어쩔 거야?”

“다녀야지. 분유 값이랑 기저귀 값 모아야 해.”

“…….”

엄마는 잠시 말이 없었다.


“서 서방이랑 통화는 되는 거지?”

엄마의 질문에 불안이 듬뿍 묻었다.


“아니.”

“뭐?”

놀란 엄마가 고구마를 툭 내려놨다.


“헤어진 거 아니라며.”

“통화는 안하고 문자는 자주 해.”

“뭔 놈이 하는 줄 알고. 문자를 어떻게 믿어. 늙어서 그런가 문자보다는 전화가 훨씬 편하고 좋구먼.”

엄마가 뭘 걱정하는지 잘 알았다.


“알아. 밤낮이 다르니까 일하는 시간도 안맞고.”

지나가 애써 변명했다. 엄마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휴, 오늘따라 이놈의 고구마가 왜 이리 퍽퍽하니. 가슴이 콱 막히네.”

결국 괜한 고구마 타박을 하던 엄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산책 좀 할게.”

엄마의 등 뒤에 대고 말한 지나가 마루로 나와 신발을 꿰어신었다. 서늘한 바람이 품까지 밀려와 지나는 얼른 옷깃을 여몄다. 확실히 시골 바람은 도시와 달랐다.

대문을 나와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길가 너머로 뻗어있는 밭에는 수확을 기다리는 듯 잘 익은 벼와 그 옆으로 이름 모를 초록 식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정렬해 있었다.

엄마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아주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진우가 지나를 떠나는 걸 불안해하는 게 아니다.

그가 늦게 돌아올까, 걱정이 되었다. 온전히 홀로 임신 기간을 버텨야 하고……. 그가 더 늦어진다면 아기도 혼자 낳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가슴을 무겁게 했다.


“지나야!”

아빠였다.


“산책 중이야?”

“응.”

“아빠가 고기 많이 잡았다.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자.”

아빠 차에 올라타니 집까지 5분 만에 도착했다. 아빠는 잡아 온 물고기가 든 통을 꺼내 엄마에게 자랑하듯 보였다.


“어이구, 낚시 제대로 했네.”

엄마의 칭찬에 아빠가 기분 좋게 웃었다.


“광어에 돔에, 가자미도 잡았네?

“우리 딸 먹이려고 열심히 낚았지.”

아빠는 소파에 앉아 허허, 웃었다.


“손주까지 잘 먹겠수.”

“손주까지 잘 먹여야지. 응? 손주?”

무심코 따라 말하던 아빠가 고개를 들었다.


“손주?”

순간 엄마와 눈이 마주친 아빠는 지나를 바라봤다.


“아, 그게…….”

지나가 당황한 얼굴로 아빠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던 아빠는 돌연 방으로 들어갔다.


“그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

그런 남편을 이해한다는 듯 엄마는 손질을 시작했다. 괜히 죄인이 된 것만 같아 지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

진우에게서 온 문자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읽었다. 문자마다 지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물씬 느껴졌다.


‘난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문자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그리움이었다.

그렇다고 막상 지나가 먼저 전화하기에는 진우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자존심도 상하고.’

지나는 애꿎은 휴대폰만 노려보다 이내 인터넷 창을 켰다.

[ K그룹 ]

검색어를 넣자 여러 개의 기사들이 줄줄이 떴다.

[K그룹의 도약, 미국에서도 과연 먹힐까.]

[텍사스 공장 부지 계약 성공적으로.]

[K전자기술 핵심이 드디어 미국에 선보이다.]

그의 사업이 순항을 이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화면을 내리던 지나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어느 기사 중 실린 진우의 사진 때문이었다.

지나는 저도 모르게 진우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그리운 마음이 울컥 솟아올렸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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