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보스 스킬 쓴다-4화 (4/154)

4. 형의 믿음

“으아아아!”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던 야만인이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정현을 떨쳐냈다. 야만인의 전신에 찬란한 빛의 선이 나타나더니 몸집이 커지기 시작했다.

“나를 이렇게 몰아붙이다니 가상하구나. 이제부터 진심으로 상대해 주마.”

처음 나타날 때도 정현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는데 이제는 거의 두 배에 달하는 덩치가 되었다.

후우웅!

휘두른 주먹에 살짝 스치기만 했는데도 정현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것이 미증유의 기운이었는지 혹은 기세로 인한 압박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정타로 맞으면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건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 모습을 정현의 시선으로 지켜보던 혜미가 상도에게 말했다.

“뭐 지금까지는 칭찬해 줄 만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지.”

이전의 야만인이 단순한 몬스터였다면 2페이즈인 이제부터는 정예급이다. 그것도 장비나 스킬 없이 순수한 컨트롤로 상대해야 한다. 튜토리얼 랭크만을 목표로 하여 야만인의 모든 공격 패턴을 파훼한 사람들도 두서너 번은 죽어 나자빠지는 구간! 정현이 아무리 재능을 보인다 해도 여기서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치 않았다.

“싱겁네.”

“꾸아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야만인의 꿈틀거림이 멈췄다.

야만인을 쓰러뜨리는 데 소모된 시간은 약 10분……. 처음 5분 정도는 방어하며 관찰하는가 싶더니 5분 만에 간단하게 요리해 버렸다.

[정현25 님께서 야만인을 쓰러뜨렸습니다.]

[튜토리얼 클리어 점수가 환산됩니다.]

[1,320점]

[축하드립니다. 튜토리얼 클리어 점수 랭킹 539위를 달성하셨습니다!]

“허어…….”

“하…….”

모니터에 반짝이는 1,320점이라는 점수를 바라보는 둘의 입이 벌어졌다.

* * *

출시한 지 반년이 된 5억 명이 즐기는 게임의 랭크 539위라면 이건 엄청난 성적이다. 뭐, 점수 높다고 보상이 있는 건 아니라서 딱 거기까지지만 말이다.

게임에서 빠져나와 VR기어를 빼니 멍한 표정의 혜미 누나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상도 형의 얼굴이 보인다.

“너 어떻게 그렇게 잘해?”

“뭐가요?”

뭘 묻는지 모르겠다는 듯 도리어 되물으니 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싸우는 거 보고 반했나 보다.”

“나 연상은 질색인데…….”

내 대답에 누나의 인상이 확 일그러진다.

“나도 연하 싫거든!”

“그럼 형 같은 연상?”

“내가 고릴라를 왜!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세이온은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랬죠.”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그 전투술은 뭐고?”

“전에 게임 해 봤다니까요.”

“얼마나?”

“작업장에서 2년 했어요.”

세이온은 안 해 봤지만 가상현실 게임 경험은 풍부하다.

“야. 클로즈베타 때부터 했던 나도 튜토리얼 랭크는 상위 5%거든? 그런데 네가 0.01%라구!”

누나의 말에 님이 못하는 걸 어쩌라구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눈빛을 보니 초면에 한 대 처맞을 것 같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난 그냥 피할 만한 건 피하고, 때릴 만한 건 때린 것뿐이다.

“동생아! 넌 최고의 위튜버가 될 거야.”

형이 내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믿고 있었다능. 이라는 표정이지만…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형, 난 위튜버 한다고 한 적 없는데?”

“뭐?”

무슨 그런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듯 반문했지만 내 뜻은 단호했다.

“안 한다고…….”

“왜?”

“음, 누나 저 형이랑 이야기 좀 할게요.”

“뭐, 그렇게 해.”

혜미 누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밖으로 나갔다. 둘만이 남자 형이 먼저 물었다.

“이유가 뭔데.”

“세이온을 방송하는 위튜버가 몇 명인 줄 알아? 우리나라면 수천에 전 세계로 따지면 수만 명이야. 위튜버뿐이야? 공중파에 케이블에 중대형 플랫폼까지 따지면 이미 그쪽은 레드오션 자체야.”

“임마, 너 가능성 충분하잖아. 아까 네 실력에 혜미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형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들기며 말했다.

“형,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알아?”

“뭔데.”

“가능성이야. 아주 더러운 단어지.”

탁-

VR기어를 벗어 한쪽에 내려놓은 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은 내가 왜 가능성이라는 말을 싫어하는지 알지?”

“…….”

내가 보육원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희망적인 전망만 말하는 사람이었다. 실패에 대한 준비나 대비가 없는 사람. 결론만 말하면 주위 사람들의 돈을 모조리 끌어다 쓰고 끝내 자살했다. 그렇게 뒤에 남겨진 어머니와 나를 친척들은 모두 외면했다. 그리고 끝내 어머니도 견디지 못하고 나를 보육원에 버리고 갔다.

“가능성이라는 말은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음에도 그걸 희망적으로 포장하려 할 때 하는 말이야. 남들보다 잘 싸우는 재능? 반반한 외모? 그게 얼마나 성공 가능성을 높여 줄 거 같아?”

“그래서? 그 좋은 재능 놔두고 공장이나 다니겠다고? 임마! 실패하면 형이 일으켜 세워 줄게!”

“세상일 재능만으로 안 된다는 건 형이 더 잘 알잖아. 그리고 형도 흥신소 청산해야지. 지금껏 돈 없어서 그런 일 했던 거잖아. 그 게스트 계정 팔아서 나한테 투자할 거라면 그만둬.”

“으휴, 이 답답한 새끼…….”

“고마워, 형. 그렇지만 난 그런 가능성에 형과 내 미래를 걸고 싶지 않아.”

“닥쳐 임마. 내가 너 같은 재능이 있었으면 당장 시작했을 거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형은 호주머니에서 계정코어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그럼 이거나 다시 확인해 보자. 그 신화급이라는 게 뭔지 봐야 팔아먹을 견적이 나오지.”

“후, 알았어.”

형에게 계정 코어를 넘겨받은 난 그것을 VR기어에 끼워 넣은 후 노트북을 조작했다.

“건드리면 안 돼. 잘못하면 10억 날리는 거야.”

“귀에 딱지 앉겠다. 얼른 들어가기나 해.”

“아까도 말했지만 형을 아니까 말하는 거야.”

손을 휘휘 젓는 형에게 마지막까지 경고한 난 VR기어의 버튼을 눌렀다.

슈욱-

시스템에 들어와 곧바로 세이온을 실행시킨 후 계정 코어에 저장된 게스트 계정을 실행시켰다.

[캐릭터 상태창]

이름: 케이

레벨: 5

종족: 인간

직업: 무직

신분: 평민

명예: 0

능력치

근력: 20

민첩: 10

지능: 10

의지: 10

생명력: 100

마나: 100

미분배 능력치: 20

저항

화염 저항: 1

빙결 저항: 1

감전 저항: 1

맹독 저항: 1

스킬

스킬이터 [신화급] [1티어]

“하, 다시 봐도 두근거리네.”

스킬이터… 한글로 번역하면 스킬을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누군가는 수억을 쏟아부어도 얻지 못한 것이 신화급 스킬. 그리고 지금 그게 눈앞에 있다.

“일단 스킬 내용을 확인해 봐야지.”

펼치기를 누르자 밑으로 투명한 창이 열리며 스킬에 대한 세부 내용이 떠올랐다.

-레이드한 보스의 스킬을 흡수합니다.

보유 스킬 [없음]

흡수 조건

-단독으로 레이드한 보스의 스킬만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흡수한 보스 스킬의 위력은 보유자의 능력치에 기반합니다.

-동일한 종류의 보스를 레이드할 시 스킬 경험치가 증가합니다.

-사망 시 보유한 보스 스킬은 모두 사라집니다.

“흐음…….”

봐도 딱히 좋은 스킬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분명한 건 꽤 난이도가 높은 스킬이라는 것이다. 보스가 사용하는 스킬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한 조건이 많다. 한마디로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스킬이라는 뜻이다.

“일단 캡처해야겠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으려면 세이온을 잘 아는 혜미 누나 같은 사람에게 보이는 게 나으리라. 스킬의 펼치기를 한 상태에서 캡처를 마친 난 사진을 갈무리한 후 캐릭터의 상태창을 닫았다. 이제 나가면 끝이다. 그런데…….

“로그아웃을… 응?”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현재 시스템 권한의 1순위는 외부 입력으로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외부에서의 명령에 내가 저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용자 권한이 제한되었습니다.]

[완료]

[게스트 계정을 동기화하시겠습니까? 경고: 기존의 계정은 삭제됩니다.]

-OK

[기존의 계정 삭제에 동의하십니까?]

-OK

[사용자 계정의 삭제 시 그 어떤 방식으로도 복구하실 수 없습니다. 진짜 삭제를 진행하시겠습니까?]

-OK

[기존 계정의 삭제 및 게스트 계정의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게스트 계정의 동기화 완료!]

“뭐, 뭐야!”

[로그아웃]

“형! 이게 무슨 짓이야!”

VR기어를 내팽개친 난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형에게 외쳤다.

“뭐가.”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내 마음이야.”

“아니, 지금 얼마짜리를 날린 건지 알아? 그걸 왜 내 계정으로 연결해!”

“날리긴 뭘 날려. 투자야.”

“투자는 무슨 투자야! 나 세이온 안 한다고! 그리고 내 성격에 위튜버가 어울릴 것 같아?”

“그래? 그럼 아깝게 됐네. 쉴 때 가지고 놀아.”

“아까워? 이게 아깝다는 말로 끝날 일이야?”

이 답답한 형은 방금 10억을 허공에 날려 버렸다. 아니, 최소 10억이다. 그런데 이렇게 태평하게 말하다니! 그러나 뒤이은 형의 말에 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뭐라고 하냐. 동생 놈이 게임을 그리 잘하는데! 가능성이 보이는데! 실패가 무섭다고 징징거리는데 그 가능성 좀 높여 주고 싶어서 한 건데! 내가 뭐 잘못했어?”

“뭐, 뭐?”

순간 말문이 막힌다.

“너 이제 19살이야. 누구 말마따나 도전도 해 보고 실패도 해 보고 해야 할 나이라고! 비록 너나 나나 꼴이 이래서 다시 일어나려면 고생 좀 할 테지만 한 번쯤은 너한테 기회라는 걸 주고 싶었다.”

“그거… 10억짜리 기회거든?”

“아! 더 이상 말 꺼내지 마. 속 쓰린다.”

“하아… 형, 대체 왜…….”

그 돈이 가지는 가치는 나보다 형이 더 잘 알 것이다. 나보다 사회생활 더 오래 했으니까. 막말로 피로 이어진 형제자매도 단돈 천만 원에 칼부림이 나는 세상이다.

“동생이잖아. 아냐?”

“…….”

형의 말에 난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가슴이 울컥하고 치밀어 오른다.

“형은 네가 성공할 거라 믿어. 내가 투자한 건 단지 네가 좀 더 빨리 성공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일 뿐이고 그러니 정현아. 한번 도전해 봐.”

젠장, 형한테 설득당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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