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 좋은 밤 (68/80)


68 좋은 밤
2023.03.24.



 


“대박.”

기어이 지나에게 원피스를 입히고 만 두 여자의 입이 벌어졌다.


“내가 알던 가슴이 아닌데?”

지혜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살쪄서 그래.”

당황한 지나가 얼버무리며 슬쩍 배를 가렸다.


“이런 귀한 가슴을 여태 꼭꼭 숨기고 다녔단 말야?”

지혜가 괘씸하다는 듯이 우스꽝스럽게 미간을 찡그렸다.


“이거 못 입고 가겠어.”

“어허.”

지혜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입소리를 냈다.


“그날 클럽이 아주 뒤집어지겠구만.”

“대리님, 결혼 전에 즐기세요. 제 진심 어린 조언이에요.”

윤주까지 거드는 바람에 지나는 더 말하지 못했다.


“네.”

숨조차 쉬기 어려운 갑갑함에 지나는 일단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난 이거 어때?”

지나 못지않게 튀는 빨간 미니스커트를 어디선가 찾아온 지혜가 옷 위에 대며 흔들었다.


“예뻐요. 레드 컬러가 잘 받으시네요. 지혜 대리님.”

“어머, 그래요? 윤주 씨한테 칭찬받으니까 진짜 잘 어울리는 느낌인데?”

잘 나가던 사무실 내의 패셔니스타에게 인정받은 지혜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저희 술 한잔 어때요?”

분위기에 휩쓸린 지혜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어우, 좋죠.”

“저는 술 못 먹어요.”

당황한 지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윤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리님, 커피도 못 드시고, 술도 못 드시고, 살은 전보다 좀 붙었고, 혹시…….”

윤주의 추측에 지나는 긴장한 듯 숨쉬기를 멈췄다.


“헬리코박터균 검사해보셨어요?”

후, 다행이다.


“위 검사했는데 별 이상은 없대요. 그냥 조금 헐었다고 자극적인 거 먹지 말래서.”

지나가 얼른 둘러댔다.


“대리님, 임신 전에 미리미리 체크하셔야 해요. 임신하면 몸이 확 망가지는 게 느껴져서.”

“윤주 씨, 고생 많이 했죠?”

지혜가 알만하다는 듯이 윤주에게 말했다.


“뭐, 다 그 정도는 하는 줄 알았으니까요. 제가 너무 몰랐나 봐요. 그냥 다 비밀로 할 걸 그랬어요. 연애도, 결혼도, 임신도.”

그녀의 목소리는 씁쓸했다. 분명 이런 미래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을 터였다.


“그게 그렇게 되나. 한 사무실에서.”

지혜가 달래듯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그래요. 힘들었겠어요.”

지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대리님들은 절대 비밀 엄수하세요. 알려지면 여자만 온갖 추문이 다 붙더라고요.”

윤주가 신신당부했다. 그녀의 말에 지나는 슬쩍 꺼내려던 말을 꾸역꾸역 삼켰다.

지나가 불안해하던 것이었다. 진우가 없는 지금 홀로 밝히기에 두려웠다.


“그렇겠죠.”

지나가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하여간 사내 연애가 힘들어. 난 그러니까 클럽에서 잘생긴 남자 잡아야지. 다른 회사 다니는 사람으로.”

지혜가 옷걸이를 휙휙 넘기며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지혜 대리님, 팍팍 밀어드릴게요.”

“오, 고마워요. 나 윤주 씨가 점점 좋아지려고 해. 사실은 이렇게 유쾌한 사람인 줄 몰랐잖아요.”

“이제라도 알아봐주셔서 감사해요.”

지헤와 윤주의 정겨운 대화가 이어졌다. 그 사이에서 지나는 외딴 섬처럼 홀로 멍하니 서 있었다. 함께 웃고 있었지만 웃을 수 없었다.

우우웅.

때마침 지나의 휴대폰이 울렸다.


[곧 크리스마스네요. 누나 이브날 약속 있어요?]

진우의 문자였다. 지나는 바로 답장할 수 없었다. 그에게 거짓말도, 진실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손길에 흔들리는 옷걸이처럼 지나의 마음도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

쾅쾅. 심장까지 울리는 클럽의 소음이 귓가를 때렸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저녁, 기어이 오고 만 클럽 입구에서 지나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서울 시내 5성급 호텔 안에 위치한 클럽은 일반 클럽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어유, 춥다. 얼른 들어가자.”

지혜가 지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과연 이래도 될까. 오후부터 진우가 남긴 여러 번의 부재중 전화와 배 속의 아기까지 모든 것이 지나의 발길을 무겁게 했다.

마지막까지 머뭇거리던 지나의 안색은 어두웠다. 확실히 연말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로 클럽 앞은 북적거렸다.


“남친 한국에 있으면 이런 데 못 온다?”

지혜가 눈을 크게 치뜨며 지나를 재촉했다.


“그런데 나 배가 조금 아파…….”

“어?”

안절부절하던 지나가 결국 아랫배를 가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많이 아파?”

“화장실 좀 갔다 갈게. 먼저 들어가 있어.”

“알았어.”

지혜와 윤주가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 서 있던 웨이터가 그녀들을 향해 큰소리로 인사했다. 지나는 괜히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돌리는데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혔다.


“아야.”

“잘 좀 보고 다녀.”

어깨에 치인 사람은 지나인데 되레 술에 취한 남자가 성질을 냈다.


“죄송합니다.”

지나는 옷깃을 보다 더 움켜쥐고는 연신 사과를 하고 클럽 앞을 빠져나왔다. 지혜에게 거짓으로 둘러댔던 것처럼 아랫배가 묘하게 아파왔다.


‘잠깐만 앉아 있어야겠다.’

주변을 둘러보던 지나의 눈에 밝게 불이 켜진 호텔 로비가 보였다. 클럽뿐 아니라 로비도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복잡해 보였다.

임신한 몸은 금방 피곤해졌다. 호텔 로비에 위치한 소파에 앉자 찌릿하게 아팠던 배도 가라앉았다.


“진우에게 연락해야겠다.”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클럽에서 멀어지자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던 죄책감도 한결 가벼워졌다.


“딱히 속인 건 아니지. 말만 안 한 거니까…….”

지나가 중얼거리며 클러치백에서 휴대폰을 찾았다.


‘어? 휴대폰이 어딨지?’

가방을 뒤적이는 지나의 얼굴에 당황함이 스쳤다. 술 취한 남자와 부딪힐 때, 떨어뜨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외투 주머니가 가뜩이나 얕아 아슬아슬하게 입을 때 조금 불안했었는데.


‘나가봐야겠다.’

급한 마음에 벌떡 일어난 지나의 눈에 어딘지 익숙한 남자가 보였다. 호텔 데스크에 서 있는 남자는 지나가 그리워하는 누군가를 무척 닮았다.

커다란 키에 딱 벌어진 어깨, 다부진 체형에 딱 맞아 떨어지는 고습스러운 코트까지.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진우는 미국에 있는데……. 아무래도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조금이라도 비슷한 사람을 보면 그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그 남자 옆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살짝살짝 보이는 옆모습만으로 빼어난 미녀인 걸 알 수 있었다.


“네. 오늘 밤 예약했는데요.”

남자의 목소리에 휴대폰을 찾으러 로비를 지나가려던 지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 목소리는 오해하려야 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서진우……?”

심장이 쿵쿵 뛰었다.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기세 좋게.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설마.

설마.

설마.

그녀의 목소리에 남자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몇 달 동안 그리고 그리던 얼굴이었다. 눈을 감았다 떠도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지나 누나?”

지나를 발견한 진우가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서진우가 왜 여기에.

저 여자는 또 누구지.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누나가 왜 여기에 있어요?”

진우가 성큼 다가왔다. 그의 눈빛은 이내 반가움으로 물들었다. 한달음에 다가온 진우는 지나에게 팔을 뻗었다.


“놔.”

진우의 팔을 거칠게 뿌리친 지나의 행동에 그는 놀란 듯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일이에요.”

“넌, 너야말로 여기 왜.”

진우의 뒤로 싱긋 웃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자꾸만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외국인처럼 보이는 그녀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진우야. 오랜만에 한국 오니 확실히 화장실이 좋네.”

어디선가 중년 여성이 나타났다. 누가 봐도 진우와 닮은 얼굴에 진우의 어머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나는 순간 벌어진 외투를 여몄다. 하지만 그 찰나 진우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어머. 아는 분이셔?”

진우와 지나가 가까이 있는 모습을 보고 진우 어머니가 물었다.


“제가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어머니.”

진우는 태연한 척, 얼른 어머니에게 지나를 소개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이지나입니다.”

지나가 서둘러 공손하게 인사했다. 도대체 어떻게 되는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어머나, 진우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진우한테 들은 것보다 훨씬 예쁘네.”

“가, 감사합니다.”

“호텔 체크인했으니까 엄마 올라가서 푹 쉬어요.”

진우는 카운터에서 받은 키카드를 어머니에게 건넸다.


“고맙다. 다음에 또 뵈어요.”

진우 어머니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때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휴대폰 혹시 잃어버리신 분 맞으시죠?”

클럽 입구에서 손님들에게 우렁차게 인사하던 웨이터였다. 아마 지나가 입구에서 몸을 돌릴 때, 그녀를 본 모양이었다.


“맞아요. 감사합니다.”

웨이터의 등장에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졌다.


“다음에 또 찾아주십시오.”

판에 박힌 멘트를 던진 웨이터는 온 것처럼 번개처럼 사라졌다. 누가 봐도 지나가 클럽에 왔다 간 것 같은 상황이었다. 하필, 처음 뵙는 진우 어머니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최악이었다.


“난 이만 올라가 볼게. 갑자기 피곤하네.”

예상대로 한결 가라앉은 냉랭한 목소리로 진우 어머니가 쌩하니 걸어갔다.


“좋은 밤 되세요. 어머니.”

당황한 지나가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인사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전무님, 감사합니다.”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던 클로이가 사뿐히 다가와 인사했다.


“네.”

진우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목소리로 차갑게 대답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클로이 역시 회사 일로 인해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미국 기업들과의 굵직굵직한 미팅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진우가 갑자기 한국에 들어와야 했기 때문에 급박하게 진행된 일이었다.


“클럽……?”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지나의 귓가에 진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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