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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천사처럼 예쁜 사람 (67/80)


67 천사처럼 예쁜 사람
2023.03.21.



 
오로지 뛰는 건 진우의 심장뿐이었다. 오랫동안 멈춘 줄 알았던 심장이 지나의 사진 한 장에 뛰기 시작했다.

그제야 진우는 자신이 지나를 한 번도 잊은 적 없다는 걸 깨달았다. 멈춰있던 세상이 다시 움직였다. 아무런 목적 없이 흘러가던 진우의 시곗바늘은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가씨가 누군데. 잘 만났어?”

흥분을 가라앉힌 진우 어머니가 소가죽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물었다. 잘 나가던 한국 재벌의 아내이기 전, 재벌가의 딸 다운 안목이었다.


“네.”

진우가 깔끔하게 대답했다.


“어느 집안이야?”

어머니가 덮은 숄을 바짝 여미며 눈을 빛냈다.


“내가 아무리 이혼했다지만 너 변변찮은 집안에 장가가는 건 못 봐. 서 회장과 내가 찢어졌지만 엄연히 네 양가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재벌 집안이야.”

어머니의 자존심에 진우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들이 나 닮아서 얼마나 좋은 아가씨를 데리고 올까, 기대되네.”

“맞아요. 어머니처럼 좋은 사람이에요.”

“어머, 얘는…….”

진우의 말에 진우 어머니가 싫지 않은 듯 미소지었다.


“너 세 달 전에 미국 온 건 알고 있었어. 엄마한테 바로 올 줄 알았는데 전화만 하더라.”

한인사회는 물론이고 미국 신문에도 진우의 미국행에 대한 기사를 먼저 본 어머니였다.


“그래서 전화 안 받으셨어요?”

“응. 얼마나 얄미운지 알아? 엄마 버리고 호로롱 전남편한테 가버린 아들한테 아직도 서운함이 덜 풀렸어.”

어머니가 눈을 가늘게 흘겼다.


“죄송해요.”

진우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래, 어떤 아가씨가 우리 아들 마음을 흔들었는지 어디 들어나 보자.”

어머니가 집요하게 물었다.


“착하고 예뻐요.”

진우는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그래. 아버지는 뭐 하시고?”

어머니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은퇴하시고 지금은 강원도에 계세요.”

“강원도?”

어머니의 얼굴에 의아함이 실렸다.


“무슨 사업을 하시길래 갑자기 강원도로 내려가신 거야? 아니면 정치하셨나?”

여러 추측에 진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그냥 평범한 집이에요.”

“흐음…….”

진우 어머니는 어딘지 실망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닫았다.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진우를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설마 엄마 아빠 이혼한 거 때문에 그러니?”

진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너 스스로를 다운그레이드한 거면 엄마는 실망이다.”

“그럴 리가요.”

진우가 고개를 부드럽게 저었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런데 왜 평범한 여자와 만나. 네가 어때서. 나한테도 얼마나 많이 연락 오는 줄 아니? 뉴욕 주지사 조카랑 너랑 이어주자는 중매도 얼마 전에 들어왔는데.”

어머니의 안타까운 말에 진우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를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어요. 소중하고 귀한 사람이에요. 어머니.”

부드럽지만 한층 묵직해진 목소리는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잠시 흥분했던 어머니가 입을 다물고 숨을 내쉬었다.


“제가 선택하고 사랑하는 여자예요. 어머니도 부디 아껴주셨으면 좋겠어요.”

“…….”

부탁 같았지만 선전포고와 같았다. 진우의 말뜻을 이해한 어머니가 눈만 깜빡거렸다.


“그래. 뭐……. 너희가 좋다면 할 수 없지.”

못마땅한 기색은 여전했지만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못했다.


“여기 일이 끝나는 대로 한국으로 돌아가 결혼식을 올릴 거에요.”

“그렇게 빨리?”

다시 한번 놀란 어머니가 진우의 눈치를 살피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더 빨리 올리고 싶었는데 출장 때문에 늦어졌어요.”

아쉬움이 가득한 진우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어머니께서 오실 수 있으시면.”

“서일준이랑 그 여우 같은 년이 부모 자리에 앉는 건 아니지?”

어머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여쭤보진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두 분의 참석은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진우가 어머니를 곧게 바라봤다.


“어머니께서 오셔서 우리 두 사람 축복해주세요.”

그의 진중한 태도에 어머니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연예인이라 착각할 만큼 수려하게 잘 자란 제 아들이 어느새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되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잠시 진우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아들 이기는 부모 없다고.

귀하고 잘난 아들을 이겨서 무엇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을 닮아 예쁘고 착하다 하지 않은가.


“그런데 진우야. 그 애 정말 나 닮았니?”

어머니의 은근한 질문에 진우가 미소를 그렸다.


“네. 어머니 닮아 천사처럼 예뻐요.”

“어유, 얘는……. 여자 보는 눈이 있어.”

어머니가 진우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소중한 아들인 만큼 좋은 소식은 더욱 기뻤다.


“저녁 아직이지?”

봄날의 눈처럼 마음이 사르르 녹은 어머니가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 같이 준비해요.”

진우가 어머니를 따라 일어나며 셔츠 소매를 걷었다.


“그럼, 그럴까?”

오랜만에 주방에서 아들과 함께 요리할 생각에 미소가 연신 그려지는 어머니였다.

***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지나의 불안감은 점점 커졌다.

임신 사실에 대해 말할까 말까 회사에서도 몇 번이나 고민했다.


“저, 지혜야.”

“응?”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나를 바라보는 지혜에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뜸을 들일까.”

수상한 듯 눈을 흘기며 묻는 지혜에게 지나는 얼른 말을 바꿨다.


“요즘 클럽 갈 때 말야. 옷을 뭐 입지?”

“크리스마스니까 무조건 야하게.”

“어후, 나 그런 옷 없잖아.”

“제가 빌려드릴까요?”

어디선가 나타난 윤주의 목소리에 지나와 지혜가 깜짝 놀랐다.


“제가 옷이 좀 많아서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하는 윤주에게 지나와 지혜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사이즈가 맞을까? 윤주 씨는 워낙 몸매가 뛰어나서.”

“이 대리님 정도면…….”

윤주가 스캔하듯, 지나의 몸을 가볍게 훑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지나가 배를 가렸다.


“충분히 입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머, 윤주 씨, 나도 빌려줄 수 있어?”

지혜가 대뜸 입을 열었다.


“옷을 회사로 가져올 수 없으니까, 시간 되시면 저희 집에 한 번 오실래요?”

“콜!”

지혜가 크게 외쳤다.

세상에……. 일이 점점 커진다. 당황한 지나는 어색하게 미소만 지었다.

퇴근 후, 세 여자는 윤주네 집으로 향했다.


“여기서 혼자 지내는 거예요?”

“네.”

윤주의 집은 작고 아담한 아파트였다. 꽤 높은 층이라 베란다 너머 보이는 도심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혼자 살기 너무 깨끗하고 좋다.”

아직까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지혜가 감탄했다.


“편하게 앉으세요. 저녁이니까 따뜻한 차 타드릴게요.”

얼른 옷을 갈아입고 나온 윤주가 익숙하게 부엌으로 향했다.


“어휴, 됐어요. 신세 지러 온 건데…….”

지혜가 손사래를 치자 윤주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차피 저도 마시려고요. 괜찮아요.”

지나는 천천히 집 안을 살폈다. 확실히 안목이 뛰어난 윤주답게 가구나 소품들이 세련되고 예뻤다. 북유럽 브랜드 찻잔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윤주가 다가왔다.


“이혼 소송에서 제가 이겼어요. 위자료로 받은 돈으로 구한 거예요.”

묻지도 않은 질문을 서슴없이 하는 윤주의 표정은 밝았다.


“아, 그렇구나.”

너무나 깊은 사적인 상황까지 알아버린 지혜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과장되게.


“어차피 제가 이혼한 거 다 아시니까 말씀드리는 거예요. 숨길 필요도 없고요.”

짧은 기간에 깊은 상처를 받은 윤주는 의외로 씩씩해 보였다. 그 모습에 지나가 옅은 미소와 함께 그녀를 축하해줬다.


“승소 축하드려요. 하마터면 윤주 씨가 없는 죄까지 뒤집어쓸 뻔했어요. 회사까지 본의 아니게 사직할 뻔,”

“다른 무엇보다 그 사람이 죗값을 받아서 다행이에요.”

지나의 말을 자른 윤주가 조금 민망한 얼굴로 지나를 바라봤다. 그와 어울려 지나에게 했던 과거의 일들은 시간이 흘러도 떨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러게요.”

지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유자차 맛있네.”

먼저 찻잔을 들고 홀짝이던 지혜가 대뜸 소리쳤다.


“저희 엄마가 직접 담가서 보내주신 거예요.”

윤주가 한결 환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어머, 역시.”

“지나 대리님도 드셔보세요.”

“응, 그럴게요.”

지나가 빙긋 웃었다.


“옷은 어딨어요? 그날 윤주 씨도 같이 클럽 가면 되겠다.”

지혜가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그녀의 질문에 윤주가 한결 비장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시죠.”

닫혀진 방문이 열렸다. 불이 켜짐과 동시에 삼면을 가득 채운 행거에 걸린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박.”

저도 모르게 지혜가 탄성을 내질렀다. 정말이지 백화점에 전시된 옷들을 방불케 하는 장면이었다.


“이거 엄청 비싼 브랜드인데?”

홀린 듯 지혜가 옷들을 살피며 꿈꾸듯 말했다.


“제가 어리석었죠. 겉치장만 잘하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볼 줄 알았어요.”

“이 옷장은 성공했어. 암, 그렇고말고.”

혼잣말처럼 지혜가 대꾸했다. 그 바람에 지나와 윤주가 피식 웃었다.


“이 대리님은 이 옷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윤주는 미리 봐둔 것처럼 한쪽에서 옷 한 벌을 꺼냈다.


“결혼하면 이제 클럽도 못 가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시고. 저는 임신하고 갔다가 완전 나쁜 며느리로 찍혀서…….”

안 좋은 추억이 떠오른 듯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윤주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분위기를 바꿔 물었다.


“이거 어때요?”

그녀의 손에 들린 옷은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짧은 원피스였다.


“어우. 이건 너무 과한데…….”

힐끔거리며 윤주가 든 옷을 살핀 지혜가 거들었다.


“이런 옷은 가슴이 좀 있어야 예뻐. 우리가 입으면 뽕 무게가 더 나갈걸.”

“어? 아닌데. 지나 대리님 가슴 꽤 큰 거 같은데요.”

윤주의 말에 지나가 흠칫 놀랐다.


“자기 나 몰래 뭐 했어?”

지혜가 고개를 돌리고 장난스레 물었다.


“하긴 뭘 해. 그냥 속옷을 바꿨더니…….”

얼버무리는 지나에게 원피스를 안기며 윤주가 눈을 찡긋거렸다.


“속옷도 바꾼 김에 옷도 한번 바꿔보죠.”

아, 큰일 났다.

단단히 작정한 듯 보이는 두 사람 앞에서 지나는 마른 침만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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