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소녀, 소년을 만나다
“죄송합니다. 몰래 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게 저격이라 좀 나서기 그랬네요.”
“아뇨. 괜찮습니다.”
자신을 세스라고 소개한 그녀는 백구, 황구, 흑구를 보기 위해 말을 타고 네 시간을 달려왔다고 했다. 그건 그렇고 꽤 놀랐다. 내 시청자 중에 이런 사람도 있을 줄이야.
-와, 저 선명한 거 보소. 저렇게 붉은 건 본 적이 없는데 진성 약탈자네.
-저 정도면 불명예 10,000점은 넘었을 듯…….
-사람 천 단위로 썰어 봤다는 건데… 저 정도 레벨 되면 솔직히 빨간 거 의미 없죠.
-케이 님 큰일났네. 진성 약탈자 애들 중에 제정신 못 봤는데…….
불명예 점수 10,000점이 넘는 초고렙인 그녀의 눈이 백구에게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모른다. 음… 일단 비위는 맞추자. 이건 내가 절대로 쫄아서 그런 게 아니다.
“진짜 귀엽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펫으로 개 몇 마리 가지고 있지만 뭔가 얘들은 특별해 보여요.”
“그런가요?”
“네. 뭔가 단순한 펫이나 소환수가 아니라 상당한 AI를 지닌 느낌이랄까요. 생동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특별한 스킬을 지니셨나 봐요?”
그 말을 하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날카롭다.
짧은 시간에 그걸 캐치해 내네. 게임사에서 뿌리는 애완동물들은 단순히 정해진 스크립트에 따라 반응하는 것들이었다. 그에 비해 얘들은 소환수 같지도 않다. 세이온의 스킬 중에는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소환 스킬이 분명 존재했다. 원하는 몬스터를 소환해 부리는 스킬부터 몬스터 테이밍 스킬까지 다양하다. 그렇지만 위튜브를 검색해 본 결과 그것들과 이 셋은 AI 매커니즘이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건 그렇고 스킬을 묻다니… 쯧…….
“뭐, 그런 편이죠.”
“음, 죄송해요. 스킬을 묻는 건 실례인데…….”
내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금방 사과했다.
“아닙니다.”
“제가 괜한 걸 물어서… 그런 그렇고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네요. 다른 시청자들이 욕 많이 하죠?”
“하하… 아뇨.”
아니라고 말했지만 지금도 채팅창에 욕이 우수수 박히는 중이다. 원래 비제이가 방송을 할 때 이런 식으로 끼어드는 건 노매너 중에 노 매너였으니까.
-알긴 아네.
-누군 룬다인 어딘지 몰라서 안 간 줄 아나.
-근데 덤비기는 싫네요. 저 여자 두른 후드… 신화 템임. 얼굴이며 장비며 꽁꽁 가리고는 있는데 척 봐도 진짜 초초고수임.
신화템이라는 말에 소름이 쫙 끼쳤다. 언제 어디서 공격당할지 모르는 약탈자가 신화템을 끼고 다닌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라고 알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공격당해도 상관없다는 반증이랄까.
“사실 제가 찾아온 진짜 이유는 이것 때문이에요.”
“……?”
세스는 가방에서 갑옷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손바닥 크기의 비늘을 촘촘히 이어 붙여 만든 갑옷인데, 척 봐도 꽤나 고급스럽다. 아이템창을 확인한 난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드레이크 스케일 흉갑] [희귀 등급] [제작자: 다스탄트]
-드레이크의 비늘로 만들어져 강력한 방어력과 속성 방어력을 자랑한다.
-방어도 150
-내구도 300/300
옵션: 모든 능력치+5 모든 저항 +10
“와…….”
희귀급이라도 모두 비슷한 성능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유저 메이드로 탄생하는 희귀 등급은 간혹 전설 등급에 버금가는 성능을 가진다는데 지금 내가 보는 게 딱 그런 제품이다.
“괜찮죠?”
“괜찮은 수준이 아닌데요?”
이 정도 아이템을 경매장에서 사려면 대체 얼마를 써야 하는 거야? 채팅창도 난리가 났다.
-다스탄트? 설마 그 다스탄트? 저거 대체 얼마짜리야.
-다스탄트면 오로지 주문 커스텀 제작만 받는 사람 아님?
-맞음. 완전 새로운 커스텀 제작으로만 의뢰 받아서 가격이 어마어마하죠.
-저 정도면 몇천 골드인데…….
-큰손이 나타났다!
돈은 사람은 친절하게 만들고… 나도 사람이다.
“하하, 그런데 이걸 왜…….”
“그… 얘들한테 입히고 싶어서요.”
“예?”
“음… 이건 입혀 봐야지 설명하기 편할 것 같은데 한번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 말을 하며 그녀가 흉갑을 내밀었지만 난 손을 내저었다.
눈 딱 감고 입힐 수도 있지만 그럼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진다. 몇천 골드짜리라니……. 장난 삼아 남에게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괜히 받았다가 코 꿰이는 건 사절이다.
“저도 한번 입혀 보고 싶긴 하지만 얘들한테 입히는 장비는 한번 입히면 탈착할 수 없습니다.”
“예?”
“음, 뭐 밝혀도 별로 상관없으니 그냥 말씀드릴게요. 얘들한테 장비를 입히면 그냥 하나가 돼서 새로운 걸 입히면 이전에 입고 있던 건 그냥 사라집니다. 그래서 그냥 입혀 보는 건 할 수 없어요.”
이것저것 실험해 봤는데 얘들한테 입힌 상태에서 수리나 강화 등은 가능하지만 벗길 수는 없었다. 내 말을 다 들은 그녀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예. 저도 한번 입혀 보고 싶지만 이만한 아이템을 사서 입힐 돈이 없네요.”
“뭐, 그래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후원하려고 가져왔던 거라…….”
“예?”
“후원이요. 그러니 한번 입혀 봐 주세요. 가급적이면 백구한테…….”
“으음… 이 갑옷을 백구한테 주신다고요? 그런 뜻인가요?”
“네.”
눈을 반짝거리며 상관없으니 한번 입혀 달라는데 뭐…….
“알겠습니다.”
일단 받기로 했다. 설마 입혀 놓고 가격 청구하는 건 아니겠지.
갑옷을 받아 백구에게 입히니 이전에 입혀 놨던 일반 등급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지다. 특히나 세이온에서 제공하는 일반적인 공용 디자인이 아닌 제작자가 직접 만든 유니크 디자인이다 보니 아주 그냥 눈이 부실 지경이다. 진짜 집사 된 기분이네. 주인이 고급 등급 입고 있는데 넌 좋은 거 입어서 좋겠다.
“역시 백구랑 진짜 잘 어울리네요. 예전에 몇 개 사 놨던 디자인인데 케이 님 방송 보다가 얘들한테 입히면 너무 잘 어울릴 거 같아서 챙겨서 가져왔어요.”
“아하…….”
백구 출세했네. 아마 내가 지금까지 받은 후원금을 다 합쳐야 이 갑옷 하나 살 것이다. 그러나 세스의 후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자, 그럼 이건 황구 거… 이건 흑구 거…….”
“…….”
마음 같아서는 나도 하나 달라고 하고 싶은데 그놈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하…….”
멀어져 가는 케이라는 남자를 바라보며 세스는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 못 알아보네. 뭐… 당연한 거겠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리라는 건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니, 알아보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헤어진 후 7년이 흘렀고, 현실에서라면 모를까 게임 속에서 그것도 얼굴을 전부 꽁꽁 싸매고는 알아봐 달라고 하는 것부터가 우스운 거니까.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알아봐 주기를 바랐다. 자신이 그를 그만큼 오래 가슴에 담았고 매일매일 떠올렸던 만큼 그도 어쩌면 자신을 조금이라도 가슴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백구라고 힌트도 줬는데…….”
자신을 못 알아본다는 것에 심통이 나 가져온 것들은 엉뚱한 소환수들한테 줘 버렸다. 원래는 오빠에게 주려고 했던 것들인데…….
그녀는 눈을 감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부모님을 따라 보육원에 봉사를 갔던 그날. 그녀의 인생에 전환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순간을.
“빨리 도망가!”
컹! 컹컹!
“아… 아아…….”
“멍청한 꼬맹아! 주저앉아 있지 말고 빨리 가라고!”
“나… 나, 나… 다리가…….”
“이런 바보가……!”
크아앙!
“아악!”
“오, 오빠!”
목줄 풀린 사나운 개에게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앞을 가로막은 이가 있었다. 타박상 하나 입었을 뿐인데… 자기는 팔에서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괜찮냐고 물었던 소년.
엉엉 우는 자신을 달래려 햇살보다 눈부신 미소를 지어 줬던 그녀의 오빠.
“이젠 다를 거야.”
그가 보육원을 나오고 자신과 같은 게임을 시작했다는 말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어쩌면 하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세이온이니까 정말 어쩌면 그와 게임 속에서 우. 연. 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졌다. 물론 우. 연. 히는 아닌 그만큼의 돈과 시간을 들인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번에는 지킴을 받는 것이 아닌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 * *
“좋냐.”
“멍! 멍! 멍!”
번쩍거리는 스케일 갑옷을 입은 백구, 황구, 흑구가 내 앞에 척하고 서자 정말 한없이 쪼그라드는 기분이다.
-주인놈 갑옷은 고급 등급인데, 소환수는 유저 메이드 희귀 등급 실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큰손 중에 큰손이네요. 하… 수천 골드는 할 거 같은 갑옷 세 벌을 후원해 버리네.
-케이님 지금 장비 방어력 다 합쳐도 저 흉갑보다 못하죠?
시청자들이 아주 뼈를 때린다. 거참… 나 죽으면 전부 날아가는데 이걸 말할 수도 없고.
-참된 애견인의 자세로다.
-저도 황구, 백구, 흑구가 좋아할 간식을 연구 중입니다. 만들어지면 우편으로 보낼게요.
-앗, 나돈대.
[케이짱바라기 님 10,000원 후원 감사합니다.]
-케이 님도 비싼 거 입으세요!
음음… 역시 집사파의 수장 케이짱바라기 님이 최고다.
아무튼 그렇게 갑옷을 후원받은 후로는 구씨 삼형제들과의 사냥이 훨씬 쉬워졌는데, 방어력 하나만큼은 나보다 월등해서 그런지 웬만한 타격은 그냥 씹어 먹고 싸울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편하게 딜을 하다 보니 산적이 출현하는 필드의 심부로 들어가도 밀리지가 않아 퀘스트를 하며 이틀간 무려 19레벨을 찍었다.
“여기도 진짜 오래 있었네.”
거점에서 룬다인 산까지 돌아다니며 대부분의 퀘스트를 해결했다. 산적에게 빼앗긴 화물을 되찾아오는 것에서부터 산적 두목을 사로잡은 뒤 포디나로 압송하는 것까지 전부 말이다. 그리고 이제 거점에는 퀘스트가 남아 있지 않았다. 슬슬 사냥터를 옮겨야 할 시점인 것이다.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멍! 멍! 멍!”
백구, 황구, 흑구가 차례로 대답했다. 얘들도 나를 따라다니면서 많이 변했다.
일단 흑구는 탱커 포지션으로, 한 손에는 팔뚝에 끼는 작은 방패를, 한 손에는 마비의 단검을 들었다. 처음에는 방패 하나만 들려서 방어에만 치중시켰는데, 갑옷이 좋아져서 어느 정도 어그로를 확보할 수 있도록 무기를 들렸다. 특히 무기는 가지고 있던 마비의 단검들을 영혼까지 긁어모아 강화해서 +7마비의 단검을 만들어 끼웠다.
다음으로 황구는 딜러 포지션으로, 산적들이 사용하는 무기 중 한 손 도끼를 최대한 강화해 두 개를 들렸다. 공격에 노출될 수 있기에 최대한 뒤에서 머리만 노리도록 가르쳤는데, 적성에 맞는지 이상하게 황구에게 등만 보이면 뒤통수가 뜨끈뜨끈해진다.
마지막으로 백구는 창을 들렸다. 이것 또한 산적들이 가장 많이 쓰는 무기인 창으로 강화를 해서 +6강짜리를 들렸는데, 백구의 포지션은 흑구와 짝을 이룰 때는 창으로 멀리서 쿡쿡 찌르고 황구와 짝을 이룰 때는 딜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겼다.
“똑똑한 녀석들…….”
재미있는 건 이 녀석들의 AI가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일수록 점점 영리하게 변한다는 것이었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전투하는 움직임만큼은 여느 훈련된 유저만큼은 지능적으로 싸운다. 덕분에 4마리나 5마리로 이루어진 산적들까지 감당할 수 있게 되어 웬만한 파티 퀘스트들은 얘들이랑 같이 클리어할 수 있게 되었다.
“자, 그럼 마무리 지으러 가 볼까?”
“멍! 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