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카렌 린드스턴
“와, 이게 뭐냐?”
형이 캡슐 오른쪽에 새롭게 설치한 삐까번쩍한 컴퓨터 케이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방송 전용 데스크탑이야. 원래 있던 노트북이 돌아가시려고 해서 새로 맞췄지.”
“얼만데?”
“부품값만 430만 원.”
“헐…….”
“뭘 놀라고 그래. 이 정도가 권장사양인데.”
형이 놀라 입이 벌어졌지만 내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오히려 데스크탑이 있어야 할 곳에 노트북을 끼워 넣고 캡슐의 자원을 끌어와 노트북의 성능을 보완하는 식으로 썼기에 이제야 제대로 된 세이온을 한다고 할 수 있었다. 아니, 솔직히 따지면 세이온이라는 게임은 돈을 투자하여 캡슐이나 데스크탑의 성능이 올라갈수록 플레이가 편해져서 어떤 사람은 거의 수억을 투자해 게임 환경을 만든다고 알려졌다.
“돈이 어디서 났어? 한 달도 안 됐는데 방송에서 정산 받았을 리는 없고……?”
“정착금 깼어.”
보육원을 나올 때 400만 원의 정착 지원금이 나온다. 보통은 월세를 얻는데 다 써 버리지만 난 형 덕분에 그 돈을 세이브했다. 형 말대로 정산을 받으려면 아직 보름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
“끙, 내가 사 줬어야 했는데…….”
“사 주긴 뭘 사 줘. 나도 돈 있어.”
“자식이… 네가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동생 너무 무시하네.”
“혜미 말로는 반년은 돈 까먹어야 된다고 하던데?”
“나야 재능이 남다르잖아.”
“지이랄…….”
어 왜 이러실까. 지금 포디나 경매장에 무려 4,000골드짜리 아이템이 들어 있다. 물론 그 가격에 팔릴지는 미지수지만 팔리기만 하면 300만 원이다. 거기에 정산 받지는 못했지만 지금 파프리카에 쌓인 돈만 600만 원이 넘었다. 물론 정산 금액의 70%가 세스 님의 후원 덕분이다. 그러나 위튜브에 제대로 영상 올리고 이것저것 하면 앞으로의 수익은 나쁘지 않을 거라는 게 내 예상이다.
“그보다 마침 형 잘 왔어.”
“어? 왜?”
“형 동영상 편집할 줄 알지?”
“동영상 편집? 내가 그런 걸 어떻게 해.”
“에이, 왜 그래. 형 하는 흥신소에서 뭐 하는지는 빤히 아는데. 대충 편집 프로그램 만질 줄은 알 거 아냐.”
내 물음에 형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물론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안다. 흥신소에서 주로 하는 게 뭐겠는가. 하는 일의 대부분이 배우자의 불륜을 뒷조사하거나 증거를 수집하는 일이다. 그다지 사나이답지 않은 일이기에 나한테는 흥신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꺼리는 편이다.
“난 잘 모르고 나랑 같이 일하는 애가 잘 다뤄. 근데 그건 왜?”
“다른 게 아니라 형네 흥신소에서 내 영상 편집 좀 해 주면 안 될까 하고…….”
“네 영상? 그거 혜미가 편집자 구해 준다고 하지 않았어?”
“말은 했는데 요즘 그쪽에 실력 있는 편집자 구하기가 쉽지 않다네. 몇 명 의뢰해 봤는데 페이가 너무 세서 당장은 무리일 거 같아.”
“그런가. 쯧…….”
흔한 만화나 소설에서처럼 내 잠재력을 알아본 실력 좋은 편집자가 도와준다고 찾아오거나 혹은 실력은 빠방하고 거의 무급으로 해 줄 편집자는 현실에 없었다. 아무리 내가 영상에서 편집할 부분만 짚어 준다고 해도 금액이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어차피 실력 있는 편집자 싸게 구하기 힘들 바에야 형한테 의뢰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아서 그래.”
“음… 그렇지.”
“어때?”
“나쁘지 않은 생각이기는 한데… 광수 그 녀석이 좀… 특이한 놈이라 할지 모르겠네.”
“광수? 형이 같이 일하는 사람이야?”
“어. 사무실에서 주로 전화 받고 컴퓨터로 하는 건 걔가 다 해.”
“편집 실력 좋아?”
“컴퓨터 관련된 실력은 다 최고야. 지금까지 걸린 적이 한 번도 없는데… 흠흠… 아무튼 그런데 애가 머리가 좀 독특해서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하거든.”
“그럼 한번 물어보기라도 해 봐. 정 안 된다 싶으면 프리랜서 사이트에서 아마추어라도 구해 보게.”
“뭐, 알았다.”
“부탁 좀 할게. 형.”
“뭔 부탁까지나 하냐. 돈 다 받을 건데.”
“어. 동생 할인 없어?”
“왜 이러십니까. 고객님. 알 거 다 아시는 분께서…….”
“…….”
* * *
룬다인 레인저 거점에서 접속한 난 곧장 포디나로 향했다.
서쪽으로 떠나기 전 몇 가지 할 일이 있는데, 일단 경매장에 놀 대족장을 잡으며 나왔던 오브가 정산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는 것과 룬다인 세트의 나머지 두 부위를 사는 일 그리고 곧 20레벨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도시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에 싹 정리하고 서쪽으로 떠날 참이다.
“여기, 유품입니다.”
“고맙네. 이제 내 친구가 눈을 감을 수 있겠군.”
[친구의 복수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보상: 윈그레드 친밀도 30, 경험치 1,000exp, 고급 야전식량세트 x10
포디나 서쪽 입구의 상인에게 예전에 받았던 퀘스트를 완료하자 곧 경쾌한 알림음과 들려왔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새로운 스킬 슬롯을 1개를 획득하셨습니다.]
[직업을 얻어 직업과 관련된 기본 스킬을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20레벨을 달성하여 신규 컨텐츠 ‘명예 시스템’이 오픈되었습니다.]
“드디어 20레벨이네.”
세이온에서 20레벨은 중수의 시작점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약탈자와의 대립을 통해 얻는 명예 점수를 본격적으로 획득 및 사용할 수 있는 게 20레벨부터이고, 또한 세이온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직업’이라는 것도 20레벨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직업.’
레벨이나 스킬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직업 선택이다.
“그 전에 먼저 갈 곳이 있지.”
발걸음을 옮겨 경매장에 도착한 난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전에는 장사꾼들로 인해 항상 뚝뚝 끊겨 오기 싫었던 경매장이었지만 이젠 예전 같은 끊김이 전혀 없다. 데스크탑을 설치하면서 캡슐 자원을 더 이상 끌어 쓰지 않게 된 덕분이다. 경매장 안으로 들어서서 정산을 하니 가방에 4,000골드가 들어왔다. 어느 귀인께서 사 주셨는지는 모르지만 감사한 마음이 무럭무럭 피어난다. 물론… 내가 원하는 룬다인 세트의 투구와 장갑을 검색한 순간 난 장사꾼들의 몰염치한 가격 놀이에 쌍욕을 내뱉었지만…….
“젠장, 그래도 사야지.”
매물이 많아서 가격으로 장난치기 힘든 게 국민 세트라지만 그래도 두 개를 사는데 무려 600골드가 나가니 손이 벌벌 떨릴 지경이다. 즉석에서 강화석을 바르니 투구는 +2가 붙었고, 장갑은 +3이 붙었다.
“좋아.”
마음 같아서는 남은 돈을 밑천 삼아 최소 +5 세트로 맞추고 싶지만 그러다가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안전 강화 수치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르고는 역시나 하고 포기하게 되는 게 강화다.
“자, 그럼 이제 직업을 얻으러 가 볼까?”
세이온에서 직업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 가장 흔한 방법은 직업 중계소다. 중계소에 돈을 주고 의뢰를 하면 중계소에서 원하는 직업을 얻을 수 있는 NPC를 소개해 주면 직접 찾아가서 직업 퀘스트를 하거나 골드를 지불하여 스킬을 배울 수 있다. 편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소개 받는 NPC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스킬의 종류와 등급이 다르기 때문에 좋은 NPC가 나올 때까지 노가다를 해야 한다. 흔히 중계소 노가다라고 하는 건데, 중계 의뢰를 하는데도 상당한 골드가 들어 돈 좀 있어야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원하는 직업 스킬을 지닌 NPC와 친분을 쌓는 방법이다. 친분을 일정 이상 쌓으면 NPC가 자신의 스킬을 가르쳐 주는데, 세이온 초반에는 이런 NPC 정보가 상당한 고가에 거래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도 맹점이 있었으니 좋은 스킬을 가진 강한 NPC일수록 사회적인 위치가 높았고, 그런 NPC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지위나 신분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게다가 만나기만 한다고 전부 스킬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다. 그 강한 NPC에게 친분을 쌓으려면 그만큼 값진 보물을 주거나 비위를 맞춰야 하니 그 또한 그다지 쉬운 건 없었다. 그러나… 음, 난 운이 참 좋다. 몇 가지가 절묘하게 들어맞아 그런 개고생을 할 이유가 없어졌으니까.
“통과! 이곳부터는 내성이니 특별히 행동에 주의하게.”
“예.”
내성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이 내 위아래를 뚫어질 듯 훑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창을 치웠다. 참고로 이 내성으로 통행하기 위해서는 일정 이상의 명예 점수가 필요한데, 20레벨이 되면서 정산된 230점이라는 내 명예 점수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줬다. 지금까지 내 명예 점수가 되어 주신 약탈자님들께 감사와 경의를 표하자.
어느 성곽도시에서건 내성이라는 건 도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시의 중요 인물들과 그들의 가족이 살며 또한 보호해야 할 중요 시설들이 있기 때문에 그 출입은 엄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참고로 아무리 강력한 약탈자라도 이 내성에는 침투할 엄두를 내지 않는데, 그 이유는 요소요소를 지키는 경비병들이 강력할 뿐만 아니라 최악의 경우 경비 기사단과 마주치는 순간 아무리 많은 숫자라도 떼 몰살을 당하게 된다.
“얘들아.”
“우와! 오뿌아!”
“형!”
집 앞 화단에 꽃을 심고 있던 레나가 나를 발견하고는 도도도도 달려와 답삭 안기고 한쪽에 서서 목검을 휘두르던 레미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게 걸어왔다.
“잘 있었어?”
“네, 네!”
“예!”
마지막 헤어질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혈색이 좋아진 둘이 내 물음에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이제 빈민가가 아닌 웬만한 부민들만 사는 내성의 주택 단지로 옮겼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도 있다. 엄마인 카렌 씨가 포디나의 레인저 스트라이더라서 거의 준귀족이나 마찬가지의 신분이니까. 집도 예전의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이 아닌 정원이 딸린 벽돌로 지어진 아담한 이층주택이다.
“얼른 들어가요!”
“응응! 드어가!”
내 손을 양쪽에서 붙잡은 둘이 나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 의자에 앉으니 갖가지 음식들을 바리바리 들고 와 식탁에 올린다. 말리지 않으면 집안 살림을 거덜 낼 기세.
잠시 후 둘이 식탁에 나란히 앉았는데 레나는 거의 내 무릎에 붙다시피 앉아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흠흠, 어머니는?”
“엄마는 보통 저녁때 오세요.”
“그렇구나.”
“혹시 급한 일이시면 제가 가서 모셔 올게요. 형 왔다고 하면 금방 오실 거예요.”
레미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괜찮아. 너희들이랑 같이 기다리지, 뭐.”
“헤에, 그롬 오뿌아 오늘 우리 집에서 자는 거야?”
“잠? 아니, 그건 힘들고…….”
애 둘 딸린 미망인 집에서 잠을 잔다니……. 어느 동네 야설에서나 나올 클리셰다.
내 대답에 잔뜩 실망한 표정이 되는 레나다.
“히잉, 레나는 오뿌아 기다렸는데.”
“레나가 형 언제 오냐고 맨날 칭얼거렸어요.”
“하하, 정말?”
“예.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형이 예전에 만들어 줬던 그 채소스프 찾아서 힘들어 죽겠어요. 이 까탈쟁이!”
“레나 까탈쟁이 아니닷!”
“까탈쟁이 맞잖아. 맨날 만들어 달라고 징징거리다가 애써 만들어 주면 맛없다고 말하고…….”
“히잉…….”
여느 평범한 오누이의 대화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NPC니 뭐니 따위는 상관없이 얘들에게는 항상 진심으로 대하게 된다. 하긴 그래서 두들겨 맞는 레미를 두고 보지 못했고 덕분에 히든 퀘스트를 얻었지.
“그럼 내가 다시 한번 만들어 줄까?”
“징짜욧?”
레나가 눈을 반짝였다. 어지간히 그때의 스프맛을 잊지 못하는 것 같다.
“어려운 것도 아니니 해 주지. 대신 맛없어도 먹어 주기.”
“오뿌아가 만든 게 맛없을 리 없어욧!”
“하하, 알았어.”
느끼는 맛이 같을까 싶지만 뭐 만들기 어려운 건 아니니까. 이전처럼 스프를 가득 끓여 빵과 함께 식탁에 올린 후 레미 레나와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우웅…….”
빵을 찢어 스프에 듬뿍 적신 후 입안에 오물오물 밀어 넣은 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맛없어?”
“아네요. 근데… 근데…….”
“근데?”
“우웅, 솔직히 예전에 먹었을 때보다는 맛이 없어요오…….”
행여 실망하지는 않을까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는 레나다. 그러나 난 실망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때보다 맛이 없을 테니까. 그런 레나를 바라보던 레미가 불쑥 손을 내밀어 레나의 스프 그릇을 잡았다.
“그럼 너 먹지 마. 내가 다 먹을래.”
“시여! 레나 거야!”
“맛없다며.”
“마이떠!”
“하하하하하…….”
이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그럼 이거 먹어 볼래?”
난 품에서 시청자분이 우편으로 보내 준 특제 육포를 꺼내 들었다. 백구, 황구, 흑구 전용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유저 메이드 제품이라 웬만한 음식보다 효과도 좋고 맛도 뛰어나다. 거의 재능기부 정도로 받은 건데, 뭐 본래 주인분들이 역소환 쿨타임에 걸려 계시니 좀 먹어도 되겠지.
“맛있다!”
“우왓! 이거 마이떠요!”
정신없이 집어 드는 걸 보니 역시 잘 꺼낸 것 같다.
그렇게 아이들과 신나게 육포를 먹고 있자니 한 여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엄마!”
두 아이가 벌떡 일어나 여인에게 답삭 안긴다. 아이들을 안아 준 그녀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케이 님?”
레미, 레나의 엄마이자 포디나의 레인저 스트라이더인 카렌 린드스턴이었다.