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 내가 사는 이유 (69/80)


69 내가 사는 이유
2023.03.28.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진우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입술이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 누나 클럽도 갈 줄 알아요?”

지나를 곧게 바라보던 진우가 입매를 비틀었다. 진득한 그의 눈빛은 어떤 감정인지 읽을 수 없었다.


“이런 말 하긴 싫지만 오해야.”

“오해?”

남친 몰래 바람이라도 피운 것처럼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지나는 여민 옷깃을 꽉 쥐었다.


“지혜가 크리스마스를 혼자 지내기 싫다고 해서……. 내 몸 상태를 모르니까 거절할 핑계도 없고…….”

죄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말이 길어졌다. 순간 진우가 지나를 품에 꼭 안았다.


“미안해요. 혼자 있게 해서.”

그의 속삭임에 지나는 그가 화가 나거나 오해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이다.

그의 말에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는 함께 있어요.”

고개를 내린 진우가 지나를 향해 말했다.


“어? 미국 일은?”

“다 끝내고 왔어요.”

“일 년 걸린다며?”

최대한 빠르게 해도 일 년이 걸리는 사업이었다.


“최선을 다했어요. 누나 생각하면서.”

진우의 눈빛이 부드럽게 빛났다.


“난 그것도 모르고…….”

기다림은 그리움이 되었다. 힘이 들거나 지칠 때면 그 그리움은 아주 조금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바뀌었다.

기한 없는 기다림, 홀로 책임져야 할 뱃속의 생명,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나는 그렇게 매 순간을 꿋꿋이 버텼다.


“그동안 고생했어요. 누나.”

진우는 다시 한번 지나를 꽉 끌어안았다. 지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내린 진우는 그녀의 향기에 취한 듯 한참이나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런데 아까 어머님…….”

지나가 조심스레 묻자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결혼식에 참석하신다고 하셔서 모시고 왔어요.”

“첫 만남이 하필 이래서 어쩌지……?”

지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오늘 아주 예쁜데…….”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진우가 능청스레 말하자 지나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인사드리기도 전에 찍힌 것 같아.”

“그거 요즘 유행어 있는 거 같은데…….”

사뭇 진지한 얼굴로 진우가 말했다.


“0고백 1차임.”

그런 진우를 향해 지나가 눈을 흘겼다.


“나 진짜 진지한데…….”

“하하, 신경 쓰지 말아요. 클럽이 뭐 어때서.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친구들이랑 같이 갈 수도 있지.”

진우가 호탕하게 말했다.


“아니, 안 갔다니까.”

지나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 아가는 엄마 힘들게 안 했어?”

지나의 말에 아랑곳없이 진우가 지나의 배에 대고 물었다.


“우리도 이만 가죠.”

“어딜?”

진우는 말 대신 지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가보면 알아요. 다행히 안 늦었네.”

손목에 찬 시계를 흘낏 쳐다본 진우가 미소지었다.

호텔 로비 앞에는 진우가 부른 새까만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지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뒷자리에 다가간 진우가 영화에 나올 법한 제스쳐로 문을 열었다.


“타시지요. 아가씨.”

그의 능청에 지나가 미소를 그리며 올라탔다. 문을 닫은 진우가 차를 빙 돌아 옆자리에 올라타자 차는 천천히 출발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지나가 재차 물어도 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보다 진득해진 눈빛으로 지나의 손을 꼭 잡았다.


“누나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려고요.”

여전히 얼얼한 기분이었다. 지나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제 곁에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난 너랑 하고 싶은 게 없는데…….”

달리는 차창 너머 가로등들이 어두운 차 안을 비췄다.

지나의 말에 진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난 그냥 네가 내 옆에 있어만 줘도 좋거든.”

그녀의 티 하나 없는 진심 어린 말에 진우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안 해도 좋아.”

지나가 해사하게 웃었다. 보고 또 봐도 그가 지금 제 곁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자꾸만 웃음이 나올 만큼…….


“하…….”

진우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이를 꽉 깨문 듯 진우의 턱이 불끈거렸다. 그는 한결 가라앉은 눈빛으로 지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누나가 그러면 못 참겠는데.”

열망이 가득 묻어난 목소리는 한층 탁해졌다.


“참아.”

지나가 짐짓 엄한 표정으로 장난스레 말했다. 그것도 잠시 푸,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무슨 일을 꾸몄는지 보고 싶어.”

“하하.”

지나를 보며 못 말린다는 듯이 진우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국에 있는 3개월 동안 누나랑 하고 싶었던 것들을 생각했거든요. 함께 있었다면 평범하게 했을 데이트들이었을 텐데.”

아직도 아쉬운 듯, 진우가 지나의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괜찮아. 앞으로 할 시간이 많은데…….”

간지러운 느낌이 온몸으로 퍼졌다.


“맞아요. 앞으로 누나 곁에서 절대 안 떨어질 거예요.”

지나를 바라보는 진우가 미소지었다.


“도착했습니다.”

기사의 안내에 비로소 차 밖으로 시선을 돌리던 지나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요트?”

한강 유람선 선착장에는 꽤 고급스러운 요트 하나가 준비되어 있었다.


“요트 안 타봤죠?”

차에서 내린 진우가 요트에 먼저 올라 지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빠르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승무원처럼 말하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지나가 오르자 진우는 빨간 구명조끼를 지나에게 입혀줬다.


“우리 이거 타고 바다까지 가는 건 아니지?”

요트 운전대에 선 진우가 눈을 빛냈다.


“갈까요?”

“아, 아니!”

놀란 지나가 얼른 외쳤다.


“조금 무서워. 요트 처음 타봐서.”

진우 곁으로 바짝 다가온 지나의 말에 진우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팔에 팔짱을 끼웠다.


“꽉 잡아요.”

말과 동시에 엔진소리가 울렸다. 이내 요트는 한강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꺄.”

진우는 능숙하게 요트를 운전했다. 겨울치고 영상을 웃도는 포근한 날씨에 강바람조차 시원하게 느껴졌다.


“와, 재밌다.”

한강 양쪽의 도로를 밝힌 가로등으로 강은 어둡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밤을 닮은 강물 색으로 마치 밤하늘을 날아가는 느낌 같았다.

진우가 운전하는 요트는 이름 모를 강변에 정박했다.


“이제 내려요.”

능숙하게 먼저 내린 진우가 지나의 손을 잡아줬다. 늘 보던 한강 고수부지의 느낌이 아닌 조금 낯선 풍경에 지나가 물었다.


“섬이야?”

“섬은 아니고, 한강변에 있는 비밀의 공간?”

“비밀의 공간?”

갈대가 빽빽이 들어서 마치 벽처럼 보였다. 진우는 익숙한 듯, 갈대를 헤치며 앞서 걸었다.


“와.”

얼마나 걸었을까. 갈대밭을 지나자 넓은 공간이 보였다. 촛불 모형의 작은 램프들이 오솔길을 따라 가운데 공간까지 이어졌다. 미리 준비한 것처럼 가운데에는 근사하게 꾸며진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지?”

지나가 입을 가리며 탄성을 내질렀다. 진우는 지나의 손을 잡고 테이블을 향해 걸었다.


“누나와 한강 데이트도 하고 싶었고, 수목원 데이트도 하고 싶었고, 그리고.”

펑.

거대한 굉음에 깜짝 놀란 지나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까만 하늘을 수놓는 불꽃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팡 터졌다.


“불꽃 축제도 같이 보고 싶었어요.”

형형색색의 불꽃들이 쉴 새 없이 하늘을 꾸몄다.


“와……. 너무 예뻐.”

눈물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지나는 얼굴을 감싼 채,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약해놓은 거라 혹시라도 늦을까 걱정했어요.”

“그래서 전화했구나.”

그가 이른 오후부터 전화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했는데.”

진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나가 오늘따라 전화를 받지 않아 몇 시간이나 속을 태웠던 그였다.


“역시 운명인가 봐요.”

지나의 뒤에 선 진우가 포근히 안았다.


“연락하지 않아도 우연히 만났잖아.”

그의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였다.


“그러네. 우린 정말 운명인가봐.”

어떻게 된 건지, 서로 엇갈리는 상황에서도 자꾸만 마주치네.


“아, 음식.”

“음식?”

“혹시 배 안 고파요?”

뒤늦게 생각난 듯 진우가 지나를 데리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치킨이다!”

지나가 작게 외쳤다.


“한강 데이트면 치킨이죠.”

종류별로 포장된 치킨이 레이스 테이블보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누나가 무슨 치킨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당연히 맥주는 임신부라 안 되고.

진우가 머쓱한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고마워. 진우야.”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

그 어느 때보다.


“이제 시작인데…….”

진우가 느른한 얼굴로 말했다.


“매일매일 행복하게 해줄게요.”

내가 사는 이유니까.


“난 진짜 너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지나가 촉촉해진 눈가를 꾹꾹 누르며 발개진 얼굴로 말했다.


“원래는 여기서 시간을 좀 더 보내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요.”

지나를 바라보던 진우가 다소 성마른 목소리로 지나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어?”

“아무래도.”

진우가 지나의 손을 꼭 잡았다.


“장소를 옮겨야 할 것 같은데.”

그녀를 바라보는 진우의 눈빛이 뜨거웠다. 한여름의 햇빛처럼.


“응, 좋아.”

지나가 그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밤새 할 얘기가 많거든.”

 

***


“어머님.”

호텔 스위트룸 앞에 선 진우 어머니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늘씬한 키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미국에서부터 함께 호텔까지 온 진우 회사의 변호사라고 소개했던 여자였다.


“무슨 일이시죠?”

“혹시 필요하실까봐…….”

클로이는 리본을 묶은 와인병을 건넸다.


“어머나.”

“한국에서 구하긴 힘든 라벨이에요. 제가 혹시 몰라 미국에서 사 왔어요.”

“고마워서 어쩌지.”

때마침 바로 잠들기 아쉬웠던 진우 어머니는 흔쾌히 클로이의 선물을 받았다.


“크리스마스잖아요.”

클로이가 양손의 손가락 두 개를 구부려 보이며 웃었다.


“난 줄 게 없는데 어쩌나…….”

아무리 봐도 매력적인 여자였다. 잠시 고민하던 진우 어머니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같이 한잔할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