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보스 스킬 쓴다-11화 (11/154)

11. 희생의 롱소드

가슴은 뜨겁지만 머리는 차갑다. 놈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흙먼지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을 때 최대한 많은 정보를 확보해야 한다.

“클리어!”

“좋았어.”

“깔끔하네. 흐흐흐.”

“병호 오빠 파이어볼 던지는 솜씨는 진짜 대단해.”

넷인가. 오감이 사방으로 뻗은 기분이다.

“놀 족장 클리어 딱 끝냈을 때가 아주 맛집이라니까.”

“키킥, 그러게 말이야. 몇이나 살아남았으려나.”

“다 죽었겠지. 후후. 내 특제 파이어볼이니까.”

“무리해서 희귀 등급으로 맞춘 덕분이지.

화끈한 불 폭풍의 주인공 같다. 두 병의 소형 물약을 빨며 목소리가 들려오는 위치에 귀를 기울여 놈의 위치를 가늠한다.

“빨리빨리 처리하고 뜨자.”

“에이, 흙먼지 먹기 싫은데 좀 기다리지.”

“그러다가 저번처럼 회복해서 반격당하려고?”

“알았어. 잔소리 좀 그만해.”

수다스럽게 떠들어 준 덕분에 놈들의 위치가 대략적으로 파악되었다. 리더로 보이는 놈과 티격태격하는 놈이 가장 가깝고, 두 번째가 리더 놈, 세 번째로 멀리 서 있는 것이 여자인데 힐러로 추정된다. 마지막 가장 먼 곳에 있는 놈이 마법사다. 난 머릿속에 그려진 놈들의 위치를 분석하여 공격 순서를 정했다.

“걱정 마. 두 새끼는 즉사고, 제일 장비 좋아 보이던 탱커 놈이랑 그놈 옆에 있던 힐러 년 날아가는 거 확인했어. 나머지 하나는 그냥 어중이떠중이야.”

“정말?”

“거참, 우리가 이 짓 하루 이틀 해? 척하면 척이지.”

“흠, 그러면 얼른 정리하고 튀자. 야! 병호야. 한 방 더 갈겨.”

“그래.”

흙먼지가 걷히기 전에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하는 건…….

“바로 머리!”

츠컥!

방심 어쩌고 하던 놈이 고개 돌리고 있는 게 보인다. 네가 그딴 소리를 하면 안 되지!

광폭화로 공속과 공격력이 대폭 상승한 덕분인지 놈의 목이 단숨에 베어져 하늘로 핑그르르 떠올랐다.

퍼억!

몸을 띄워 방금 자른 머리를 뒤에 서 있는 마법사 놈에게 걷어찬 후 두 번째 목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음은 힐러!’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가 이를 질끈 깨물고는 들고 있던 방패와 메이스를 세웠다.

약탈자답게 잔인한 장면에도 동요하지 않고 곧바로 자세를 잡는다. 나 또한 무작정 돌진하지 않았다.

‘생명력은 70% 광폭화는 40초…….’

잠시 내가 가진 칩을 세어 본다. 조금 모자랄 것 같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올인이니까!

슈슈슛! 채채챙!

연달아 휘두른 공격을 힐러가 뒤로 물러나며 방패로 침착하게 받아냈다.

힐러답게 공격보다는 버티는 것에 치중된 방패술. 배운 건 있는지 내 공격을 흘리려고까지 했다.

“근데 왜 이렇게 어설퍼 보이냐.”

파아악!

“꺅!”

흘리기를 받아내며 넘어지듯 굴러 종아리뼈를 걷어차자 균형을 잃으며 방패가 걷혔다.

몸을 일으키며 검으로 가슴을 훑었다.

츠컥!

“아윽!”

무려 300% 증폭된 공격력이 급소를 베자 안색이 창백해진 힐러가 뒤로 몸을 날렸다.

치명상을 입었으니 어떻게든 내 공격 권역에서 벗어나려는 것 같다. 씨발X이 어딜 도망쳐!

츠컥! 쫙! 쫙!

따라붙으며 방패를 잡은 팔을 걷어내고 가슴과 얼굴을 난도질한다. 광폭화에 걸려 1.25배 빠른 공격 속도에 손이 꼬였고, 난 기회를 노려 복부를 깊게 찔렀다. 치명타를 맞았는지 경직된 힐러의 이마에 숏소드를 내려찍을 찰나였다.

“너 이 새끼!”

“큭!”

뒤가 뜨끔해 돌아보니 범상치 않은 모양의 검은색 롱소드를 든 놈이 내 등을 깊게 베었다. 물약을 빨아 80%까지 채웠던 생명력 중 절반이 날아가며 몸의 힘이 쭉 빠졌다. 베이는 순간 빼기는 했지만 무기빨인지 스킬 때문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놈에 유리대포! 놈이 다시금 검을 들어 내 목을 베려는 순간…….

“베리어!”

낭랑한 영창과 함께 내 앞에 하얀 막이 생성되어 놈의 공격을 막아 냈다. 파삭하고 깨졌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쫘아악!

“컥!”

드러난 목을 베자 놈이 목을 감싸며 경직되는가 싶더니 축발을 회전하며 내 허리를 노린다. 허리를 숙여 피하며 발목을 깊이 베자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고, 난 녀석의 검을 발로 밟고는 역수로 쥔 숏소드를 심장에 꽂아 넣었다.

푸우우욱!

“끅!”

발버둥치는 놈의 목을 밟고 계속해서 내려찍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발아래 깔린 녀석이 부르르 떤다.

검을 뽑아 다시금 힐러를 공격하려 하는데 나보다 먼저 나서는 이가 있었다.

“씨발X아!”

내게 배리어를 써 준 애랑이 메이스로 상대 힐러를 두들겨 패고 있다. 탐험 내내 뒤에서 얌전히 힐만 하더니 메이스 돌리는 손목 스냅이 예사롭지 않다.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그때 남자의 고성이 들려온다.

“개새끼들아… 죽어라!”

손에 불타오르는 화염구를 완성한 마법사가 독기에 찬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동료들이 죽어 가는 와중에 섣불리 덤비지 않고 침착하게 마법을 완성한 건 칭찬해 줄 일이지만 그거 하나 완성했다고 처웃는 건 놈의 실수다. 내가 녀석을 공격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쪽에도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 더 있었으니까.

“커억…….”

놈의 가슴에 칼날로 된 묘목이 쑥 하고 자라났다. 멍청한 새끼… 내가 널 신경 쓰지 않은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어.

“개새끼야. 웃… 기냐?”

상반신의 절반이 흉측한 화상으로 엉망이 된 붓산아이가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마법사의 목을 붙잡았다.

* * *

“부활!”

쫘아아아아앙~

“오…….”

애랑의 등에 천사의 날개 비슷한 게 떠오르더니 그녀의 몸에서 뿜어진 성스러운 빛이 파이어볼에 잘 익은 숯덩이를 비췄다.

“으어어어…….”

검은 재가 성스러운 빛에 녹아 허공중에 흩어지자 죽어 있던 파티원2가 좀비 같은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활이 완료되자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어우 쫄려서 뒈질 뻔했네.”

“빨리 붕대질이나 하세요. 그러니까 평소에 저항템 좀 맞추라니까.”

“죄송요. 보스 때문에 피템으로 맞췄는데 이 꼴이 날 줄 몰랐죠. 그리고 케이 님 감사합니다.”

“뭘요. 같은 파티인데.”

“아닌 게 아니라 케이 님 아니었으면 전멸 날 뻔했어요.”

먼저 부활해 신나게 붕대질 하던 파티원1이 내 얼굴에 금칠을 했다. 가슴이 간질간질한 것이 아직 이런 칭찬에는 익숙지 않다. 화제를 돌릴 겸 애랑을 바라보며 말했다.

“흠흠, 애랑 님은 좀 치시던데…….”

“에이, 케이 님이 피 다 깎아 놓으신 거 막타 친 거죠. 그년 장비 엄청 좋아서 아마 1:1로 붙었으면 제가 졌을 거예요.”

“맞습니다. 케이 님이 녀석들 시선 끌지 않았으면 백중백 전멸했을 겁니다.”

애랑의 말에 붓산아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파티원1, 2와 함께 파이어볼에 거의 직격당해서 피해가 컸지만 장비가 좋아 살았다.

“포디나 쪽은 초보자 마을이라 이런 일이 거의 없다고 해서 방심했는데 된통 얻어맞았네요.”

“빌어먹을 새끼들… 저렙들 뒤통수치는 게 재미있나.”

주고받는 말을 들어보니 이런 일이 빈번한 것 같다.

“다른 곳에서도 이런가요?”

“30레벨 때까지는 대부분이 레벨 올리기 바빠서 약탈자 짓은 안 하는데 40레벨 대만 넘어가면 아주 빈번해요. 그나마 가도를 정비하는 NPC 레인저들이 있어서 다행이지…….”

“그렇군요.”

“자, 일단 전리품 분배 빨리 하고 뜨죠. 다른 놈들 몰려오기 전에…….”

붓산아이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놈들이야 페널티로 한동안 접속 못 하겠지만 약탈자가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잠시 후 놀 소굴에서 벗어난 우린 한적한 곳에서 안전지대를 펼쳤다.

“그럼 공유할게요.”

세이온은 파티플레이에서 전리품 분배가 공평하게 되도록 여러 가지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전리품 내역 공유인데, 이걸 공유하면 파티를 하며 시간과 장소별로 얻은 모든 전리품이 뜨게 되어 있다. 또한 실시간으로 해당 지역 경매장 시세와 연동하여 가격을 알 수 있기에 값어치를 몰라 뒤통수 맞는 일도 없다. 약탈자에 대한 보호 따위는 없지만 준법적인 플레이어를 지향하는 이에 대한 편의사항은 충분하다.

“잡템은 상점가로 계산하고 골드까지 합쳐서 125골드네요. 혹 잡템 중에 필요하신 거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저도요.”

“그럼 그렇게 처리하고 다음은 아이템 분배입니다.”

공유창을 보니 총 다섯 개의 아이템이 보인다. 고급 등급을 뜻하는 녹색 네 개에 희귀 등급을 뜻하는 파란색 하나였는데 그 파란색이 무려 롱소드였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중급 보물상자 하나 놀 족장의 영혼 파편, 대지의 활과 희생의 롱소드와 민첩의 반지입니다. 경멸의 망토는 안 떨어졌지만 약탈자 놈들이 희생의 롱소드를 줬네요.”

“와, 희생의 롱소드……?”

“대박이네.”

희생의 롱소드는 희귀 등급 아이템 중에서도 상급에 드는 무기였다. 아마 이 무기를 떨군 약탈자는 지금 미쳐 날뛰고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던전 파티 협정에 따라 아이템 배분을 하겠습니다. 협정 내용은 모두 알고 계시죠?”

“네.”

“네.”

모두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세이온의 아이템들이 전 현실의 재화와 동등한 가치를 지니게 되자 그에 따른 가치 분배에 대한 규칙은 협정이라는 이름을 통해 게임 내 모든 이에게 적용되게 되었다.

아이템이 단순한 데이터 덩어리가 아닌 가치를 지닌 물질적 재산으로 인식된다는 것에 많은 국가가 우려를 표했지만 암호화 화폐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사이버 세상에서 엘도라도 같은 세이온은 이 협정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현실의 범죄에 준하는 페널티를 줄 수 있도록 제도화되었다.

“그럼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번 탐험의 최고 공로자를 투표해 주세요. 참고로 저는 케이 님입니다.”

붓산아이가 날 가리키며 말했다. 애랑도 고개를 끄덕인다.

“으음, 저도요.”

“슬프게도 케이 님이네요.”

“그렇죠.”

“…….”

고맙게도 모두 나를 가리킨다.

“만장일치로 케이 님이 당첨되셨습니다. 케이 님 아이템을 먼저 선택해 주세요.”

“…….”

“…….”

모두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따가운 시선 속에 난 천천히 손가락을 가져갔다.

“저는…….”

* * *

아이템 분배를 끝낸 후 우리는 지하수로 던전의 끝에 있는 포탈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케이 님 득템 부럽네요.”

“그만하세요. 케이 님 없었으면 완전 망할 뻔했잖아요. 어차피 그거 뱉은 것도 약탈자 놈들이고…….”

“그래서 더 슬퍼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흑흑… 난 아이템 복이 왜 이리 없나.”

파티원2가 장난스럽게 우는 시늉을 했다. 내가 희생의 롱소드를 고른 후 나머지 네 개의 아이템에 대해서 주사위를 굴렸고, 파티원2는 꼴찌를 해서 중급 보물상자를 차지했다.

‘좀 부담스럽기는 하네.’

내 초보자 배낭에는 지금 검은색 검신이 너무나도 매력적인 롱소드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희생의 롱소드] [희귀급]

-귀한 흑철을 사용하여 장인의 손에 탄생한 명검이다.

-공격력 30~35

-내구력 80/80

-스킬 [피를 머금은 칼날]

-생명력 50을 희생하여 1회에 한하여 데미지 2배

이전에 사용하던 호레이스의 숏소드보다 데미지는 1.5배 강하고 내구는 2배가량 많다.

거기에 달린 옵션이 굉장한데 생명력을 소모하여 데미지를 두 배 뻥튀기하는 스킬이 달려 있다. 붓산아이에게 물어보니 경매장에서 최저가가 무려 300골드란다. 현금으로는 30만 원이라는 소리다. 솔직히 내가 저 파티원 2의 입장이라도 배가 아플 것 같은데 이들은 의외로 선선히 내 공로를 인정해 줬다. 그렇게 서로 투닥거리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데 붓산아이가 내게 다가왔다.

“케이 님.”

“예.”

“혹시 일정 괜찮으시면 앞으로 쭉 저희와 놀 족장 파티 함께하지 않으시겠어요?”

“저야 감사하죠.”

굳이 묻지 않더라도 바라던 바다. 이런 정규 파티와 함께 팀을 이룬다면 배울 것도 많고 얻는 것도 많을 테니까. 내 대답에 한시름 놓은 표정이 된 붓산아이가 조금 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리고 이번 레이드 제 공략 영상으로 위튜브에 올릴 예정인데… 물론 아이디와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 해 드리고요.”

“예. 상관없습니다.”

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붓산아이는 세이온에서 꽤 오래 활동한 구독자 3만의 위튜버였다. 공략 영상을 주로 올리는데 그래서 그런지 물어보는 건 거의 술술 말해 줄 정도로 세이온에 박식했다. 굳이 이득만을 따지는 건 아니지만 이런 사람은 친해져서 나쁠 게 없다. 향후 내가 이름을 알릴 계기가 될 수도 있는 법이고…….

놀 족장을 잡으며 10레벨을 찍은 덕분에 친구 저장과 귓속말, 우편함 등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에 난 그 자리에서 모두의 이름은 친구로 등록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음을 기약한 후 근처에 있는 숙소로 이동하여 게임을 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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