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지하수로의 혈투 (3)
“와앗!”
놀 대족장이 쓰러진 순간 시야 한구석에 주르륵 떠오른 메시지에 난 감탄을 터뜨렸다.
[보스 놀 대족장을 레이드하셨습니다.]
[지하수로 퀘스트-놀 대족장 레이드 4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3 레미의 소원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놀 슬레이어’ 업적을 획득하셨습니다.]
[11골드 5실버를 획득하셨습니다.]
[장인의 가방을 획득하셨습니다.]
[경멸의 망토를 획득하셨습니다.]
[놀 대족장의 오브를 획득하셨습니다.]
[고급 붕대 x10를 획득하셨습니다.]
[중형 물약 x7를 획득하셨습니다.]
[강화석 x4를 획득하셨습니다.]
[중형 안전지대 킷 x3를 획득하셨습니다.]
레이드 보스답게 10여 개가 넘는 메시지가 한 번에 떠올랐다. 그러나 내가 진짜 놀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스킬이터의 티어가 상승했습니다.]
[획득할 수 있는 보스 스킬의 개수가 1개 늘어났습니다.]
[보스 스킬 진(眞) 광폭화의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스킬이터로 획득한 스킬들의 위력이 상승합니다.]
[보스 놀 대족장의 보스 스킬 ‘친위대 소환’을 획득하셨습니다.]
스킬이터의 티어가 오르고 광폭화의 레벨이 올랐다.
스킬이터 [신화급] [2티어]
-진(眞) 광폭화 [2레벨]
-친위대 소환 [1레벨]
척추를 찌르르 타고 오르는 쾌감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특히나 3일간 죽어라 놀 족장을 레이드해도 단 한 개도 안 나오던 경멸의 망토가 대족장에게서 떠 버렸다.
[경멸의 망토] [희귀]
-방어력 100
-모든 속성 저항 +5
-옵션: 적에 대한 어그로를 40% 감소시켜 줍니다.
뛰어난 방어력과 더불어 모든 속성 저항이 붙어 있으며, 가장 중요한 옵션이 몬스터에 대한 어그로를 줄여 주는 것이다. 탱커 포지션을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유용한 옵션으로, 몬스터뿐만 아니라 유저에 대해서도 주의를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다. 붓산아이 파티와 주야장천 놀 족장 레이드를 뛴 이유다.
“가자.”
얻을 건 다 얻었다. 놀 대족장을 잡음으로 마침내 포디움의 지하수로 졸업이다. 내가 가방에서 귀환 스크롤을 꺼낼 때였다.
쉬이익!
날카로운 파공성에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 난 황급히 고개를 숙여 화살 공격을 피해 냈다. 만약 버프 효과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막지 못했을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이다. 공격을 피했지만 덕분에 귀환 스크롤을 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귀환 스크롤은 비전투 상태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은 아이템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경황이 없다.
“뭐야?”
지하수로의 모든 통로로 수십의 유저들이 나를 향해 뛰어온다. 당장 눈에 보이는 숫자만 스물이 넘는데 모두 하나같이 날카로운 단검을 들고 있다.
“하… 약탈자?”
놀 족장을 레이드할 때 자주 당했던 짓이라 저들의 정체를 알아보는 것은 쉬웠다. 웃기는 건 그리 당황스럽지도 않다는 것이다. 언제든 기습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숫자가 예상외기는 하지만 마침 도전 퀘스트에 약탈자 30명 잡기도 있는 마당에 한편으로 반갑기까지 하다.
전 세계 5억 명이 즐기는 세이온의 매력이 무엇일까 물어보면 열 명 중 두서넛은 약탈이라고 말할 것이다. 타 게임들이 PK보다는 좀 더 건전한 PVP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세이온은 오히려 시스템을 통해 약탈을 부추기는 쪽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리고 누군가는 쓰레기 게임이라고 침을 뱉지만 누군가는 환호한다.
약탈을 하게 되면 캐릭터에는 불명예 점수라는 것이 생긴다. 일종의 PK 수치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이 높아질수록 약탈자를 뜻하는 붉은 문신과 눈빛이 더욱 진하게 변하게 된다. 이 불명예 점수가 높은 약탈자를 잡으면 명예 점수를 얻을 수 있고, 이것은 높은 신분을 얻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만들어 놨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세이온은 약탈자들이 양산되도록 조장을 해 놓고, 그에 대한 대비책 또한 충분히 게임 안에 구현해 놨다. 그리고 내 가방 안에는 그 대비책들이 삼 일 내내 자리만 차지한 채 썩어 가는 중이었고…….
“사람이 없다 싶더니 네놈들 때문이었구나.”
지하수로에 웬일로 조용하다 했는데 이것들이 원인이었다.
한편으로는 고맙다. 이대로 나갔으면 가방 자리 희생해 가며 들고 다닌 보람도 없을 뻔했는데…….
수십 명의 적을 앞에 뒀건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광폭화를 쓰지도 않았는데 절로 아드레날린이 치솟는다. 내게 활을 쏜 놈이랑 눈이 마주쳤다. 어쩌라고, 개새끼야. 나 먹으러 왔니? 지옥을 보여 줄게.
타탁! 탁!
일단 시작은 섬광탄이다. 중세 판타지를 표명한다는 세이온에 웬 섬광탄이냐고 하겠지만 이건 엄연한 유저 메이드 제품이다. 그 원리만 안다면 웬만한 건 다 만들 수 있는 세이온에서 상대의 시야를 마비시키는 섬광탄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가격이 더럽게 비싸다는 단점만 빼면 아주 훌륭한 회피 수단이다.
파파팡!
“크악!”
“헉!”
“눈이!”
나를 향해 달려들던 놈들이 눈뽕을 거하게 얻어맞고 일제히 비명을 지른다. 숫자의 우위를 믿고 방심했는지 거의 대부분이 자신의 눈을 감싼다. 그럼 이 다음은…….
“연막탄~”
퍼퍼펑!
연막탄은 의외로 싸다. 주변에 연막을 뿌려 전투 지역 이탈이나 자신의 위치를 가릴 때 쓰는 이것은 약탈자들이든 그 반대의 입장이든 상대의 공격에서 벗어날 때 애용하는 수단 중 하나다. 물론 난 여길 벗어날 생각이 없다. 연막탄 세 개를 터뜨리니 주위가 하얀 연기로 가득 찼다. 아무리 다굴에 장사 없다지만 그 다굴 놓은 놈들이 모두 맹인이고 서로 피아를 구분할 수 없다면 어떨까?
“날먹의 순간이지.”
[뱀파이어릭 오라]
[피를 머금은 칼날]
벽을 등지고 서니 좌우 앞이 물 반, 고기 반이다. 어부는 단지 그물만 던지면 된다.
쫘아아아악!
검날의 궤적에 걸린 두 개의 머리가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는 동시에 놀 대족장을 잡으며 소모한 생명력과 스킬을 사용한 생명력까지 쭉쭉 차오르기 시작했다.
[피를 머금은 칼날]
쫘아아아악!
다시금 검을 휘두르자 세 개의 머리가 떠오른다. 딱히 상대를 구분할 필요가 없으니 풀스윙으로 마구 휘둘러 대자 사방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졌다.
“으악!”
“막아!”
“이래 가지고 날 잡을 수 있겠니?”
“놈을 잡아!”
“마비시켜, 마비!”
츠컥!
마구잡이로 휘둘러 오는 단검들이 내 몸을 스쳤다. 생명력이 줄어들며 메시지 하나가 떠오른다.
[마비독의 효과로 모든 속도가 5초간 10% 줄어듭니다.]
[마비독의 효과로 모든 속도가 5초간 10% 줄어듭니다.]
전부 똑같은 단검만 들고 있기에 이게 뭔가 싶었는데 마비의 단검이었나 보다. 고급 등급의 물품인데 마비독과 함께 사용하면 마비독의 중첩 횟수를 높여 준다. 개당 1골드였나…….
위튜브에서 자료 찾을 때 영상으로만 봤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는 거지?”
이 많은 숫자가 찔러 댄다면 나도 대책 없다. 곧바로 섬광탄을 터뜨리며 안으로 숨어든다. 내가 자세를 낮추며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을 때였다.
“내 눈!”
“악! 나를 왜 찔러! 펑웨이!”
“나 3조 조장이야 이 새끼들아!”
“쌰비!”
“비겁한 새끼! 내가 꼭 죽인다!”
섬광탄과 연막탄으로 적아 구분이 힘드니 지들끼리 베기 시작했다. 나야 뭐 워낙 버프빨이 있어서 크게 힘들지 않지만, 놈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졌다.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르며 가방에서 해독제를 빨고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놈들의 목을 베어 넘겼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아싸, 레벨도 쭉쭉 오르네!
쫘아아악! 쫘아악!
“저 새끼야!”
“죽여!”
“죽이면 안 돼! 마비시키라고!”
저들끼리 주고받는 말이 이상하다. 왜 죽이지 말라고 하지? 이유가 궁금하기는 하지만 붙잡고 물어볼 상황도 아니고, 저들이 안 죽인다고 나까지 죽이지 않을 이유도 없다.
“얌전히 잡혀라! 빵즈 놈아.”
쾅!
강렬한 어깨 밀침에 생명력이 줄어들며 뒤로 쭉 밀려났다. 연막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도 계속해서 밀고 들어오니 꽤나 위협적이다. 이럴 때는 대가리를 따야 하는데 아직은 숨돌릴 틈이 없다.
“붙잡아!”
두 녀석이 나를 향해 몸을 날린다. 덮쳐오는 한 녀석을 어깨로 받아넘기며 다른 한 놈의 두 다리를 베어 버린다. 어느새 연막이 서서히 걷히자 놈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어쩌라고?
퍼퍼퍼퍼펑!
“빌어먹을 연막탄!”
“이 새끼! 또 연막 터뜨렸어!”
“멍청이들아! 길드 망토로 구분하라고!”
사방에서 또다시 고함과 욕설이 터진다.
길드 망토라는 말에 죽은 놈들을 보니 녀석들이 두르고 있는 망토가 같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나 연막이 자욱한 틈을 타 주위에 널린 시체들을 루팅했다.
‘빙고.’
마침 망토 하나가 보인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 * *
“빠져!”
“벽에 붙어 있잖아! 공격하라고!”
“죽여 버려!”
“죽이지 마! 죽이면 안 돼!”
“붙잡아서 내리눌러!”
“누굴 붙잡으라는 거야!”
“멍청한 새끼들아! 마비시키라고, 마비!”
“빠져서 포메이션을 다시 잡아!”
“아악! 왕빠딴!”
뿌드득…….
수석팀장은 시간이 갈수록 개판이 되어 가는 전장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거의 오십여 명이 밀고 들어갔는데 아직도 적을 잡지 못한 것이다. 워낙 레벨이 낮은 구간이라 그만큼 인원을 더 투입했건만 그것이 오히려 패착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놈을 찾을 수 없다!”
“악! 공격하지 마!”
연막 속에서 들려오는 고함과 욕설은 이제는 아예 촌극으로 변한 지 오래다.
“젠장 추적 계열 스킬 지닌 놈 하나라도 데려왔어야 했는데…….”
파티에 적아를 구분하는 스킬들은 많다. 문제는 10레벨마다 스킬 하나씩을 더 배울 수 있는 세이온에서 15레벨이면 배울 수 있는 스킬이 두 개밖에 없는데, 거기에 추적 계열 스킬을 집어넣는 미친놈은 없다.
첫 스킬은 대부분 메인 스킬이고 다음으로는 그것을 보완하는 스킬을 배운다. 추적 계열 같은 특수한 상황에 쓰는 스킬은 빨라도 20레벨, 보통은 30레벨 정도에 배우는 게 일반적이다.
결국 저 혼전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전열을 정비해야 한다.
<1팀을 제외한 모든 인원은 뒤로 빠진다!>
<알겠습니다!>
꽤 많은 숫자가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 수적인 우세는 절대적이다. 1팀을 제외한 모두가 현장에서 벗어나고 천천히 연막이 거치기 시작하자 참혹한 전투 현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눈으로만 확인해도 사망자가 스물은 넘을 것 같다. 15레벨 제한이라 함량 미달로만 숫자를 맞추기는 했지만 1/3이 죽어 버렸다. 그러나 더욱 속 터지는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목표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어디 있어?”
“사라졌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
혼란에 빠진 이들이 웅성거리자 수석팀장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조용! 누가 떠드나.”
한차례 일갈로 소요를 잠재운 그가 주위를 쓸어본다.
“놈이 숨어들었으니 각 파티장은 자신의 파티를 확인해!”
“알겠습니다!”
꼴이 우습게 되었지만 그는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각 파티장이 살아 있는 파티원을 확인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하나가 바로 그의 곁에 다가와 있다는 것이다.
“네가 대가리구나.”
“헉!”
놀랄 틈도 없이 차가운 칼날이 복부를 쑤시고 들어왔다.
퍼퍼펑!
다시금 세 개의 연막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