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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외전10) 오늘보다 내일 더 (80/80)


80(외전10) 오늘보다 내일 더
2023.05.05.



 
심장이 울렸다. 진우의 목을 감싼 지나가 진우를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


“뭐야, 그게…….”

순간 목이 멨다. 진우의 진심에 마음이 찌르르 울렸다. 장난을 칠 여유가 사라졌다.


“셋은 낳아달라고 할 줄 알았더니.”

겨우 위기를 넘기고 지나가 가까스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지우 하나면 충분해요.”

진우가 지나를 곧게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제가 최선을 다해 참아볼게요.”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진우의 목소리가 익살스러웠다. 이번에는 제대로 진우를 향해 눈을 흘길 수 있었다. 진우가 지나를 똑바로 고쳐 안았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였다. 제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여자를 꼭 안았다.


“사랑해요.”

진우의 뜨거운 고백이 지나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도 사랑해.”

지나가 작게 속삭였다.


“어머머, 눈 떴어.”

작은 소란에 둘의 시선이 다시 아기에게 향했다. 잠에서 깬 눈을 뜬 아기의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났다.


“오구구, 내 새끼.”

지나 엄마가 아기를 얼렀다. 지나와 진우 역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쁜 아기의 눈동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나를 안은 진우의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자신의 전부인 그녀를 진우는 절대 놓지 않을 것이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

차 한 잔이 술 한 잔이 되어버렸다.


“유 대리님, 잘 버티셨네요.”

“……윤주 씨도요.”

씁쓸한 미소를 지은 유 대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에게 배신당했다. 아기가 죽고 나서야 자기 아기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 모든 사실에 원체 말이 없던 남자는 더욱 자기만의 세상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버티니까 살아가지더라고요.”

윤주가 작게 중얼거렸다.


“유 대리님도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요.”

“……윤주 씨는 행복합니까?”

유 대리의 깊은 눈매가 윤주에게 향했다.


“감히 행복……해지려고요.”

윤주가 빈 술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래야 그분이 용서해주신대서요.”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유 대리가 술잔을 털었다.


“좋은 분이군요.”

“네.”

“저도 윤주 씨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떨어졌던 윤주의 시선이 유 대리에게 향했다.


“좋은 친구요.”

유 대리가 옅은 미소를 그렸다. 미소에 반해 눈빛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윤주가 그를 따라 미소를 그렸다.


“좋아요.”

비슷한 상처를 갖은 사람을 만났다. 혼자만 앓고 있던 상처를 나누자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저도 좋은 친구가 될게요.”

“고마워요.”

마주친 둘의 눈빛에 웃음이 고였다. 어쩌면 아주 작은 호감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둘은 깊이 팬 상처를 조금씩 조금씩 덮어가기 시작했다.

***

서 회장이 운명했다. 향년 69세.

그의 장례식에 상주로 선 진우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담담하게 조문객을 맞이하는 그의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슬픔을 느끼게 했다.

회장답게 장례식은 성대했다. 화환을 돌려보내야 할 정도로 장례식 복도와 출입구 바깥까지 가득 찬 화환들과 쉴 틈 없이 몰아닥치는 조문객들로 인해 진우는 조금도 쉴 수 없었다.

서 회장이 아버지로서는 실격이었어도 회장으로서는 꽤나 명망 있는 존재였는지 지방의 중소기업들도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줄지어 왔다.

아주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진우는 잠깐 쉴 수 있었다. 세희는 상주로 서지 않았다. 상주로 이름조차 올리지 않았다. 그녀는 장례식 내내 까만 상복을 입고 손님들 틈바구니에 앉아 있었다.


‘회장님은 나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어.’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미안해했다는 일준을 회상하며 세희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공식적인 그의 가족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자식을 낳으면 올려줬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결국 자식을 낳지 못했고……. 우린 그냥 그대로 살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한 남자의 비공식 여자가 되어 살았던 세희였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진우는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진우야. 그게 마지막까지 아버지가 너에게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었나봐.’

고작 그깟 걸로…….

아버지와 아들로서 함께할 수 있었던 시간들을 대신할 수 없었다.


“할머니…….”

장례식장 한쪽에 멍하니 앉아 있는 강 여사는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하나뿐인 아들에게 모진 말만 남긴 그녀였다.


“뭐라도 좀 드세요.”

“괜찮다.”

강 여사는 물기 어린 눈으로 진우를 향해 애써 미소지었다.


“너야말로 뭐라도 먹어라.”

앞서 간 아들의 영정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는 강 여사는 아들에게 굴었던 기운이 다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장례식 마지막 날, 지나가 찾아왔다. 몸을 풀고 한 달이 되지 않은 시기라 진우가 지나에게 오지 말라 몇 번이나 일러둔 뒤였다.


“누나, 여긴 왜.”

“아버님 마지막 가시는 길이잖아. 당연히 와야지.”

검은 상복을 입은 지나가 영정사진 앞에 국화 한 송이를 두고 고개를 숙였다. 진우는 그런 지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고마워요. 누나.”

“내가 같이 있어줘야 하는데…….”

“아니에요. 내일 발인이니까 끝나고 집에 갈게요.”

지나는 진우의 손을 꼭 잡았다.


“힘내. 진우야.”

진우가 지나를 향해 작게 미소지었다.


“네.”

그녀가 있기에 버틸 수 있었다.

힘든 어둠 속에서 그녀는 진우의 한 줄기 빛이었다.


“지우랑 기다리고 있을게.”

지나의 말에 진우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가 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우 엄마가 왔다. 상복이라고 보기에는 새하얀 옷을 입은 진우 엄마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영정 앞에 선 그녀는 잠시 말없이 영정을 노려봤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려고 세기의 사랑을 하셨나봐요.”

영정 속 그녀의 전 남편인 서 회장의 얼굴을 빤히 보던 진우 엄마가 피식 웃었다.


“꼴좋다 놀리러 왔는데 얼굴 보니 그럴 의욕도 안 나네요. 쓸쓸하게 잘 가요. 좋은 소리는 못 해주겠어.”

국화 한 송이조차 놓지 않은 진우 엄마가 휙 몸을 돌렸다. 조문객 속에 서 있던 세희와 눈이 마주치자 세희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언제나 진우 엄마에게 죄인이었다. 잠시 진우 엄마의 눈에서 불꽃이 튀기나 싶더니 그녀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랑이 뭔지.”

당당하게 그의 옆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그녀가 불쌍했다.


“자업자득이지.”

진우 엄마는 잇새로 씁쓸하게 중얼거리고는 장례식장을 나갔다.


“벌써 덥네.”

봄의 끄트머리였다. 여름이 한층 코앞까지 다가온 느낌이었다.

***

일 년 만에 찾은 별장은 그대로였다.

백일을 맞이하여 지우의 백일잔치는 별장에서 오붓하게 세 식구끼리 보내기로 했다.


“벌써 일 년이 지났다니.”

진우와 처음 찾았던 그때를 떠올린 지나가 미소 띤 얼굴로 푸르른 숲을 바라봤다.

숲에 가려진 나무들이 부드러운 여름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나의 파도처럼 나무들이 연달아 움직이는 모습은 바라만 봐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직도 꿈만 같아요.”

지우를 막 재운 진우가 지나를 뒤에서 부드럽게 안았다.


“미국에 같이 가주기로 해서 고마워요.”

전문경영인을 고용한 K그룹은 진우의 손을 떠났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사업을 운영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나였다. 일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열심히 일했던 지나가 떠나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것이었다.

진우의 말에 지나는 흔쾌히 회사를 그만뒀다.


“네 꿈이었잖아.”

지나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 꿈은 누나였어요.”

진우의 말에 지나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누나의 꿈은 뭐예요?”

“내 꿈은…….”

끝없이 펼쳐진 나무들을 바라보며 지나가 잠시 말을 흐렸다.


“내 꿈도 이뤘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지나가 대답했다.


“네가 이루어줬어.”

“정말요? 뭔지 궁금해요.”

진우가 지나의 길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코를 가볍게 비볐다.


“사랑하며 사는 것.”

가볍게 웃던 지나가 대답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

지나의 말에 진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내 사랑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의 목소리에 열기가 묻어났다. 지나가 살며시 몸을 돌렸다. 진우와 콧대가 닿을 듯 얼굴이 가까워졌다.


“응, 알아. 그래서 매일매일이 기대돼.”

진우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지나가 속삭였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돼.”

“사랑해요.”

진우가 지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오늘보다 내일 더.”

하루하루 흔들렸던 삶이었다.

사랑을 몰랐고 사랑에 속았던 삶이었다.


“미국 가서 뭐 할지는 정했어요?”

“일단 영어공부부터 해야지.”

한 달 뒤 출국이었다. 지우 백일이 지나고 가려 진우가 스케쥴을 뒤로 미룬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나와 진우는 가족끼리의 시간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좋아요.”

진우가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지나를 바라봤다.


“누나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눈을 크게 뜬 지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 완벽하게 지원해주는 겁니까.”

“최선을 다해볼게요.”

진우가 그녀를 보며 미소지었다.


“그럼, 지우 동생을 낳는 것도……?”

“네?”

뜻밖의 말에 진우가 깜짝 놀랐다.


“누나만 괜찮다면 최선을 다할게요.”

“조금 못 미덥긴 하지만…… 좋아.”

진우가 말하자 지나가 흡족한 얼굴로 웃었다.


“이런. 지금 당장 보여줄 수도 있는데.”

진우가 조금 짓궂은 눈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할 때, 지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순간 맞닿을 뻔한 입술이 멈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살짝 감기려던 눈이 커졌다.


“내가 갈게요.”

진우가 피식 웃으며 지나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는 지우에게 달려갔다.

그와 닿은 입술이 열감이 일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진우와 함께일 때면 늘 그랬다. 그는 언제나 지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진짜 여름이네.”

시원한 숲속에 내리쬐는 투명한 여름 햇살이 뜨거웠다. 마치 지나에게 키스한 진우의 입술처럼. 그녀를 포근히 안는 진우의 품처럼.

여름이라면 지독하게 싫었던 때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이제는 여름이 좋았다. 온몸을 감싸는 뜨거운 열기가 마치 진우 같아서.


“고마워. 서진우.”

오래오래 사랑하자.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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