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세스? 세스!
클레이라는 중급 정령의 광역 공격 패턴은 바닥을 물컹거리게 만드는 장판과 바늘처럼 찌르고 올라오는 진흙 창 그리고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고 밀려오는 진흙의 파도가 광역기다. 또한 접근하면 근접 공격을 하는데, 진흙과 같은 몸을 넓게 펼쳐 감싸거나 거대한 주먹 두 개가 생겨나 내려찍기를 한다.
생명력도 상당해서 본래 계획은 구씨 삼형제에게 광역기 패턴을 분산시킨 후 뒤에서 딜을 넣을 생각이었는데 빌어먹을 놈들 때문에 텄다. 그래서 결론은?
“죽을 때까지 공격해야 한다는 거지.”
피하고 때리고, 피하고 찌르고, 피하고 베어 낸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클레이의 패턴은 이미 아까 지겹게 봐서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근접에서 공격하니 근접 패턴까지 염두에 둬야 해서 난이도는 두 배지만… 문제는 아무리 집중력이 좋다고 해도 그게 30분을 넘어가면 토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슬슬 토할 것 같다.
“더럽게 안 죽네!”
“꾸어어어억!”
[피를 머금은 칼날!]
[진(眞) 광폭화]
쩌엉!
생명력 50%를 계속해서 유지하며 광폭화를 터뜨렸는데도 30분째 칼질 중이다. 다행이라면 현재 막바지 페이즈에 아직까지 노히트 진행 중이라는 거고, 최악이라면 슬슬 집중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거다.
“하!”
찰나 딴생각에 빠졌다가 노히트 깨질 뻔했다. 그래, 범인은 100만 원이다. 그것 때문에 스치는 것도 자제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그러나 이젠 자존심 싸움이다.
“구오오오…….”
“제발 죽어라.”
[뱀파이어릭 오라]
피를 머금은 칼날과 광폭화 뱀파이어릭 오라를 통한 공격력 증폭과 생명력 치환의 선순환은 어찌 보면 무척이나 위태로운 사이클이었다. 세 가지 중 하나만 어긋나도 한 방에 골로 가는 급행열차! 그러나 위축되면 레이드는 여기서 끝이다.
[피를 머금은 칼날!]
생명력을 깎아 버린 공격이 다시금 클레이의 몸에 작렬했다. 그러나 클레이도 만만치 않았다.
파아아앙!
둥근 원형으로 된 진흙의 막이 클레이를 감싸며 칼날을 막아섰다.
“큭!”
동시에 진흙의 막으로부터 솟구친 가시가 내 몸을 찔러온다.
“이런 것도 있었냐!”
가시를 가까스로 피해 낸 난 이를 갈았다. 위튜브 공략에는 없는 스킬이었다.
그러나 이건 공략을 원망할 수 없는 것이 몹 또한 일정 AI가 있어 같은 개체라도 스킬이나 행동과 관련하여 자신만의 개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세이온!
쾅! 콰쾅!
가시를 피해 전력으로 내려치고 베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내 생명력이 빠져나가고 있다.
“정령 타입이라 급소도 없고 미치겠네!”
일격에 큰 피해를 줄 수가 없다. 한마디로 딜로 찍어 눌러야 한다는 건데… 젠장…….
[피를 머금은 칼날!]
[피를 머금은 칼날!]
[피를 머금은 칼날!]
어쩔 수 없이 생명력 치환의 사이클을 무시하고 공격을 마구 꽂아 넣었다.
[진(眞) 광폭화!]
[뱀파이러릭 오라!]
10% 이하로 떨어진 생명력이 오라의 힘으로 천천히 차오르지만 이대로라면 가시에 스치기만 해도 사망할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승부를 걸어야 할 때다.
‘피를 머금은 칼날!’
다시 한번 생명력을 깎아 가며 검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구어어어어!”
피를 머금은 칼날과 진 광폭화로 공격력 1,000%로 증폭된 칼날이 클레이의 방패를 가르고 클레이 솔로 레이드를 완성했다.
클레이의 거대한 몸이 바닥에 흘러내리자 수많은 메시지가 내 눈앞을 채웠다.
[‘무결점 레이드’ 업적을 획득하셨습니다.]
[정령 헌터 업적을 획득하셨습니다.]
[21골드 1실버를 획득하셨습니다.]
[룬다인 레인저 바지를 획득하셨습니다.]
[룬다인 레인저 부츠를 획득하셨습니다.]
[클레이의 보스 스킬 진흙 방패를 획득하셨습니다.]
“깼다. 후우…….”
머릿속이 어질어질하다. 나름 백만 원이 넘어가는 +5희생의 롱소드에 데미지를 300% 상승시키는 광폭화까지 수시로 걸어 때렸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30분 이상. 한마디로 이 이상의 보스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지금 사용하는 희생의 롱소드보다 강력한 최소 전설급의 무기를 장만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마디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잠시의 낯간지러움은 버려야 한다.
“세, 세스 님 사랑해요.”
[세스 님 1,000,000원 후원 감사드립니다.]
-호호호호호.
피로가 가시는 걸 보면 역시 돈이 좋기는 좋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슬프냐. 쯧…….
* * *
“산의 주인을 잠재웠구만. 고생했네. 케이 군.”
“다른 분들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허허, 겸손하기 이를 데 없군.”
[산의 주인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경험치 5,000exp, 30골드, 룬다인레인저 제복x1을 획득하셨습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와 보상이 가방에 들어왔다.
[룬다인레인저 제복] [희귀 등급]
-소량의 미스릴이 첨가된 마법 옷감으로 만들어진 룬다인레인저의 제복이다.
-방어도 100
-내구도 120/120
-옵션: 민첩 +20 모든 저항 +10
-세트 옵션
-3부위: 이동 속도 20% 증가 (3/3)
-5부위: 방어력 +200, 근력 +20 (3/5)
“좋아!”
클레이를 잡으며 얻은 룬다인 레인저 바지와 부츠 그리고 퀘스트를 완료하며 얻은 룬다인 레인저 제복을 착용하기 기분이 이제야 초보티를 좀 벗은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투구와 장갑 세트가 남았지만 그건 경매장에서 사면 된다.
“이제 이 지겨운 토벌대 세트랑 바이바이네요.”
토벌대 세트가 나쁜 건 아니지만 몬스터의 레벨이 올라갈수록 한 대 맞을 때마다 치명상을 입거나 생명력이 널뛰기를 해서 얼마나 조마조마했던가. 이제 그런 과거는 끝이다.
-룬다인 세트 맞추시나 보네.
-토벌대 세트… 확실히 케이 님 보면 신기함. 저런 국민세트로…….
-저는 룬다인 세트는 다 좋은데 방어력이 거지 같아서 패스임.
-토벌대 세트… 어떻게 저런 걸 입고 클레이를 솔플하셨는지가 미스테리네요.
-룬다인 세트도 국민세트지, 뭐……. 나라면 전설 중에 주작 세트로 할 텐데…….
쩝… 잡치는 소리가 채팅창에 보이기는 하지만 무시하자. 아니, 웬만한 소과금 유저도 25렙에서 30렙이 되어야 다 맞춘다는 룬다인 세트를 20레벨 전에 맞췄으면 칭찬해 줘야지 국민 세트라고 할 건 또 뭔가. 쯧…….
내가 방송을 하면서 얻은 깨달음 중 하나가 저런 거 일일이 대응하면 심력은 심력대로 소모되고, 방송이 재미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름 다른 방송 시청자들보다 내 시청자들은 이상하게 얌전하고 예의 바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 방송이 워낙 순한 맛이라 순한 시청자들만 끌린단다. 쩝…….
“룬다인산 퀘스트를 마지막으로 오늘 방송을 이만 끝마치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케이 님~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봬요.
[세스 님 100,000원 후원 감사드립니다.]
-케이 님. 클레이 레이드할 때 거슬렸던 것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예? 그게 무슨 말인가요?”
-백구, 황구, 흑구 죽게 만든 녀석들이요. 보니까 아는 길드 놈들이라서 제가 따로 조치했어요.
-ㄷㄷㄷㄷㄷ 세스 님이 조치했다고 하니까 왜 등골이 오싹하지.
-나망 그런 게 아닌뮤… ㅠㅠ
“으음, 감사합니다.”
최소 추정 레벨 70의 핵고래 약탈자님께서 걱정 말라고 하니까 왜 녀석들이 불쌍해지는 걸까.
“그럼 이만 방송 마치겠습니다.”
띠딕!
방송을 끝마치니 잠깐 맥이 풀린다. 어서 나가서 한잠 자고 싶지만 아직 확인할 게 남았다.
“진흙 방패라…….”
클레이를 잡으며 얻은 보스 스킬이다. 지겹게 보던 진흙 창이나 진흙 파도, 진흙 장판을 얻을 줄 알았는데 뜻밖의 방어 스킬을 얻었다.
[진흙 방패] [1레벨]
-플레이어에게 치명적인 공격이 가해졌을 시 플레이어를 둘러싸는 방어력 5000의 진흙 방패를 소환하고, 공격자에게 대지 속성 물리 피해를 가한다.
-쿨타임: 5초
-소모 마나: 50
써져 있는 것을 보면 타격을 받았을 때 자동으로 발동하는 구조 같다. 확인해 보고 싶지만 공격을 해 줄 이가 없으니 일단 그건 패스다.
“이제 나가야지.”
* * *
푸슉.
“후우…….”
머릿속이 어질어질하고 오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VR게임의 고질적인 폐해인 육체와 정신의 불균형이다. 비틀거리며 캡슐에서 내려오니 그제야 몸의 느낌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8시다.
“진짜 게임 시간 관리 좀 해야 하는데…….”
빨리 레벨업해야 한다는 구실로 자기합리화가 되어 버리니 자꾸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연발하다가 날밤을 새워 버린다.
“윽… 냄새. 캡슐 청소도 해야겠네.”
캡슐 내부의 시트에서 꼬릿꼬릿한 냄새가 올라와 코를 찔렀다. 아직 사용하며 제대로 세탁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찌이익! 찌익!
시트를 고정하는 벨크로를 뜯어 시트를 다 빼낸 후 캡슐 청소 세제를 한가득 뿌렸다. 이 캡슐 청소 세제는 캡슐 내부의 각종 세균이나 해로운 바이러스 따위를 소독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뿌려 두면 살균소독 해 주고 자동으로 날아가는 휘발성이다.
캡슐에서 뜯어낸 시트를 가지고 빌라 옥상으로 올라가 빨랫줄에 걸고 쭈그리고 앉아 옥상 한쪽에 있는 막대기로 시트를 두들기고 있자니 옥상 문이 열리며 검은색 탱크탑에 돌핀 팬츠를 입은 혜미 누나가 졸린 눈을 비비며 어기적어기적 걸어 올라온다.
“어, 정현이 있었네. 캡슐 청소해?”
“네.”
“우으, 그래. 청소는 항상 깨끗이 해야지. 끙… 근데 내 것도 해야 하는데…….”
“해 드려요?”
“아니, 그건 절대 안 되지. 숙녀의 비밀이야. 흠흠.”
캡슐에서 무슨 짓을 하기에 숙녀의 비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리저리 꼬며 스트레칭을 하는 누나의 몸을 계속 쳐다보기도 그래서 다시금 시트로 시선을 고정한다.
“정현아.”
“예.”
“게임하면서 뭐 힘든 일 없어?”
“아직 괜찮아요.”
“그래? 기특하네. 나는 네가 이것 사 주세요, 저것 사 주세요 할 줄 알았는데…….”
“하하, 운이 좋아서요.”
“운이 좋다라……. 부럽네. 난 그 운이 안 따라 줘서 어제도 흑…….”
우는 시늉을 하는 혜미 누나다. 또 강화하다가 날려 먹었나.
“아참, 누나 혹시 레벨 70 정도 되는 세스라는 약탈자 아세요?”
“세스?”
내 물음에 혜미 누나가 조금 놀란 표정이 되어 반문한다.
“왜 그러세요?”
“아냐. 설마 그 세스일 리는 없지. 근데 약탈자는 왜?”
“어제 만났어요.”
“설마 죽었어?”
“아뇨. 그냥 제 팬이라면서 찾아왔더라고요.”
“그렇구나. 흠… 그런 애들 붙으면 방송 힘들어지는데…….”
“고렙 약탈자라서 뭐라고 하기는 좀 그렇더라고요.”
“하긴 그렇지. 나도 예전 초보 때 미친 약탈자 새끼가 팬이라고 달라붙는데… 어휴……. 그건 그렇고 세스라… 설마 아니겠지.”
혜미 누나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세스라는 약탈자를 아세요?”
“있어. 무지하게 강하고 무서운 년.”
누구보다 진한 붉은 약탈자의 문신을 가지기는 했지만 세스는 충분히 말이 통하는 나름 괜찮은 플레이어였다. 게다가 현재는 내 최대 큰손 아니던가. 그러나 뒤이은 누나의 말에 난 왜 세스가 미친년이라고 불리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세스가 네가 말한 그 약탈자랑 같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추정 레벨 72렙, 추정 불명예 지수 11만 이상, 암살단 달의 눈의 수장이면서 별명은 ‘학살공주’. 예전에 일본 길드 하나와 시비가 붙었는데 단신으로 길드 하나 작살 내는 데 걸린 시간 30분. 아주 우리나라 세이온 약탈자계에 아이콘 같은 미친년이지.”
“에?”
“그뿐이니? 성격은 또 얼마나 개 같은지, 수틀리면 아군이든 적군이든 목부터 썰고 들어가고, 그 밑에 있는 ‘달의 눈’ 새끼들도 완전 진성 개 빠돌빠순이만 모아 놔서 그년이 무슨 지시를 하던 목숨 걸고 달려들기로 유명해.”
“와아…….”
흘러나오는 말들이 아주 주옥 같은 것들뿐이다.
그리고 역시 그 무시무시한 약탈자는 내가 만난 세스는 아닌 것 같다.
그런 유명인이라면 내 시청자들이 못 알아볼 리가 없으니까.
“그냥 따라 한 건가 보네요.”
“역시 그렇지?”
“예.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면 제 시청자들이 언급이라도 한번 했을 텐데 그런 게 없었거든요.”
“그렇지. 뭐 작정하고 신분 숨긴다면야 모르겠지만 그런 애가 네 팬일 리가 없잖아.”
뭔가 뒷말이 조금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왜 뒤가 찜찜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