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백구, 황구, 흑구 집사
-ㅋㅋㅋㅋ싸움은 진짜 잘하는데 지도는 까막눈이네
-난 웬일로 산적 잡는다고 뺑글뺑글 돌길래 또 노가다하나 싶었는데…….
-길치다! 사이버 길치가 나타났다!
이때다 싶었는지 우르르 몰려들어 나를 물어뜯기 시작한다.
[케이짱바라기 님 1,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이 사람들아. 당신들도 레벨 20 전까지는 지도 못 봐서 파티장 뒤만 졸졸 따라다녔잖아.
-응, 난 렙 5부터 지도 외우고 다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찾기 스킬 배우세요. 그럼 레이더 생김.
-ㅋㅋㅋㅋㅋㅋ초보자한테 구라 치지 마요. 길찾기 스킬이 어디 있음. 레이더 생기는 건 마법 감지 스킬이지.
-위에 두 분 그만하세요. 헷갈리시잖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지도 제작 스킬 배우시면 돼요.
-위에 셋 다 믿지 마세요. 수색 스킬 배우면 됨.
“끙…….”
아주 피 한 방울 흘렸다고 피라냐 떼처럼 달려든다. 근데 진짜 지도 알아보기 힘드네. 아무래도 안 되겠다. 검색하고 들어와야지.
“저 잠시 맵 좀 확인하고 들어올게요.”
-예. 시선만 강아지들한테 맞춰 놓고 나가시면 돼요.
-올 때 메로나!
-위튜브 같은 거 찾지 마시고 인벤 가서 보시면 편해요.
-인벤보다는 두리웹이지!
-응, 십덕 ㄲㅈㄱ
-응, 벤충 ㄲㅈㄱ
“아예. 감사합니다. 두 분 잘 싸우시네요. 저 다녀올 동안 두 분의 화끈한 한판 승부 기대하겠습니다.”
시청자들에게 양해를 구한 난 안전지대의 남은 시간을 확인한 후 그대로 로그아웃을 했다.
푸슉~
“후…….”
게임에서 빠져나오니 머리가 멍하고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너무 오래했나.”
VR을 너무 오래하게 되면 뇌와 신경계의 신호가 교란되어 부조화가 일어난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풀리지만 이것도 너무 과하면 몸에 안 좋은 건 사실이다.
“끙…….”
팔을 들어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나는 캡슐 한쪽에 거치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잘 놀고 있네.”
나오기 전에 육포 몇 개를 뿌렸더니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육포를 씹어 먹고 있는 구씨 삼형제가 보인다. 웃기는 건 내가 없는데 채팅창이 더 활발하다는 것이다. 그냥 쟤들만 세워 놔도 방송 분량은 걱정 없을 것 같은 눈치다.
“쩝, 거점이나 찾자.”
완전무결 실력파 비제이 컨셉이었는데 그놈에 길찾기 때문에 망했다.
방송을 갈무리하고 인터넷을 열려고 하는데 너무 오래 켜 놔서인지, 아니면 노트북이 고물이라서 그런지 엄청나게 답답하다. 당장이라도 숨넘어갈 것처럼 뚝뚝 끊기는데 보고 있기 미안할 지경.
“도저히 안 되겠네.”
창하나 더 열면 노트북옹이 당장에라도 유언을 쏟아낼 것 같아 시청자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노트북을 다시 재시작했다.
“아오!”
지렁이가 안 넘어간다. 그동안 무리시켰다고 결정적인 순간에 반항하냐!
“빨리 돈 벌어서 데스크탑으로 바꿔야 하는데…….”
양질의 방송을 뽑는 것의 필수 조건이 좋은 장비는 아니지만 필요 조건임은 분명하다. 특히나 초고사양을 추구하는 세이온이니 만큼 데스크탑도 하이엔드로 맞춰야지 고품질의 화면을 시청자들에게 보일 수 있다.
“쯧… 오브 팔리면 환전해서 데스크탑이라도 맞춰야지.”
현재 시세로 치면 수수료나 세금 다 떼고 300만 원 정도 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드디어 노트북이 정신을 차리고 부팅을 끝마쳤다. 세이온 커뮤니티에서 레인저 거점에 대한 정보를 얻은 난 파프리카를 실행해 방송을 켠 후 서둘러 게임에 다시 접속했다.
“조용하군.”
방송을 폭파했다가 다시 열어서인지 채팅방이 깨끗하다.
“헥헥헥…….”
“으릉.”
“역소환 안 됐네.”
소환 관련 직업은 소환수를 소환해 놓은 상태에서 접속 종료하면 자동으로 역소환된다는데, 구씨 삼형제는 다른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지 여전히 소환된 채로 있다. 턱을 쓸어 주며 우쭈쭈하고 있으니 시청자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
-……?
-……!
-0ㅁ0!
그런데 들어온 사람들이 채팅은 안 하고 조용하다. 분명 길치라고 놀려 댈 것으로 생각했는데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20여 명이 들어와서도 채팅창은 깨끗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조금 지나고서 알게 되었다.
-케이님. 캠 설정 틀어진 거 같은데요? 지금 방송에 케이 님 캡슐에 누워 있는 거 생방송 중이요.
-악! 그걸 말하면 어떻게 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케이 님 훈남일세. 잠자는 숲속의 왕자!
-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잘생겼네.
“예?”
[케이님바라기 님 1,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게임 화면 안 나오고 케이 님 캡술 떠 있다고요. 캠 설정 잘못되신 것 같은데ㅋㅋㅋㅋ 아… 덕통사고 당했네. 꺄~
“윽…….”
노트북이 미쳐 날뛸 때 뭔가 설정이 잘못됐나 보다. 황급히 접속 종료해서 눈을 떠 보니 노트북에 달린 카메라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아, 젠장…….”
방송사고가 터졌다. 물론 언제까지나 노캠으로 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은 아니다. 캠을 끄고 설정을 다시 한 뒤 접속하니 채팅창이 미친 듯이 올라가는 중이다.
-케이 님 눈도 예쁘시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커스터마이징보다 본인이 더 잘생긴 거 실화?ㅋㅋㅋㅋ
-의외로 순둥순둥하게 생기심. 칼질은 그렇게 살벌하시더니.
-아니, 캠을 왜 닫으세요? 그냥 열고 하시면 안 됨?
-잘생겼다! 훈남 주인님이었네!
“흠흠, 칭찬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제 얼굴은 기억에서 지워 주세요.”
-아니, 왜요!
[루카루카 님 1,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게임 말고 지금 다시 얼공 하면 10만 원!
“천 원 후원 감사드립니다. 루카루카 님. 그러나 얼굴 공개는 없습니다.”
-에이, 김샜네.
-난 스샷해 놓음ㅋㅋㅋㅋㅋ
-오… 공유 좀!
-저도 공유 점!
“스샷하신 분… 유출 시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습니다.”
-오우, 단호박ㅋㅋㅋㅋ
-걱정 마세요. 저만 가지고 있을 테니까… ㅎㅎㅎㅎㅎ
“네. 아무튼 위치도 알았으니 이제 이동해야겠네요.”
커뮤니티에서 보고 온 위치와 지도를 대조해 가며 이동하니 얼마 되지 않아 나무 목책으로 둘러싸인 룬다인 레인저 거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깝네.
-애초에 길 따라왔으면 도착했겠다는… ㅋㅋㅋㅋㅋㅋㅋ
-괜히 옆으로 빠져서…….
-세이온에서 길치는 힘든데… 하필 그게 케이 님 ㅋㅋㅋㅋㅋ
쯧… 확 방송 꺼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런 것도 다 내 방송의 개성이 될 테니까.
200평 정도 되는 마당에는 세 개의 크고 작은 건물이 들어서 있었는데, 몇몇 NPC 레인저들이 통나무 의자에 앉아 가죽을 손질하고 있었다. 물음표가 뜬 NPC를 찾아 퀘스트들을 완료하다 보니 룬다인 레인저의 스트라이더와 대면하게 되었다. 이마부터 턱까지 긴 상처를 가진 40대 후반의 사내였는데, 처음 말 걸려고 했을 때는 ‘웬 쓰레기가 앞을 가로막나’ 정도의 분위기였다가 카렌이 준 반지를 보이자 대우가 180도 달라져 버렸다.
세이온의 각 지역에는 지배 세력 우호도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이 높으면 더 좋은 퀘스트와 보상을 받을 수 있고 그곳에서만 살 수 있는 특별한 물품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명성이 아주 높거나 하지 않는 이상 돈도 안 되고 경험치도 얼마 안 주는 퀘스트들을 하면서 천천히 우호도를 올리는 게 정상인데…….
“카렌 님의 증표만큼 확실한 신분 보장은 없지.”
[룬다인 레인저 지점의 우호도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저기 있는 토다에게 사면 되네. 내 특별히 자네는 싸게 살 수 있도록 해 놓지.”
“여기 이 육포는 우리 거점 아니면 얻을 수 없는 별빛무늬사슴 고기로 만든 거라네.”
“수리할 거 있으면 얼른 내놔 봐! 우리 동료가 다 낡은 무기로 싸우는 꼴은 볼 수 없으니까.”
레미 엄마 만세다. 우호도가 오르자 룬다인 레인저들은 앞다투어 내게 말을 걸어줬고, 덕분에 좋은 퀘스트들도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룬다인 산에 성가신 몬스터가 자리 잡은 것 같아. 괜찮다면 자네가 가서 확인 좀 해 주게.”
“알겠습니다.”
“산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면 거점에 있는 다른 레인저들에게 물어보면 될 거야.”
수상한 몬스터 [의뢰]
-스트라이더 루코가 룬다인 산맥의 몬스터 영역의 변화에 대하여 조사를 요청했다.
-수상한 몬스터의 대한 정보 0/1
보상: 3,000exp, 10골드
-와, 뭐 이렇게 보상이 좋게 떠!
-왜 내가 할 때는 이런 게 없었지?
-카렌 짱! 대박!
-케이 님, 이거 어떻게 받아요?
-수상한 몬스터라니. 설마 아울베어 말하는 건가? 그거 솔로로 못 잡는데?
-또 길 잃어버린다에 한 표.
“그럴 일 없습니다.”
거점을 돌며 네 개의 퀘스트를 더 받은 난 시청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게임을 진행했다. 듣던 것과는 다르게 약탈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게임도 순조로웠다.
“컹컹!”
“그래. 흑구는 버티고! 백구랑 황구는 옆으로 돌아가고!”
“크릉크릉!”
산적에게서 전리품으로 얻은 방패를 든 흑구가 앞에서 버티는 동안 백구랑 황구가 좌우를 치고 들어간다. 아직은 어설프고 약하지만 탱킹의 중심이 되는 흑구에게 방패만을 들려 세우니 어느 정도 산적 하나의 공격은 막아 낼 수 있었고, 그 틈에 백구와 황구가 측면을 공격하는 방식이다.
슈우욱! 팍!
“크악!”
흑구의 방패를 도끼로 연신 내려찍던 산적은 내가 쏜 화살이 허벅지에 박히자 절뚝이며 뒤로 물러선다. 이렇게 위기의 순간 한 발 한 발 화살을 날려주니 잠시 후 산적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진다.
“잘했다.”
“컹컹! 크릉크릉! 으르릉!”
연신 칭찬하며 머리를 쓸어 주니 좋다고 꼬리를 팔랑거리는 구씨 삼형제다.
“오, 고급 등급 망토 나왔네. 이건 백구 거.”
“크릉크릉.”
백구의 장비창을 열고 망토를 장비해 주자 백구가 좋다는 듯 방방 뛴다.
-백구 멋있어! 백구야 나랑 살자!
-아, 흑구도 챙겨 주세요. 흑구가 탱커인데 너무하네.
-흑구는 물약 제일 많이 쓰잖아요.
-황구 무기가 너무 부실함. 언제까지 마비의 단검 들고 다녀요?
시청자들이 넷으로 갈렸다. 각기 백구파, 황구파, 흑구파 마지막으로 나를 지지하는 집사파다. 왜 내 별명이 집사가 됐냐고 묻지 마라. 짜증 나니까.
-어이, 버스 기사 양반. 또 어디로 가세요. 오른쪽이라고!
-황구한테 간식 좀 주세요! 배고파하잖아요!
아주 사냥 내내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난리다. 물론 단순한 말만이라면 그냥 무시하겠지만 천만 애견인들은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흑구친위대 님 1,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다음 장비 흑구한테 넘기면 만 원.
[황구사랑 님 1,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다음 장비 황구한테 넘기면 이만 원.
자기들끼리 후원으로 싸워 대는데 이건 정말…….
“감사합니다. 백구야 네 팬들이 너무 잠잠하다. 너도 어필 한번 하자. 백구 춤춰.”
“멍멍!”
내 말에 백구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관광버스 춤을 춘다. 한번 가르쳤는데 금방 따라 하더라.
[내 마음에 백구 님 10,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백구 너무 귀여워ㅠㅠ
-아… 나 이제 놀 사냥은 못할 것 같아.
후원이 터지는 건 둘째치고 시청자들이 좋아하니 그만둘 수가 없다. 거기에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는지 시청자가 벌써 100명을 돌파했다. 좀 시끌시끌하기는 하지만 케이짱바라기 님이 교통정리를 잘해 줘서 아직은 악질적인 시청자는 없다.
“멍멍멍! 으르르릉!”
그때 백구, 황구, 흑구가 갑자기 한쪽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내가 그쪽을 향해 활을 겨누자 풀숲에 숨어 있던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후드로 눈과 코를 가렸지만 턱에 보이는 선명한 붉은색은 숨길 수 없다.
“약탈자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