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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외전5) 어둠 속의 벚꽃처럼 (75/80)


75(외전5) 어둠 속의 벚꽃처럼
2023.04.18.



“뭐가?”

지나가 뜻밖의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그냥 다…… 미안해요.”

진우가 쓸쓸한 표정으로 지나에게 한 번 더 사과했다.


“네가 미안할 일이 뭐가 있어.”

지나는 진우를 위로하듯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냥 네가 많이 힘들었구나, 싶었는데.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뭘까.”

“누나는 이미 나에게 과분하게 해줬는걸요.”

지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진우의 눈빛이 촉촉하게 빛났다.


“회장님……. 괜찮으시겠지?”

지나가 걱정스레 조심히 물었다. 진우는 대답 대신 지나를 품에 안았다.


“걱정 말아요. 할머니 말씀대로 우리 생각만 해요.”

그의 품에서 좋은 향기가 흘렀다. 지나의 마음을 두근두근 설레게 하는 향기였다. 하지만 지나는 오늘따라 그 향기에 마음이 조금 아팠다.

늘 지나 앞에서 웃고 미소지으며 아낌없이 사랑만 부어준 남자의 그늘진 부분이었다.


“절대 회장님 때문에 누나에게 피해 가게 안 할거예요.”

“그래서 회장 승계받지 않겠다고 결정한 거야?”

자신이 관여할 부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나는 진우의 결정이 자신 때문에 그릇될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사적인 감정 때문만은 아니에요. 모든 걸 염두에 두고 고민 많이 했어요.”

“그래. 나도 널 믿어. 그게 뭐든 너에게 나쁜 결정이 아니라고 믿어.”

지나의 말에 진우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고마워요. 누나.”

그가 고개를 숙여 지나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나한테 실망했을 텐데…….”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지나의 가정은 돈이 많지는 않았지만 행복했다. 평범하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던 지나로서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바람난 아버지와 집 나간 어머니, 그 사이에서 어머니를 위로하며 살아온 아들. 사랑 때문에 상처 주고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녀에게 생소하면서도 익숙했다.


“진우야, 저것 좀 봐봐.”

지나의 말에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까만 밤하늘에 벚꽃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간간이 불어오는 봄바람에 벚꽃들이 흔들렸다.


“벚꽃이요?”

진우가 벚꽃들을 바라봤다.


“낮보다 밤에 벚꽃을 보니까 더 예뻐서.”

“그러네요.”

어둠에 대비된 흰 벚꽃은 검은 도화지에 그려놓은 수묵화처럼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너에게 실망한 적 없어. 실망하지도 않을 거고.”

“…….”

“까만 밤이 벚꽃의 아름다움을 도리어 부각시켜주는 것처럼.”

지나가 시선을 돌려 진우를 바라봤다.


“너 역시 그래. 어떤 어둠도 널 깎아내리지 못해. 오히려 더 널 빛나게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지나의 말에 진우는 잠시 입을 떼지 못했다.


“하……. 고마워요.”

어딘지 벅차오르는 듯한 한숨을 내쉰 그가 가까스로 미소지었다.


“그래서 누나인가 봐요. 내 밤마저 아름답다고 봐주는 사람이라.”

마주친 시선이 가까워졌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진우가 지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솨-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바람결에 벚꽃잎들이 흩날렸다. 비처럼 쏟아지는 벚꽃잎 사이에서 진우와 지나는 한참 동안을 서로의 온기를 갈구했다.

***



“자기 몸 괜찮아?”

사무실에 나타난 지나의 모습에 지혜와 윤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어제 진통이 아니었어. 걱정 끼쳐서 미안해.”

“뭐가 미안해. 내가 다 졸았지 뭐야.”

“가진통 같은 거였나봐. 출산이 임박했다는 징조?”

지나의 말에 지혜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난 진짜 아기 낳는 거 생각 좀 해봐야겠다.”

그녀의 목소리에 지나가 피식 웃었다.


“자기를 위해서라도 생생하게 전달해줄게.”

“아으.”

지혜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제 모두들 도와줘서 감사하다고 진우가 전해달래.”

“아유, 우리가 뭐 도운 것도 없는데……. CS 부서의 유 대리님의 역할이 컸지.”

지혜의 말에 지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라마즈 호흡까지 아실 줄은 몰랐어.”

“결혼해서 애 낳았나? 안 그러면 남자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나중에 만나면 인사해야겠다.”

“유 대리님이요.”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윤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결혼 안 하신 거 같은데…….”

“그걸 윤주 씨가 어떻게 알아?”

지혜가 묻자 윤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제 우연히 알게 됐는데 저랑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더라고요.”

“어머, 정말? 왜 여태 몰랐대?”

“최근에 이사 오신 거 같았어요. 저번 주에 이삿짐센터 트럭을 봤거든요.”

“그런데 같은 단지에 사는 걸로 결혼 유무를 어떻게 알아?”

“그게…….”

윤주가 잠시 말을 멈췄다. 지나와 지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주를 재촉하듯 뚫어져라 바라봤다.


“저희 옆집이더라고요.”

윤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나와 지혜의 입이 벌어졌다.


“대박. 이 정도면 운명 아니야?”

지혜가 호들갑을 떨었다.


“혼자 사는 남자분이 이사 온다는 말은 들었었거든요. 단지 앞 부동산 소장님이랑 친해져서 오다가다 들은 건데……. 아무튼 그래요.”

“참, 세상이 좁다.”

“그러니까…….”

“나중에 같이 카풀하면 되겠네.”

지혜가 부럽다는 듯이 말하자 윤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버스 타고 다니세요. 어제 하필이면 같은 버스 타고 가서요.”

“어제만?”

어딘지 집요한 지혜의 눈빛에 윤주가 포기한 듯 대답했다.


“오늘도요.”

“이렇게 회사 커플이 또 탄생하는 건가.”

지혜가 호기롭게 말하는데 윤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는…… 두 번 다시는 사내 연애 안 하려고요.”

윤주가 씁쓸하게 말하고는 먼저 자리를 피했다. 뒤늦게 지혜가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아……. 주책이네. 주책이야.”

윤주가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어서 잊고 있었던 사실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지나 역시 잊고 있었던 사실들이었다. 아직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일들이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는 얼굴은 색이 바랜 흑백사진처럼 희미했다.


“가서 일이나 해야겠다. 이따 봐, 자기.”

입을 가볍게 톡톡 치던 지혜가 민망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것도 사랑이다니?’

어제 병실을 울리던 강 여사의 목소리가 순간 떠올랐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지옥이었다. 잘못된 사랑은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그것은 비단, 진우의 가족만 겪은 일이 아니었다. 지나도 겪은 일이었다. 그래서 지나는 진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가족들이 겪은 슬픔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윤주 씨도 언젠가는 완전하게 치유되기를…….’

누구도 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지나는 그저 속으로만 그녀를 응원할 뿐이었다.

***

하루종일 흐리던 하늘은 결국 퇴근 시간부터 비를 뿌렸다. 회사를 나온 윤주는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집 근처 선술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집 앞에 선술집은 혼술하기 적당한 규모였다. 주인이 혼자 운영하는 술집답게 작고 사람도 거의 없었다.


“사케 한 병만 주세요.”

속에 씁쓸함이 고인 날이면 윤주는 혼자 이곳에 와서 술을 마셨다. 오늘은 비까지 와 더 처량한 모습이었다.


“어?”

바 테이블에 앉고 나서야 자신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다는 걸 깨달은 윤주가 입을 벌렸다. 그것도 일면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유 대리님……?”

윤주의 목소리에 유 대리가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한 박자 늦게 그가 인사했다. 술에 취하지 않는 깔끔한 그의 모습은 지나에게 라마즈 호흡을 가르쳐줄 때와 사뭇 달랐다.

윤주의 앞에 술병과 잔이 놓였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은 함께인 듯, 아닌 듯, 술을 마셨다. 대화 하나 없어서인지 불편했다. 술을 연거푸 들이마셔도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계산을 마친 유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주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유 대리가 먼저 선술집을 나갔다.


“후…….”

그가 나가면 한결 편해질 줄 알았는데……. 윤주가 허탈하게 웃었다. 어째서 더 답답함이 차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반도 마시지 않는 술병을 그대로 두고 결국 윤주는 가방을 들고 선술집을 나왔다.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아까운 벚꽃 다 지겠네.’

윤주가 혀를 차며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집까지 뛰어가려는 찰나, 윤주 앞에서 우산이 팡 터졌다.


“우산 없으시죠.”

유 대리였다. 자신보다 일찍 나간 유 대리의 모습에 윤주의 표정이 굳었다.


“저는 집이 근처라서 우산이 필요 없습니다.”

“네? 아, 감사한데 괜찮.”

윤주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유 대리는 우산을 윤주의 손에 들려주고는 빗속으로 먼저 걸어가버렸다. 마치 그녀에게 우산을 주기 위해 기다린 것처럼.


“아……. 옆집인 거 모르시나 보다…….”

그렇다고 윤주가 먼저 아는 척할 수도 없었다. 잠시 당황하던 윤주는 할 수 없이 우산을 들고 걸었다.


‘우산도 유 대리님 닮았네.’

존재감 없고 무뚝뚝한 유 대리의 스타일처럼 손잡이까지 온통 검은색인 우산에서 유 대리의 향기가 은은하게 났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던 윤주가 얼른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두 번 다시 사내 연애는 안 하기로 했잖아.’

윤주가 겪은 일을 회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는 윤주를 불쌍한 눈으로 바라봤고, 누군가는 윤주를 비난의 눈으로 바라봤다. 어디까지 얼마나 소문이 퍼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유 대리 또한 자신의 소문을 알고 있을지 몰랐다.


‘어떤 기대도 하지 말자. 그냥 회사에서는 회사 일만 하면 돼.’

윤주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직도 생각해봤지만 아직 경력이 적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떠나는 건 억울했다.


‘일만 하자. 일만.’

어느새 집에 도착한 윤주는 흠뻑 비에 젖은 우산을 탁 접었다. 잘 말려서 옆집 문고리에 걸어둘까도 싶었지만…….


‘더 이상 엮이지 말자.’

우산 하나쯤이야 잃어버려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

여전히 창밖으로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을 접자 희미하게 맡아졌던 유 대리의 냄새는 비 냄새에 금방 사라졌다.

윤주는 미련없는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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