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완결) 영원한 여름
(7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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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완결) 영원한 여름
2023.03.31.
호텔에서 보는 도시의 야경은 마치 작은 전구들을 촘촘하게 켜놓은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트리 위 전구처럼 낭만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진우는 지나에게 입을 맞췄다. 그녀를 만나 가까스로 참은 인내심이 호텔 방문을 열며 증발해버린 것처럼.
오랜만에 맞닿은 서로의 체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텅 비었던 마음 한 곳이 비로소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불도 켜지 않은 방은 오로지 둘만의 숨소리로 가득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숨조차 삼킬 것처럼 깊은 키스가 이어졌다. 그리웠던 그의 체취에 코끝이 마비될 것 같았다. 지나는 헐떡이면서도 그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하아……. 너무 귀엽잖아요.”
결국 먼저 입술을 뗀 진우가 미소를 지었다.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지나를 바라보던 진우가 지나의 손을 눈짓했다.
“아.”
그제야 진우의 말뜻을 알아챈 지나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옷 말고……. 목 감싸요.”
진우가 부드럽게 지나의 손을 잡아 제 어깨에 얹혔다. 목을 감싼 지나와 진우의 코끝이 맞닿을 만큼 가까웠다.
“이래야 더 안 떨어지죠.”
“어?”
왜냐고 물을 새도 없이 지나의 몸이 공중으로 들렸다. 깜짝 놀란 지나가 진우의 목을 꽉 감았다.
지나를 가뿐하게 안은 진우가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무거울 텐데. 나 살 많이 쪘어.”
“앞으로 더 열심히 먹어야겠어요. 너무 가벼워서 걱정이네.”
진우의 말에 지나가 즐거운 듯 웃었다.
“맛있는 거 많이 먹여줘.”
지나를 하얀 시트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진우가 미소를 그렸다.
“각오하세요.”
다소 중의적인 말을 내뱉은 진우가 위압적으로 그녀의 앞에 섰다. 그의 그림자가 지나에게 드리워졌다.
천천히 외투를 벗은 진우가 셔츠 소매의 단추를 풀었다. 느른한 표정과 달리 진우는 미칠듯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해소되지 않는 갈증.
유일한 내 숨.
그녀를 앞에 두고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미칠 것만 같았다.
“얼마든지.”
지나가 도발하듯 다소 비장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녀의 귀여운 도발에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누나가 그러면 참을 수 없는데.”
“이리 와. 서진우.”
지나가 손을 뻗었다. 황홀하듯 아름다운 그녀의 자태에 진우는 더 이상 태연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옷은 누구 보여주려고 입은 거예요?”
꽁꽁 감싸고 있던 외투를 벗기자 지혜와 윤주의 역작인 고혹적이면서도 섹시함을 빛내는 원피스가 드러났다.
“오늘 클럽을 부수자고 입었는데.”
“이 정도면 지구도 부수겠는데.”
질투 어린 눈으로 진우가 입매를 비틀었다.
“아쉽게도 서진우만 부수겠다.”
“…….”
“너만 봤으니까.”
그녀의 마지막 말에 진우는 지체 없이 고개를 내렸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 뒤로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하얀 눈송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낭만이 넘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
“안녕하세요.”
밤늦게까지 와인을 마시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클로이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조식 뷔페에 모습을 나타냈다.
“어머, 클로이, 굿모닝이에요.”
진우 어머니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클로이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어젯밤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진우 어머니는 처음에 마주한 진우의 여자친구에게 실망을 표했다.
웨이터의 등장은 마치 하늘도 클로이를 돕는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본 진우는 매우 효자였다.
예의 바르면서도 자신의 어머니를 깍듯하게 모셨다. 클로이는 진우 어머니를 공략하기로 했다. 한국까지 왔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머니, 여기 클로이라고 우리 진우네 회사 변호사예요. 아주 똑똑한 사람이에요.”
진우 어머니 앞에 앉아 있던 강복희 여사가 고개를 돌렸다.
분명 혼자 식사할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일찍 내려온 클로이는 내심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클로이라고 합니다.”
“어우, 한국말을 잘하네. 반가워요.”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에요.”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다.
“우리 시어머니신데, 이혼 후에도 저를 워낙 예뻐하셔서 제가 일부러 오시라 모셨어요. 괜찮으면 혼자 먹지 말고 같이 먹어요. 이리 와요.”
진우 어머니의 제안에 클로이가 속으로 환호성을 외쳤다.
“그럼, 그럴까요?”
민망한 얼굴로 한 테이블에 앉은 클로이가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이렇게 예쁜데 변호사라고? 남자들이 줄을 섰겠네.”
강 여사가 클로이를 칭찬했다.
“아유, 아닙니다.”
겸손한 척, 고개를 저은 클로이를 향해 진우 어머니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우리 진우랑 이어졌으면 딱 좋았을 텐데.”
듣고 싶은 말이 나오자 클로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한국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우리 손자며느리 아직 못 봤어?”
살짝 굳어진 얼굴로 강 여사가 물었다.
“어제 봤어요.”
“그런데?”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다.
“첫 만남이 워낙 자유로워서 그런가. 첫 이미지가 성실해 보이지 않아서.”
“착한 아이다. 진우가 잘 만난 거야.”
“착한 애들이야 널렸죠. 우리 진우 정도면.”
진우 어머니가 샐쭉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하면 됐다. 욕심부리지 말아라. 우리 집안이 워낙 대 잇기 힘들다는 거 알잖니.”
강 여사의 말에 진우 어머니의 기세가 살짝 수그러들었다.
“우리 진우 눈에 손자며느리뿐이더라. 남자 눈이 뒤집혀야 애도 잘 들어서는 기라.”
“아유, 어머님, 민망하게.”
진우 어머니가 다른 테이블을 슬쩍 살피며 호호, 웃었다.
“어머, 우리 진우 전화 왔네.”
때마침 온 진우 전화에 세 여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응, 진우야. 엄마 너무 편안하게 잘 잤어. 할머니까지 오라고 해서 같이 식사 중이야. 역시 우리 아들이야. 응. 응. 결혼식? 그렇게 빨리?”
순간 진우 어머니의 말이 멈췄다.
“그래. 응. 알았다.”
어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자, 강 여사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진우 결혼식 날짜 잡혔다니?”
“네……. 다음 달이요.”
“아이고, 잘됐네.”
순간, 희비가 갈렸다. 강 여사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와 달리 클로이의 얼굴이 구겨졌다.
“애를……. 애를 가졌다네요.”
쨍그랑.
클로이가 포크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진우 어머니와 강 여사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뭐? 세상에. 경사 났네. 아이고.”
강 여사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거봐라. 내가 말했잖아. 기특하네.”
“제가 벌써 할머니가 되는 건가요?”
“축하한다. 울 며느리.”
감격에 겨운 두 여자를 바라보던 클로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 보니 자신은 계단 없는 벽을 오르겠다고 한 꼴이었다.
헬리콥터라도 타고 오르려 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벽에는 문이 없었다. 너무나 늦게 깨달은 사실에 클로이는 헛헛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물만 들이켰다.
***
각오하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아침이 끝나갈 무렵, 간신히 눈을 뜬 지나는 신음소리부터 냈다. 몸이 부서지는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깼어요?”
편해 보이는 실내복을 입은 진우가 지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와 지낼 때 늘 보던 익숙한 장면이었다. 그래서 더 얄미웠다.
“왜 늘 나만…….”
간신히 낸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졌다.
“물 좀 마셔요.”
침대 끝에 앉은 진우가 물컵을 내밀었다.
“무리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해요.”
얼른 물을 마신 지나가 한결 매끄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무 도발했지.”
자조 섞인 말투에 진우가 미려한 미소를 지었다.
“누나 자체가 내게 도발이에요. 푹 자라고 커튼도 안 걷었어요. 더 자요.”
지나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진우의 깎아놓은 것 같은 얼굴을 어루만졌다.
“꿈 아니지?”
난 아직도 꿈만 같은데.
진우가 지나의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멋진 거 보여줄게요.”
“너보다 더 멋진 게 있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놀란 지나가 입을 다물었다. 작게 웃던 진우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한강을 빼고는 모든 곳이 하얬다. 동화 속 세상처럼 아름다운 광경에 지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멋지다.”
“저보다 더 멋지죠?”
창가에 비스듬히 기댄 진우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아니.”
방금까지 감동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지나가 돌연 태세를 바꿨다.
“너보단 안 멋져.”
지나가 다가와 진우에게 안겼다.
가까워진 얼굴에 열기 어린 시선이 진득하게 얽혔다.
“오늘 하루 종일 호텔에만 있고 싶네요.”
진우가 짓눌린 목소리로 지나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크리스마슨데 그러면 안 돼?”
그의 단단하고 커다란 손에 얼굴을 비비며 지나가 물었다.
“결혼 준비해야죠.”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지나의 눈이 흠칫 커졌다.
“결혼?”
그녀의 놀란 표정에 진우가 입꼬리를 휘었다.
“누나랑 결혼하려고 최대한 빨리 끝내고 달려온 건데.”
일 년 뒤에나 가능할 거라고 혼자 생각했던 지나였다. 그래서 부풀어가는 배를 보며 혼자 심란해했었다.
“배 나오기 전에 웨딩드레스 입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누나는 배 나와도 예쁘겠지만.”
나름 따로 공부한 모양이었다. 진우가 따뜻한 눈길로 말했다.
“아침 일찍 어머니께는 말씀드렸어요. 한 달 뒤에 결혼식 올리겠다고.”
“한 달 뒤?”
생각보다 훨씬 빠른 날짜였다.
“그렇게나 빨리?”
“난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데…….”
동그랗게 커진 지나의 눈동자에 진우의 부드럽게 접혀진 눈매가 비췄다.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심장이 둥둥 울렸다.
“미국 떠나기 전에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갔다 와서 들려준다고 했던 말 궁금해.”
진우를 만났을 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
진우가 나지막하게 소리를 냈다.
“지금 얘기할까요?”
진우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시종일관 여유로웠던 그의 모습이 어딘지 조급하게 보였다.
“응.”
지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긴장한 얼굴로 진우가 숨을 작게 들이마시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지우.”
지나가 묻기도 전에 진우가 얼른 덧붙였다.
“우리 아이 이름 생각해봤는데……. 그때 말하기는 조금 이른 것 같아서. 누나에게 부담만 주고 가는 것 같아 차마 말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지나의 지, 진우의 우. 그래서 지우.
지나가 입속으로 작게 이름을 굴렸다.
“예쁘다.”
“마음에 들어요?”
“응.”
해사한 겨울 햇살이 호텔 창을 통해 진우와 지나에게 쏟아졌다. 그 맑은 빛을 닮은 지나의 투명한 미소가 더없이 예뻤다.
“사랑해요.”
밤새 지나에게 속삭이고 속삭였던 말이었다. 수만 번 말해도 부족한 단어에 진우는 지나에게 고백할 때마다 갈증을 느꼈다.
“세상에서 제일 많이.”
“나도 사랑해.”
지나의 고백까지 삼켜버릴 것처럼 지나의 뺨을 그러쥔 진우가 입술을 내렸다. 입술에서 시작된 온기가 천천히 퍼졌다. 겨울조차 덮을 뜨거움이었다. 지나의 귓가에 오래전에 들었던 매미 소리가 아득하게 울렸다.
그는 영원한 지나의 여름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