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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수천 킬로미터의 고백 (65/80)


65 수천 킬로미터의 고백
2023.03.14.



 


“여보세요.”

- 누나.

보고픈 목소리에 절로 코가 찡, 울렸다. 딱 일주일만이었다.


“어. 어.”

반가움을 내색하지 않으려 지나가 목소리를 꾹 눌렀다.


“잘 지내?”

- 네. 누나는 몸 좀 어때요?

“괜찮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아서일까. 지나는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술만 물었다.


- 회사는?

“일은?”

동시에 튀어나온 말에 웃음이 터졌다.


“나 지금 엄마네 와 있어. 다음 주면 올라가야지.”

- 네. 잘했어요. 저도 일 열심히 하고 있어요. 누나 생각하면서.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심장이 울렸다.


“무리하지 마. 타지에서 아프면 서러워.”

- 네.

그는 변하지 않았다. 담담한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다.


- 하, 전화하기 정말 잘했네요. 나, 누나 목소리 듣고 싶어 죽을 뻔했네.

“그런데 왜 안 했어.”

저도 모르게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누나 목소리 들으면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

심장이 쿵쿵 뛰었다.


- 이제 안 참고 자주 할게요. 여기 일 최대한 빠르게 끝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그와 통화 전에 본 기사들이 떠올랐다. 지나가 미소를 지었다.


“알아.”

얼마나 노력하는지 다 알아.


“고마워. 서진우.”

진우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그 짧은 정적에서도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 또 전화할게요.

“응.”

통화는 길지 않았지만 섭섭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지나는 제가 내세웠던 자존심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아무것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텅 비었던 마음이 어느새 가득 차올랐다.

진우와의 짧은 통화 한 번에.


[사랑해요.]

바로 날아온 그의 문자에 미소가 그려졌다.

셀 수 없이 속삭였던 진우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널 사랑해서 그런가,

기다리는 지금이 힘들기보다는 설레어.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널 만날 시간이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나도.”

지나는 문자를 보내는 대신 작게 속삭였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꽉 차올랐다. 부푼 풍선처럼 하늘 높이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사랑해.”

입 안에서 되뇌는 고백에 저절로 볼이 발그레해졌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상황이었지만 둘의 사랑이 더욱 견고하게만 느껴졌다.

한편, 지나의 임신 사실을 들은 지나의 아빠는 밤이 새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아빠가 굉장히 울적해 보였다는 정도만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서울로 올라가는 날, 지나를 집까지 태워주기로 한 아빠는 어딘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 미안해요.”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지나가 멋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방을 주시하는 아빠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뭐가 미안하냐.”

나직하게 말하는 아빠에게 지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결혼하기도 전에……, 그래서 실망하셨잖아요.”

“…….”

“진우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예요. 엄마 아빠만큼은 아니지만 아이 잘 키울게요.”

“너에게 실망한 게 아니다.”

운전대를 잡은 아빠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네가 진짜 어른이 되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컸다 컸다 했지만 아빠에게 언제나 넌 꼬맹이였거든.”

그제야 아빠가 어떤 감정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훌쩍 커버린 널 보내줘야 할 때가 되었구나 싶어서 마음이 여러모로 복잡했단다.”

“아빠…….”

“너에게 절대 실망한 적 없어. 지나야.”

아빠가 강단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널 키우는 동안 아빠 엄마는 단 한 번도 너에게 실망한 적 없다. 넌 자랑스러운 우리 딸이니까.”

“아빠…….”

코끝이 찡해진 지나가 작아진 목소리로 아빠를 불렀다.


“그런데 말야, 몇 날 며칠 혼자 고민한 끝에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뭔데요?”

“네가 아기를 낳고 그 아기가 또 아기를 낳아도 아빠에게는 넌 영원한 꼬맹이라는 거, 잊지 말아라.”

“그게 뭐예요.”

결국 웃음이 터졌다.


“어허, 그러니까 힘든 일 있거나 속상한 일 있으면 언제든 아빠 엄마한테 말해라. 꼬맹이는 그래도 되니까.”

“푸흡, 알았어요.”

서울까지 무사히 도착한 지나는 아빠와 정겹게 인사했다.


“몸조심해라.”

“네. 아빠도 조심히 들어가요.”

비좁은 골목길에 선 지나는 아빠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모르게 옥탑방 집을 말해버렸네.”

진우의 집 주소를 말한다는 걸.

아빠에게 헛걸음을 시킬 수 없어 지나는 결국 알아서 진우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양손에 가득 짐을 들은 지나는 며칠 만에 들른 옥탑방을 올려다봤다.


“들를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지나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처음 보는 남자는 이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말끔한 정장을 입은 채였다. 당황한 지나가 눈을 굴리며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어? 저 여기 사는 사람인데…….”

“아, 그러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저는 집 관리를 하러 온 이주혁 실장입니다.”

뜻밖의 소리에 지나가 눈을 크게 떴다.


“집 관리요?”

“네. 건물 외부 보수관리 상태를 확인 중이었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다닐까 말까 한 달동네 꼭대기에 있는 낡아빠진 집을 산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저, 그런데 전 주인아저씨가 그쪽, 아니, 이주혁 실장님을 고용하신 거예요?”

그 짠 내 나는 변태 집주인이 이런 멀끔한 사람을 고용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기에.


“아, 아닙니다. 절 고용하신 분이 새 집주인이십니다.”

“아……. 그렇군요.”

집주인이 바뀌었다고 하니, 지나는 문득 자신의 보증금이 걱정되었다.


“그럼, 제 보증금은 나중에 받을 수 있는 거죠?”

어색한 미소와 함께 지나가 묻자, 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 건물은 어차피 재개발 구역으로 들어갈 거라 이주비까지 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재개발이요?”

“네. 그렇습니다.”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되면 이곳 집값이 확 뛸 텐데…….


“재개발이 되는데 그 짠 내 폭발하는 변태 집주인이 집을 팔았다고요?”

자기도 모르게 전 집주인의 상태를 말해버린 지나가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아, 그 아저씨가 좀 문제가 있었거든요.”

주혁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네. 저희 사장님께서 워낙 이런 쪽으로 일을 잘하셔서 문제없이 해결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일하는 사람에게 주책맞게 이것저것 물은 것 같아 지나는 서둘러 인사했다. 전 집주인이 아무래도 찝찝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아니, 여기에 집이나 한 채 사놓을걸.’

뒤늦게 아쉬움이 일자, 지나는 길거리에 있는 아무 부동산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 제일 싼 빌라는 얼마 정도 할까요?”

퇴직금에, 대출에 있는 거 없는 거 다 당겨볼까.

지나의 등장에 앉아 있던 중개사가 생기 넘치는 미소로 반갑게 대답했다.


“아가씨 혼자 살 거예요? 1억 짜리도 있고 2억 짜리도 있어. 향이랑 층에 따라 조금씩 달라요.”

“아……. 그 재개발 같은 소식은 혹시…….”

“어휴, 재개발이 어딨어. 여긴 서울에도 위치가 워낙 안 좋아서 대기업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곳인데.”

중개사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렇군요. 일단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재개발 기대하고 온 거면 내가 팔 수가 없어요. 미안해서.”

“네. 수고하세요.”

이 중개사만이 아니었다. 옆 부동산도, 옆 옆 부동산도 재개발을 몰랐다.


‘뭐지?’

혼란스러워진 지나는 다시금 옥탑방이 있는 곳을 슬쩍 쳐다봤다. 멀끔해 보이는 사람이 헛소리를 하는 것 같진 않고…….

고개를 갸웃거린 지나는 이내 걸음을 옮겼다.

***

월요일 아침부터 사무실 분위기는 평소보다 조금 어수선했다.

김도진 과장의 갑작스러운 사직과 허윤주 사원의 복직 때문이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수군거리는 직원들 사이로 장 부장이 나타났다.


“자자, 김 과장 일은 그렇게 됐으니 조만간 새로운 인사발령이 날 겁니다. 허 사원이 다시 돌아왔으니 모두 화이팅합시다.”

허 사원의 사직 사건은 단순 해프닝이었다고 해도, 갑자기 남편인 김 과장의 사직은 많은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윤주는 결혼 전처럼 화려한 옷차림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일 처리는 미숙했지만 표정 관리 하나만큼은 능숙했다. 주눅 없는 꼿꼿한 표정 때문인지 부서 내에서 윤주에게 대놓고 묻는 사람들은 없었다.


“이 대리님.”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지나 앞에 나타난 윤주의 모습에 지혜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지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점심 제가 사드릴게요.”

한 번도 그런 적 없는 윤주의 모습이 낯설었다.


“어……. 왜?”

지혜가 의아한 듯 먼저 물었다.


“그래요.”

지나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안이 벙벙한 지혜에게 눈을 찡긋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윤주 씨에게 맛있는 거 얻어먹자.”

윤주가 먼저 사무실을 나가자 뒤따르는 지나에게 지혜가 속삭였다.


“우리가 쟤한테 뭐 얻어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 아니잖아.”

“이럴 때 아니면 얻어먹을 수 있는 기회 없잖아.”

지나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의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지혜는 지나와 함께 윤주의 뒤를 따랐다.


“저희 이혼했어요.”

식당에 앉자마자 난데없는 윤주의 폭탄선언에 물을 마시던 지혜는 사레가 걸렸다. 지나 역시 호텔 안에서 거의 정신이 없었기에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정확히는 이혼 소송 중이지만요.”

캑캑거리는 지혜가 서둘러 가슴팍을 두들겼다. 정작 폭탄을 던진 윤주는 침착했다.


“잘 해결되길 바랄게요.”

지나가 얼른 대답했다.


“그전에 굴었던 행동들 대리님께 사과하고 싶어서요.”

갑자기 점심을 사는 이유였다. 윤주의 달라진 모습에 지나가 미소지었다.


“제가 용서하지 않겠다면요?”

이미 지난 일이었지만 지나에게는 꽤나 깊은 상처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래도 사과드리고 싶어요.”

어깨를 으쓱거린 윤주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용서는 잘 모르겠어요. 시간이 많이 지나면 그때 어쩌면 윤주 씨를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당장 용서한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더 이상 남은 감정은 없었다. 그녀가 겪었던 일 역시 작지 않기에, 지나는 그녀도 김도진의 피해자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 소송, 윤주 씨에게 좋은 결과 있기를 응원할게요.”

이 정도면 될까. 지나의 시선이 윤주에게 곧게 향했다.


“고마워요.”

얄밉게만 보였던 윤주의 눈빛이 감동받은 듯 촉촉해졌다.


“그런데 일 인분 더 시켜도 되나? 여기 약간 양이 적어서.”

눈치 보듯 조심스레 끼어든 지혜의 말에 지나와 윤주가 마주보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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